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79
하지만 그녀에게도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있었으니, 바로 카니스였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도 라둠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을 터. 그녀에게 카니스는 생명의 은인을 넘어 삶 전부를 책임져 준 사람이었다.
“상관없어. 카니스를 위해서라면 세상 전부가 죽어도.”
네이드는 아린의 눈에 비친 허무와 일그러진 비소를 보고 심란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이런 눈빛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동안 이루키는 땅에 쓰러진 시이나를 등에 업었다.
과도한 폭격은 아마도 극단적인 방어기제. 게다가 기억까지 차단되어 있는 상태였으니 의식을 잃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루키는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과연 악인에게도 신이 존재하는 것인가? 몇 미터 간격을 두고 떨어진 빙하 사이에 쓰러져 있는 그가 보였다.
얼마나 악을 질렀는지 턱이 빠져 있었고 거품을 물고 있었다. 두 다리를 잃었으니 감옥 생활도 전과 다를 터였다.
퍼엉!
그 순간 숲에서 터진 굉음에 네이드와 이루키, 아린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굵직한 섬광이 수해의 천장을 긁으며 사선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루키에게 달려온 네이드가 말했다.
“뭐가 저렇게 커?”
“나무가 부러진 것을 보니 포톤 캐논이야. 전투 중에 깨달음이 있었나 본데?”
그리고 잠시 후, 전방의 숲이 우수수 흔들리더니 시로네가 내뱉어지듯 튀어나왔다.
땅바닥을 미끄러지며 중심을 낮춘 그의 몰골은 진창에서 구른 듯 엉망진창이었다.
아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으나, 이어서 카니스가 등장하자 이내 표정이 굳었다.
“카, 카니스.”
하비스트가 긴 팔로 좌우의 나무를 밀어낸 가운데 카니스가 발을 절며 걸어 나왔다.
몸 군데군데 흐르는 피가 전투의 치열함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루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호각인가?”
“말도 안 돼. 조금 전 포톤 캐논은 나조차도 못 본 엄청난 크기였어. 그런데 이길 수 없다고?”
시로네가 땅을 짚고 일어서며 대답했다.
“못 이기겠어.”
친구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시로네를 만난 이후로 처음 듣는 말이었다.
“뭐? 약한 소리 하지 마.”
“약한 소리가 아니야. 저 자식, 진짜로 강해.”
암흑 마법사와, 그림자로 이루어진 마도 생물체의 조합은 그만큼 완벽했다.
‘저렇게 강하면서, 어째서 사람들을 해치는 거지?’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에, 어떤 이유에서건 악을 선택했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악이 강하다는 건 인정할 수 없었다.
강함이란 실수가 아닌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지? 학생들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다는 거야?”
“힘에서 밀리니까 이번에는 입인가? 나약한 귀족들의 전형적인 패턴이군.”
사실이 아니기에 시로네는 발끈하지 않았다.
“대답해. 네가 하려는 것은 역사에 기록될 만큼 참혹한 짓이야. 적어도 이유는 들어야겠어.”
“역사? 그딴 걸 누가 신경 쓰지? 버림받은 자들은 그저 하루를 살기 위해 버티는 거야.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그게 세상이라고.”
“궤변일 뿐이야. 네가 어떤 삶을 살았든,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어. 누구나 견디기 힘든 고통 하나쯤은 끌어안고 사는 거야.”
“너, 라둠이라고 들어 봤냐?”
“…….”
시로네가 역사책을 통해 아는 것은 수도 바슈카의 슬럼가라는 사실뿐이었다.
자세한 기록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토르미아 왕국이 라둠에 대한 수많은 안 좋은 이야기들을 공식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숱한 소문과 음모론이 태어나는 구역이기도 했다.
“아린과 나는 기억이 생기기 전부터 라둠에서 살았어. 쓰레기장에 버려지는 생선 뼈다귀 하나를 얻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곳이지.”
아린의 눈이 슬픔에 잠겼다.
라둠의 삶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그곳이 어떤 공간인지 절대로 모른다.
문명사회의 무법 지대.
온 세상의 추악한 범죄자들이 모인 곳에서 인간의 온기 따위는 느낄 수도 없었다.
카니스와 아린은 그곳에 버려졌다.
언제부터 함께였는지, 어째서 두 사람이어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이 들 때부터 서로가 있었고 그저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쥐나 고양이, 들개조차 멸종한 라둠에서 또 하나 없는 것이 있다면 여자아이일 테지만, 아린은 라둠에서 무려 10년을 생존했다.
