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99
“아, 안 돼!”
망각의 저편에 감춰진 공포가 발동했다.
“안 돼에에에에!”
***
“아니야! 난 겁쟁이가 아니야!”
중장갑으로 무장한 바이콘이 곰처럼 커다란 덩치를 웅크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했던 기억들이 검사의 정신을 공포로 물들이고 있었다.
살아가며 한 번씩은 경험했을 끔찍한 실수의 기억들.
오직 핵심 멤버들만이 망막에서 펼쳐지는 사건을 관조하며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여긴 또 뭐야?”
지금의 현상에 대해 일말의 분석도 하지 않은 채, 리안은 대직도를 어깨에 걸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살인자!”
끝없이 펼쳐진 어둠의 바다에서 시체들이 수면 위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난…… 패배를 인정했어. 절대로 너의 뒤를 찌를 생각은 없었다고. 그런데 너는 가차 없이 나를 베어 버렸지.”
그랬었다.
“강해지겠다고? 고작 그런 이유로 나를 죽인 건가? 너의 호승심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없앴지?”
그랬었다.
“우리 가족들은 굶어 죽었어. 네가 나를 죽였기 때문이지. 전부 너 때문이야! 너는 살인자야!”
여태까지 죽였던 수백 구의 시체들이 포위망을 형성하며 소리치는 와중에도 리안은 대답이 없었다.
“죽어라! 온통 실수뿐인 네 인생에, 너의 실수로 망쳐 버린 수많은 생명에게 죽음으로 참회해라!”
썩어서 너덜너덜해진 시체들이 처절한 동작으로 리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것이 네가 만든 비극이다!”
동시에 리안이 인상을 일그러뜨리더니 이빨을 드러내며 대직도를 크게 휘돌렸다.
일격에 둘로 분리되어 버린 시체들이 바닥에 쓰러져 비통한 표정으로 손을 치켜들었다.
“어째서…….”
짓무른 눈동자 아래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인간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수많은 생명을 갈취해 놓고 일말의 양심도 없단 말인가?”
리안이 정말로 냉혈한이었다면 애초부터 이런 기억을 경험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신념이다.”
이해나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
“악몽이든, 악귀든, 정말로 부활한 것이든.”
피눈물을 흘리는 시체의 얼굴을 리안이 짓밟자 퍽 하고 뇌수가 폭발했다.
“한 번 베었다면, 몇 번이고 다시 벨 수 있다.”
후오오오오!
공간을 가득 채운 시체들이 귀곡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자 리안이 군중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검을 휘둘렀다.
“죽어라! 죽어라! 죽음으로 갚아라!”
“지옥에서 기다려, 이 멍청이들아.”
이미 죽은 자의 몸을 또다시 난도질하는 리안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신념의 왕국을 세운 뒤에 얼마든지 죽어 줄 테니까.”
해일처럼 밀려드는 시체들을 똑바로 베어 나가는 리안의 등 뒤로 거대한 길이 열리고 있었다.
공포의 군주 (2)
***
“불이 났어! 풀잎 서커스단 쪽이야!”
시장에서 장을 보던 샤갈이 들고 있던 짐을 내팽개치고 서커스단의 천막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쓰레기 같은 자식들!”
메르헨 왕국 전역을 순회하지만 샤갈이 처음 라이덴을 만났던 이곳만큼은 끔찍하게 싫었다.
예전부터 서커스단을 괴롭히던 말썽쟁이 삼인방이 폭력단을 이끄는 리더로 성장한 것도 모자라 호시탐탐 티아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돼!’
천재적인 운동 능력으로 순식간에 산을 올랐으나 이미 불길은 괄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만약 티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샤갈은 고개를 저었다.
‘살아만 있어 줘!’
천막 밖에서부터 시체가 보였고, 속사검 라이덴이 살생의 금기를 깼다는 것은 한편으로 희망적이었다.
“단장님! 티아!”
천막을 활짝 젖히자 핏빛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티, 티아…….”
