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26
“……그런가?”
여기까지가 사적인 재회였다.
얼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워커는 시로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정식으로 공무를 수행했다.
“왕성 경호대장, 리트니 워커가 전하옵니다. 국왕께서 시로네 님을 왕성으로 초청하셨습니다.”
아독스와 미겔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왕, 왕성 경호대장?”
백부장인 아독스와 비교하자면 하늘 끝에 올라 있는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카즈라 최고의 검사가 나타난 것도 마을이 뒤집어질 일이지만, 시로네에게 부복한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저 자식이 대체 누군데?’
시로네가 엠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만 가 볼게요. 고마웠어요.”
왕의 승인이 떨어졌으니 더 이상 외교적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터였다.
‘키도에게 신호를 보내야지.’
시로네가 문으로 향하는 그때, 아독스가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아무리 귀하신 분이라도 이대로 가서야 되겠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시로네를 그냥 보내면 군인이자 남자로서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일이었다.
“존경하는 경호대장님, 이분이 누군지는 모르나 제 아내를 욕보이려고 했습니다. 진상 규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워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왕의 명이라는 말이 나온 마당에 자기주장을 편다는 것은 카즈라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일이었다.
‘아니야. 이것도 자격지심이지.’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린 워커는 아독스의 말을 뒤늦게 상기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내를 욕보이려고 했다고?’
시로네의 성격으로는 가능성이 희박한 사건이었다.
“이자의 말이 사실입니까, 시로네 님?”
“네, 사실입니다.”
진실을 말하면 이들의 인생이 바뀐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그들만이 알 수 있기에, 시로네는 남의 집에 왔다 간 듯 그대로 놔두고 떠나고 싶었다.
생각에 잠긴 워커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뭔가 사정이 있나 보군요. 이제 그만 떠나시죠.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아독스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경호대장님. 아니, 겁탈하는 데 어떻게 사정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닥쳐라, 얼빠진 자식.”
타국의 핵심 요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수치심을 느낀 워커가 아독스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지금이 영광의 시대였다면 네놈의 목은 진즉 떨어져 나갔을 것이야.”
국경을 얼마나 허술하게 지켰기에 시로네가 이토록 손쉽게 마을에 침투할 수 있었단 말인가?
눈의 기술 프레싱이 들어가자 아독스는 숨이 턱 막혔다.
“끅…… 끄윽…….”
마치 누군가가 목을 조이는 기분이었다.
“사, 살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차갑게 얼굴을 돌린 워커가 분을 참지 못하고 문으로 향했다.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독스가 바닥에 털썩 쓰러지고, 시로네와 리안이 못 본 척 그의 몸을 뛰어넘어 밖으로 나왔다.
워커의 부하들이 마차를 끌고 왔다.
본래라면 집마차를 대동해야 하지만 기동성이 생명인 상황인지라 중량을 최대한 줄인 상태였다.
마차 안에서 워커가 말했다.
“카즈라의 상황이 이렇습니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군요.”
군기는 약해지고 사이비 교주들이 설치는 상황에 시로네의 지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하께 반드시 알려야 할 일이 있어서요.”
“네. 잃어버린 왕자님에 대한 얘기라고 들었습니다.”
직접 전하고 싶었기에 시로네는 입을 다물었다.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전하와 시로네 님의 대화가 끝났을 때, 제가 검을 뽑아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까?”
시로네는 오르캄프에게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었다.
당신의 아들이 헥사를 대신해 죽었다고.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군요.”
워커는 하얗게 세어 버린 눈썹을 모았다.
“그때는 최선을 다해 베겠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리안의 눈빛이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어.’
키도는 이미 산에서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도시에 도착한 일행은 마법협회의 공간 이동 마법진을 통해 카즈라 왕성으로 점프했다.
관료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사안이라 생각했는지 경호원들만 대기하고 있었다.
은밀한 루트를 따라 내전에 도착한 워커는 시로네 일행의 무기를 살폈다.
‘무장을 해제시키고 싶지만…….’
아마도 거절할 것이고, 관철시킬 수도 없을 터였다.
어쨌거나 승인이 떨어진 사안이기에 워커는 문 너머에 있는 오르캄프를 향해 보고를 올렸다.
“전하, 시로네 님이 도착했습니다.”
“들라 하라.”
문이 열리고 단상의 의자에 오르캄프와 엘리자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많이 수척해지셨구나.’
왕가의 기운이라는 것도 칭호를 통해 발현되는 허상에 불과, 카즈라의 왕과 왕비는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안녕하셨습니까, 전하. 아리안 시로네입니다.”
전과 다른 기질에 오르캄프의 눈이 반쯤 감겼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군.’
일국의 왕을 앞에 두고도 긴장한 기색은커녕 목적을 관철시키겠다는 의지만이 전해져 왔다.
“병사가 꿈을 통해서 자네의 말을 들었다고 했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사실인가 보군.”
테라포스의 신탁이 제대로 전해진 모양이었다.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반드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듣기 전에 오르캄프가 손을 저었다.
“모두 나가 있으라.”
측근들이 내전을 빠져나가고 문이 닫히자, 엘리자가 기다렸다는 듯 목을 빼내고 물었다.
“설마 우리 아들을 찾기라도 했다는 것이냐?”
“네, 찾았습니다.”
거기까지는 기대하지 못했기에 엘리자의 얼굴이 충격에 잠겼다.
