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316
오늘따라 더 그리웠다.
“그리고 만약, 세상 전부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면…….”
시로네는 제르비스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 다오.”
“…….”
“어쩔 수 없었잖아, 제르비스. 넌 어렸고, 너에게 세상은 너무 강대한 적이었어. 그런 적과 싸웠을 뿐이야. 하지만 이제는 달라. 선택할 수 있어. 모든 사람들의 인생이 네 선택에 달려 있는 거야.”
“왜?”
제르비스는 몸을 돌렸다. 휘어진 다리로 비틀거리며 걷던 그가 주저앉았다.
“다들 날 미워했잖아. 내 곁에 오지 않았잖아. 왜 그들을 위해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모든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을 수도, 한낱 망상으로 끝내 버릴 수도 있다.
“하아.”
제르비스의 몸에 있는 수백 개의 눈동자가 하나둘씩 눈을 감기 시작했다.
시로네가 슬픈 표정으로 다가갔다.
“제르비스, 너를 위해…….”
갑자기 시간이 멈췄다.
눈송이도, 시로네도, 제르비스도 황량한 공간 속에 박제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풍경이 멀어진다.
행성이 보이고, 우주가 보이고, 마침내 생각을 빠져나와 회백질의 뇌가 되었다.
뇌를 담고 있는 것은, 흑발의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남자의 얼굴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현실.
퀴퀴한 지하실에 끽 하고 철문이 열리더니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시로네는 제르비스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성음에게 미리 기별을 받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느낌은 훨씬 참담했다.
‘그랬구나, 제르비스.’
벽에 등을 기댄 채 사지를 늘어뜨린 그의 모습은 시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자해와 자살의 흔적.
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손목의 인대를 끊고, 아킬레스건을 끊고, 두 무릎을 부쉈으며, 안구를 적출하고, 근육을 망가뜨렸다.
그럼에도 죽지 못했다.
‘앙케 라.’
프로세스가 극단적으로 약해지면서 앙케 라 프로그램이 발동되었기 때문이다.
목덜미에 자라나는 큼지막한 눈동자가 시로네의 등장에 불안한 듯 동공을 움직였다.
그러자 피부를 뚫고 자라고 있는 신경들이 촉수처럼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끄륵.”
제르비스가 꿈틀했다.
대부분의 감각을 잃어버린 상태지만 그는 먼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마 시로네라는 것을 짐작한 듯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 연쇄살인마를 본 적이 있습니까?”
시로네는 대답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런 자가 존재한다면 현재 세상에 제르비스가 유일하지 않을까?
“괜찮아요. 제가 선택한 일입니다. 오히려 간만에 잠을 잤더니 홀가분하달까.”
무의식에서 정리가 된 듯했다.
“늘 깨어 있었던 거야?”
“그렇지요. 많은 생각을 했어요. 어째서 이 저주받은 몸은 죽지 않는 건지. 가끔은 그것조차 착각이고, 이미 죽은 게 아닌가 싶더군요.”
제르비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제 머릿속 세상에서는 여름도 겨울도 춥고, 웃고 있는 사람도 울고 있는 사람도 모두 하늘을 올려다보며 부모보다 더 먼 부모를 향해 무언가를 내려 달라고, 무언가를 알려 달라고 울부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한 인간이 평생을 고뇌하며 내린 결론은 시로네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야훼란 참 경이로운 경지에 오른 사람이군요. 제 생각 속에서도 깨닫다니. 그래서 당신을 오류라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닥의 신경들이 널뛰었다. 앙케 라의 눈동자가 짜증스럽게 움직였다.
“저는…… 앙케 라가 되는 것입니까?”
“너의 선택에 달렸지.”
“신인가, 영원한 소멸인가, 겠군요.”
시로네는 이곳 사용자들의 죽음 이후에 대해서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제르비스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 연쇄살인마는…… 선일까요, 악일까요?”
어려운 문제였다.
선악이라는 건 하나의 방향성이고, 극단에 가깝지 않은 이상 정의할 수 없는 것.
“무슨 소리야?”
하지만 시로네는 말해 주고 싶었다. 야훼가 아닌 1명의 인간으로서.
“당연히 선이지.”
악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때로는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시기하거나, 더 나아가 살의를 품기도 한다.
그 끔찍한 분노의 불길 안에서도 최선을 다해 나 자신을 구원하려는 의지.
시로네에게 선이란 그런 의미였다.
“친절하군요, 당신은.”
제르비스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고 앙케 라의 눈이 하얗게 멀기 시작했다.
결정을 내린 것이다.
“좀…… 허무하네요.”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숨을 거두자 바깥에서 움직이던 신경들이 죽었다.
시로네는 묵념했다.
‘당신에게도 의미 있는 꿈이었기를.’
그러는 동안 제르비스는 빛을 따라 이동했다.
사용자 코드에 기계음이 들렸다.
-윤회 종료. 미싱 링크를 해제합니다. 긴 여행에 수고하셨습니다. 매뉴얼에 따라 휴식을 취하시고, 관제 센터에 경과 보고하시길 바랍니다.
시로네는 몸을 돌렸다.
지하실의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당시를 회상했다.
나네는 이렇게 물었다.
만약 인간들이 신의 지배 아래 사후 세계를 원하게 된다면 어떡할 거냐고.
“나는…….”
시로네는 이렇게 답했다.