라둠의 유일한 여자아이.
그 슬픈 상징을 지켜 내기 위해 카니스가 한 일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늘 미친개처럼 짖었고, 음식물 찌꺼기를 얻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쓰레기 쟁탈전에서 승리한 카니스는 곰팡이가 핀 빵 한 쪽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됐다!’
아린이 3일째 굶고 있다.
또한 그녀가 3일을 굶은 대가로 카니스는 7일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내가 빵을 얻었다고!’
정신없이 골목길을 달린 카니스는 추격자를 따돌린 뒤에야 주저앉았다.
의식이 흐린 상태에서도 공복감은 현실이었다.
“배, 배고파…….”
그 순간 손에 든 빵이 눈에 들어오자 자신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졌다.
먹고 싶다.
‘그래, 내가 힘을 내야 아린도 살지. 이 정도는 먹어도 돼. 아린은 며칠 더 버틸 수 있을 거야.’
군상(3)
막상 그런 생각이 들자 괜찮은 계획 같았다.
이보다 더 합리적일 수 있을까? 일단 이것을 먹고, 힘을 얻어 다시 음식을 구한다.
‘그러면 되는 거야.’
카니스는 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것조차 기억하지 못한 듯 어느새 그는 빵을 입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말라붙었던 침이 홍수처럼 흘렀다.
“크윽!”
하지만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허기보다 무서운 건 마음이 꺾이는 것이었다.
‘버텨야 돼.’
카니스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주변을 살폈다. 돌이라도 씹어 위장에 넣을 생각이었다.
누군가 골목 어귀에 갈긴 배설물을 향해 그는 기어갔다.
어떤 생각이 들기도 전에, 손을 뻗어 입안에 억지로 욱여넣고 씹었다.
“우엑! 우엑!”
혀에서, 입에서, 위장에서, 몸 전체가 그것을 거부하는데도 그는 끝까지 삼켰다.
허튼 마음을 품어 버린 자신에 대한 벌이었다.
‘돌보다는 나아.’
돌보다는 배설물이 나았다.
위장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 카니스는 힘없는 걸음걸이로 은신처로 돌아왔다.
여전히 속이 역했지만 아린을 보자마자 밝은 표정으로 빵을 내밀었다.
“아린, 이거 봐! 내가 구했어.”
“어, 진짜? 어디서 난 거야?”
“요령을 알았거든. 앞으로는 더 많이 구할 수 있을 거야. 자, 얼른 먹어.”
아린의 눈빛이 슬픔에 잠겼다.
함께 음식을 구하러 나가고 싶지만 라둠에서 여자의 몸으로 밖에 나갔다가는 자신은 물론이고 카니스마저 위험하게 만들 터였다.
실제로 그녀는 카니스 이외의 누구하고도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대인 기피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지만, 그게 대수겠는가? 누군가의 고깃덩어리가 되느니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게 훨씬 나았다.
“카니스도 같이 먹자.”
“나는 됐어.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주워 먹었어. 아까는 커다란 지네가 있어서 영양 섭취 좀 했지. 너는 그런 거 못 먹으니까 이거라도 먹어야지.”
“나도 먹을 수 있어. 언제까지 아이 취급할 거야?”
카니스의 눈이 다정해졌다.
“나도 알아. 너는 용기 있는 아이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이 지옥 같은 라둠에서 내가 버틸 수 있는 건 적어도 너만큼은 사람답게 먹일 수 있기 때문이야. 네가 나처럼 된다면 미쳐 버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어서 먹어.”
자주 들었던 말이고, 그럴 때면 늘 아린은 못 이기는 척 빵을 깨물곤 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아린의 특별한 눈을 통해 전해지는 카니스의 기질이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카니스 너, 대체 뭘 먹은 거야?”
카니스는 아차 싶었다.
“어? 아하하! 미안. 사실 오기 전에 상한 것을 먹어서 속이 좀 안 좋아. 그래도 맛은…….”
짝 소리를 내며 카니스의 얼굴이 돌아갔다.
이렇게 아픈 따귀는 처음이었다.
“아, 아린…….”
“나쁜 자식.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바라는 게 이거라고 생각해? 너한테 그런 짓을 해 가면서까지, 내가 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린! 그런 게 아니야! 이건 나한테 내리는 벌이라고!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다 필요 없어! 이딴 거!”
아린은 빵을 집어 던졌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카니스의 마음속에서도 불이 치솟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내가 이걸 어떻게 구했……!”