“정, 정말로…… 우리 아들을…….”
이제부터는 돌이킬 수 없었기에 시로네의 눈빛 또한 차갑게 가라앉았다.
“찾았지만 데려올 수는 없었습니다. 왕비님의 아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뭐, 뭐라?”
시로네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분명 사실만을 전했으나,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언어는 왜곡되고 가공되어 마치 딴 세상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오르캄프가 쥐어짜 내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우리 아들이 죽었다는…… 것인가?”
“아뇨.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시로네가 무릎을 꿇었다.
“시로네! 무슨 짓이야?”
리안과 키도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으나 시로네는 이미 각오를 끝낸 상태였다.
“왕자님은 단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저를 살리기 위해 대신 희생당한 것입니다.”
내전에 적막이 흘렀다.
‘시로네…… 너는.’
오르캄프가 의자를 움켜쥐었다.
‘어떻게 이리 냉정할 수가 있지? 어찌 이리도 잔인할 수가 있느냔 말이다!’
말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부모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라면, 그저 아들이 죽었다고 고하기만 하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일말의 가책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겠지. 그렇게 다 털어 버리고 떠나고 싶다는 것이겠지!’
시로네가 고개를 들었다.
“복수하셔도 좋습니다. 벌을 내리셔도 좋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받겠습니다.”
“왜에에에에!”
엘리자가 귀신 같은 얼굴로 악을 질렀다.
“왜 너야! 왜! 왜! 너 따위가 뭔데에에에!”
무언가를 토해 내는 자세로 외치는 그녀의 눈에 실핏줄이 터지고 목에서 피가 끓는 소리가 들렸다.
“죽일 거야! 끔찍하게 죽여 버릴 거야!”
엘리자가 손톱을 세우고 튀어 나가자 리안과 키도가 무기를 움켜쥐었다.
“워커!”
오르캄프의 목소리에 쾅 하고 문이 박살 나면서 최정예 경호대원들이 내전으로 들이닥쳤다.
“전하를 지켜라!”
순식간에 사태 파악을 끝낸 워커가 시로네를 향해 돌진했다.
‘죽여야 한다.’
왕의 안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우아아아아!”
리안이 몸을 뒤틀며 대직도를 뽑아 들었다.
두 사람의 검이 충돌하고, 무지막지한 힘이 서로를 밀어내면서 바닥을 미끄러졌다.
“크으으으!”
리안이 자세를 낮추며 대직도를 겨누자 돌진을 멈춘 워커가 교차하듯 검을 쭉 내밀었다.
“푸우우우.”
일 합만으로도 서로의 역량을 알 수 있었다.
‘엄청난 힘이다.’
키도가 주위를 둘러싼 경호대원들을 하나씩 노려보며 현란하게 창을 휘돌렸다.
“흥! 덤벼, 덤벼 보라고.”
시로네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키도, 리안. 그만해. 무기를 내려.”
“안 돼. 그럴 수 없어.”
리안이 거부하자 반쯤 창을 내렸던 키도가 황급히 전투 자세를 되찾았다.
“괜찮아. 싸우고 싶지 않아. 무기를 내려.”
시로네만큼이나 리안도 단호했다.
“싫어. 나는 너를 지킬 거다.”
시로네가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내려!”
리안의 불을 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나, 그럼에도 리안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끼여 버린 키도가 놀란 눈으로 좌우를 살피며 물었다.
“뭐, 뭐야? 어떻게 해? 빨리 결정해.”
시로네가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리안, 내 말을 듣기로 했잖아. 명령이야. 무기를 내려.”
“그렇다면 자리에서 일어서. 그럼 내릴게.”
“…….”
시로네 또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시로네, 너는 지금 너 스스로를 방어할 생각이 없어. 그리고 이들은 너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다. 나는 검 못 내려. 이곳을 나가면 그때 나를 벌해라.”
리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키도가 콧김을 내뿜으며 창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리안, 나는 원인이 없어.”
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 뿌리는 내가 아닌 카즈라의 왕자에게 있어. 그 왕자가 나를 대신해 죽었지. 이게 내 인생의 시작점이야.”
‘빌어먹을!’
리안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깨물었다.
“여기서 다 털어 버리지 못하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이성과 감정이 충돌하면서 대직도의 손잡이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
시로네를 등 뒤에 두고, 명백히 살의를 뿜어내는 검의 고수 앞에서 무기를 내리라는 것은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그래, 내릴 수 없겠지.’
왕을 지켜야 하는 건 워커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인의 범주를 뛰어넘은 고수들이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상대를 살피는 그때, 오르캄프가 지시를 내렸다.
“워커, 그만하면 됐네.”
충혈된 눈으로 리안을 노려보던 워커가 신호를 보내듯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내리는 거다.’
내전에 있는 자들의 반응 속도는 인간 화살이나 마찬가지였고, 한 번이라도 엇박자가 나면 그때는 대형 참사였다.
두 사람은 생애 최고의 집중력으로 서로를 관찰하며 팔을 내렸다.
툭 하고 2개의 검이 바닥을 때리는 순간 폭발할 것 같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후우우우.”
경호대원들이 대장을 따라 무기를 거두자 키도가 숨을 크게 내쉬며 허리를 폈다.
‘인간들하고 다니는 건 정말 피곤하군.’
짧은 대치였으나, 한바탕 전쟁이라도 치른 기분이었다.
재회의 장 (7)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엘리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 네가 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