“바깥 세계로 나가는 길을 닫지 않을 거야. 완벽한 독립은 아닐 테지만, 모든 사람들이 죽고 난 이후에 그곳에서 다시 눈을 떴으면 좋겠어.”
나네는 의외란 표정이었다.
“괜찮겠어? 인간의 의지가 다시 통제당할지도 몰라. 그건 네 신념과 어긋나지.”
“이기려고 싸운 게 아니야.”
나네를 돌아보며 시로네가 말했다.
“모두가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잖아.”
두 사람은 오랫동안 시선을 교환했다.
나네가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너랑 싸울 수 있어 영광이었다.”
“나도. 영광이었어.”
야훼와 부처가 손을 맞잡는 순간 무한한 빛이 뿜어지며 광자계를 이탈했다.
끼익.
철문이 열렸다.
노을이 비치는 하늘 아래, 에테르 파동을 타고 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올드, 미로, 위저드, 에이미, 페르미…….
‘걱정하지 마, 나네.’
부처의 철학이 있었기에, 야훼의 철학도 세상에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
‘끝까지 이어 나갈 테니까.’
에이미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잘 끝났어?”
“응.”
꽤 힘든 며칠이었다.
무장해제 명령을 기다리는 듯한 분위기에 시로네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리고 퀭한 눈으로 말했다.
“집에 가자, 이제.”
에필로그 II
시로네 일행은 왕성으로 갔다.
사후 처리의 문제도 있고, 하루 정도는 수도에 머물며 경과를 살필 생각이었다.
포니가 말했다.
“고생했어, 시로네. 다들 고생하셨어요. 곧 전범 재판이 열릴 거야. 종전 10주년 기념행사는 없지만, 토르미아의 입지는 더 탄탄해지겠지.”
시로네가 말했다.
“우리는 전쟁을 한 게 아니야.”
“알아. 토르미아의 국왕으로서 고맙다는 뜻을 표한 거야. 보답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보복 전쟁은 없을 거야. 대신 정치적으로 많이 복잡해지겠지. 하지만 토르미아에도 유능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시로네의 생각에도 이번 사태는 차후 해석의 여지가 극명하게 갈릴 터.
그런 상황을 알고서도 무력 충돌은 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한 것이었다.
“고마워, 포니.”
“별말씀을. 이 정도는 해야 나도 어디 가서 시로네 동창이라는 소리를 하지.”
포니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음껏 즐기세요. 오늘은 제가 쏠 테니.”
접견실을 나온 시로네 일행이 복도를 걷는데 루피스트와 플루, 알비노가 걸어왔다.
소위 토르미아의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루피스트가 물었다.
“뒤풀이?”
“네. 간만에 친구들하고 할 얘기도 있고요. 루피스트 씨도 같이 가시죠?”
“우린 따로 하지. 누군가는 남아서 일을 봐야 하니까. 이쪽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선을 긋는 이유는 포니의 말대로 앞으로 정치판이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위저드는 알비노를 보고 인파에서 나왔다. 그리고 경례를 하며 소리쳤다.
“충성! 보고합니다! 웨나 위저드! 고장 난 부분 완벽하게 수리했습니다!”
알비노는 피식 웃었다.
알페아스 마법학교 학생으로서 토르미아 실세와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을 터.
‘시로네하고는 또 다르구먼. 그래도 상처가 되는 말이었을 텐데, 잘 이겨 냈어.’
젊음의 탄력성이란.
“그래, 자네도 수고했네. 이제 남은 건 졸업이지. 우리 쪽도 최고의…….”
“정말 감사합니다!”
위저드는 알비노를 끌어안았다.
“덕분에 해낼 수 있었어요. 무상신을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었다고요.”
알비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
젊음의 탄력성이란.
플루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위저드, 뭐 하는 거야? 무례하게.”
위저드는 그제야 알비노를 풀어 주었으나 여전히 얼굴은 웃고 있었다.
“앗, 죄송해요. 너무 기분이 좋아서.”
위저드가 다시 일행에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알비노는 눈웃음을 지었다.
나이가 들어 수염마저 빠져 버린 노인의 웃음에는, 일말의 회한도 없어 보였다.
‘잘 살았다.’
평생을 치열하게 싸웠다.
끝없이 고뇌했던 생각들은 지금도 토르미아의 많은 곳에 스며들어 있을 터.
그리고 이제 그 울타리에서 자란 새싹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려 하고 있었다.
“슬슬 은퇴해야겠구먼.”
어느새 알비노의 옆으로 다가와 있던 이루키가 일행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휴가나 좀 드릴게요. 요새 엘리섬이 좋대요. 어머니 데리고 잠깐 다녀오시죠.”
생각에 잠긴 알비노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럴까.”
***
바슈카 시내의 대형 술집.
술에 취한 네이드는 무대에 올라 전자 기타를 메고 손가락으로 현을 튕겼다.
고개를 쳐든 그가 돌고래 소리를 내자 조명이 켜지면서 밴드가 등장했다.
웅장하고 전투적인 록 음악이 폭발했다.
“빠레이!”
테이블에서는 폭탄주가 돌고 있었다.
“이번에는 미로 씨 차례!”
큰 컵에 사과 주스와 포도 주스가 동시에 차올랐다. 미로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가올드가 말했다.
“오늘 같은 날 말릴 수도 없고. 근데…… 너무 과음하는 거 아냐? 푸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