수십 명의 시체 사이에서 샤갈은 곧바로 티아를 찾아냈다.
수십 개의 칼집이 나 있었고, 옆에는 밉살스러운 폭력단의 리더 3명이 혀를 빼물고 죽어 있었다.
모두가 죽었다.
오직 한 사람, 속사검의 라이덴만이 높은 상자에 올라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두 다리를 까닥까닥 흔들고 있지 않았다면 시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얼굴이 피로 범벅이었고, 눈에는 생기가 빠져나가 있었다.
“라 에너미.”
“단장님…… 어째서?”
티아까지 죽인 것일까?
“단장님!”
샤갈이 소리치는 순간 라이덴이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쳐들었다.
“라 에너미!”
상자에서 뛰어내린 그가 샤갈에게 돌진하자 마치 바람에 이끌리듯 단도들이 저절로 솟아올라 그의 손에 쥐였다.
수십 자루의 칼날이 동시에 급소를 노리자 샤갈도 본능적으로 똑같은 기술을 펼쳤다.
단도의 소유권이 실시간으로 바뀌면서 스승과 제자가 무지막지한 손의 기술을 펼쳤다.
라이덴이 천재라고 칭했듯 무려 일곱 장의 스키마를 운용하는 샤갈의 실력은 이미 청출어람.
단도의 소유권이 샤갈에게 완전히 넘어가면서, 라이덴의 몸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렸다.
“하아! 하아!”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티아가 죽었고, 티아를 죽인 단장을 죽였다는 공포만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흐으으으!”
미쳐 가는 그때 라이덴이 말했다.
“용서해라.”
샤갈의 고개가 홱 틀어졌다.
“왜 죽였습니까? 도대체…… 왜!”
“용서해라.”
한때는 샤갈의 신념이었던 그 말은 이제 의미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채 단장의 유언으로 남았다.
“왜에에에에!”
***
모두가 이고르의 공포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무렵 시로네는 어두운 공간에 서 있었다.
공포라는 것은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거나 이미 벌어진 일을 외면하지 못할 때에 생기는 감정.
카르 수치가 90퍼센트에 육박하는 시로네에게는 어떤 것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눈앞에 등장한 것은 공포 그 자체, 이고르였다.
“카르, 데 수마흠?”
유일한가?
울티마 시스템을 통해 이고르의 의미가 전해져 왔다.
“당신은 날 제압할 수 없어요. 이제 그만 우리를 보내 주시죠.”
“아니.”
이고르가 창을 치켜들었다.
“유일하지 않다.”
청염의 창이 날아와 시로네가 몸을 날린 자리에 처박히자 푸른 전격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졌다.
‘맞으면 위험하겠어.’
순간 이동으로 크게 우회하며 포톤 캐논을 연사하자 섬광에 관통당한 육체가 연기처럼 풀어지더니 금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공포. 외면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건가?’
어느새 이고르의 손에는 새로운 창이 들려 있었고, 엄청난 속도로 팔을 휘두르자 푸른 불꽃이 시로네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해보자 이거지!’
허공으로 날아오른 시로네가 광천사의 화신을 구현시키며 천사의 징벌을 시전했다.
빛과 청염의 창이 수없이 교차했다.
소나기처럼 퍼부어진 천사의 징벌은 이고르를 일격에 박살 낼 정도였으나 그럴 때마다 끝없이 육체가 복구되었다.
‘어떻게 없애라는 거야?’
가장 먼저 복구되는 오른팔이 끝없이 투창했다.
‘시불상폭매!’
해일처럼 밀려드는 수천 개의 창을 시로네가 회피하자 이고르의 고개가 살며시 기울었다.
“약간 깨달았군.”
“뭐?”
현이 튕기듯 이고르의 체선이 진동하더니 지평선을 가득 채울 만큼의 숫자로 불어났다.
“공포는 네 안에 있는 것!”
이고르의 공간에 청염의 창이 가득 찼다.