아린의 입술이 그의 입을 막았다.
지척에서 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달콤한 입맞춤이 아니다. 인간 사이의 아름다운 감정 교환도 아니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죄가 되어 버린 두 짐승이 서로를 동정하는 행위였다.
카니스는 그제야 자신이 먹은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처음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생을 참아 온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흐윽! 흐으으윽!”
“다시는 그러지 마. 한 번만 더 그러면 나는 더 이상 네 곁에 있을 수 없어.”
“미안해, 아린. 떠나지 마. 너만이 내 가족이야. 내가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야.”
“살자, 카니스. 우리 반드시 살아남자.”
대답조차 못 하고 카니스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으나, 아린은 용서하지 않았다.
그날, 카니스가 바닥에 떨어진 빵 한 쪽을 전부 먹을 때까지.
회상에서 벗어난 카니스가 말했다.
“우리는 지옥에서 살았다. 하지만 스승님은 그런 우리를 구원해 주셨어. 먹을 걸 주셨고, 아린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셨고, 암흑 마법의 진수인 하비스트까지 주셨다.”
시로네 일행의 시선이 카니스의 배후에 있는 하비스트에게 향했다.
평소에는 수다스러운 마도 생물체였지만 이번만큼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알겠어.”
시로네가 말했다.
“네가 힘든 삶을 살았다는 건. 하지만 그렇다고 너와 무관한 사람들을 죽이는 게 정당화될 수는 없어.”
“착각하지 마. 나는 변호하는 게 아니라 너희에게 가르쳐 주려는 거다. 너희가 믿는 정의가 얼마나 얄팍한지, 너희가 사는 세계가 얼마나 가식적인지. 나와 아린을 구원해 준 것은 네가 말하는 그 잘난 정의가 아니야. 나는 내가 믿는 것을 행하는 것뿐이다.”
“무엇을 믿든 죄 없는 사람을 해치는 건 용납이 안 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돌아가.”
“킥! 끝까지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지금 상황을 말해 줄까? 스승님은 학교를 통째로 없애 버리실 거야. 거기에는 네 친구들도 포함되어 있지.”
잠시 땅을 보며 생각에 잠겼던 시로네가 시선을 들더니 손 위에 광자를 띄웠다.
동시에 하비스트가 넓적한 손바닥을 펼쳐 카니스의 앞을 막았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이번에는 반대편 팔로 카니스를 감쌌다.
“뭐 하는 거야, 하비? 겁먹을 필요 없어.”
“위험해. 기질이 이상하다.”
카니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숲에서 박빙의 승부를 펼쳤으나 그 이상의 무언가는 없을 터였다.
“흥, 어차피 우리들의 상대는…….”
그때, 시로네의 손바닥 위에 떠 있는 빛의 구체가 무서운 속도로 진동했다.
마치 화가 난 것처럼 흔들리는 모습에 하비스트의 덩치가 더욱 커졌다.
-카니스, 저건 못 막을 거야.
설마 실력을 숨긴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시로네의 부상 정도가 심했다.
‘어떻게 갑자기 이런 힘을…….’
여태까지의 전투에서 카니스와 하비스트의 분석은 대체로 옳았다. 유일하게 간과한 것은 시로네가 무한의 열쇠를 가진 언로커라는 점이었다.
“마지막 기회야. 정신 지배를 풀어. 아무도 다치지 않았을 때 끝내는 게 좋아.”
카니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웃기는 소리. 나는 대마법사의 제자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스승님의 뜻에 따를 거야.”
시로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비가역적이라는 생각까지 드는 단호함이었다.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끝까지 이런 식으로 나올 생각이라면…….”
포톤 캐논이 백광의 구체로 돌변했다.
“널 해칠 수밖에 없어.”
***
알페아스의 머리에 직접 빛을 쏘고 있는 사드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빌토르 아케인.’
천하의 악당이지만 그가 시전한 마법의 효율만큼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빛에 대한 방어력이 엄청나다.’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다.
대마법사라고 해도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지 않았는가. 그사이 마법은 몇 세대를 진화했고 암흑 계열은 쇠퇴했다.
하지만 지금 사드가 파훼하는 마법은 요즘 시대에도 먹힐 만큼 정교하고 복잡했다.
“으으으으!”
20분이 지나자 비로소 빛의 기운이 암흑의 장막을 뚫는 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사드는 최고의 정신력을 동원해 빛의 기운을 뇌로 밀어 넣었다.
알페아스의 머릿속에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오래전의 기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