회피할 곳이 사라진 상황에서 한 자루의 창이 시로네의 몸을 직격했다.
“크으으!”
전격이 퍼지면서 공포의 의지가 90퍼센트의 카르를 우회하여 10퍼센트의 인간미에 작용했다.
그 공포는 놀랍게도…….
‘뭐야?’
시로네의 죽음에 관한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었다.
‘이카엘?’
앙케 라가 거주하는 아라보트에 이카엘이 무릎을 꿇고 있고 수많은 신민들이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유는, 이 기억을 가진 주체가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시로네는 그녀가 그토록 서럽게 눈물을 쏟아 내고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비난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대천사의 정신이라면 죽음 또한 그녀에게 공포로 다가오지 않을 터였다.
‘왜 울고 있어요?’
오열하는 그녀의 얼굴은 대천사라고는 볼 수 없는, 지극히 인간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성애였다.
시로네는 왈칵 눈물이 흘렀다.
‘왜 울고 있어요!’
기억의 주체는 분명 시로네 본인이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결코 담겨 있지 않은 기억이었다.
‘카리엘!’
천국에서 지독히도 시로네를 괴롭혔던 그가 오만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더니 역겹다는 듯 고개를 틀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상태인 거지?’
대체 어떤 상태이기에 소리도 들을 수 없고 시야는 전부 열려 있으며 입조차도 뻥긋하지 못하는 것일까?
잠시 후 3각 마라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붉은 피부에 도마뱀을 닮은 얼굴, 길게 찢어진 콧구멍에서는 불꽃이 뿜어지고 있었으나 느낌조차 없었다.
‘나는 도대체 뭐야!’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3각 마라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두 팔에 들린 거대한 도끼가 하늘로 치솟았다.
‘이것이 나의 죽음이라고?’
생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죽음이 기억으로 스며들면서 공포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죽는다!’
3각 마라의 도끼가 내리꽂히면서 시로네의 생이 끝났다.
동시에 이고르의 창에 꿰뚫린 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푸른 전기를 사방으로 퍼트렸다.
“으아아아아!”
공포!
이고르의 공포 능력은 시로네의 생애에 없던 전생의 죽음을 부활시키는 것으로 원인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야말로 라 에너미가 바라는 것이었고, 그의 사건이 시로네의 뇌리로 침투를 시도했다.
-드디어 잡았구나!
오감의 기억이 시로네의 과거를 바꾸려고 하는 그때, 아르망의 로브에서 돌기들이 튀어나왔다.
소세계창유!
오감의 기억이 전부 막히면서 작은 횃불이 피어 있는 어두운 공간에 시로네의 몸이 털썩 떨어졌다.
“흐으으윽! 흐윽!”
아직 가시지 않은 공포에 몸을 떠는 그때, 스르릉스르릉 칼을 가는 소리가 들렸다.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자 송곳니가 입술 밖으로 삐져나온 여자가 숫돌에 검을 갈고 있었다.
“애석하구나, 내 주인이여. 참으로 애석하다.”
‘주인?’
횃불이 따듯했고 감각이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당신은 누구죠?”
짐작은 갔으나 물어볼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칼을 갈고 있다.”
대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그녀에게 다가가던 시로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광원에 비친 것은 얼굴뿐이었고, 어둠에 가려진 그녀의 몸체는 수십 미터 크기의 온갖 생물체의 집합이었다.
소름이 돋는 모습에서 시로네는 익숙한 것들을 찾아냈다.
진마이식종 갈토믹, 갑식광물종 링거, 아카마이가 달라붙어 있고, 의식을 잃은 타락천사 이카사의 모습도 뒤섞여 있었다.
“나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
그녀가 상체를 일으켜 세운 것만으로도 얼굴이 10미터나 높게 떠올랐고, 유일한 사람의 형상인 오른팔이 검을 겨누었다.
“수많은 존재들이 나를 품었고 유린했지. 너 또한 마찬가지다, 시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