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79
“리즈.”
정곡을 찔린 네이드가 인상을 썼으나, 리즈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네가 왜 그러는지 알아. 시로네, 이루키, 너. 알페아스 마법학교의 꼴통 삼총사. 친구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 너만 편하게 산다고 생각해? 아니면, 그들이 너무나 빛나 보여서 너도 빛나고 싶은 거야?”
네이드는 말이 없었다.
“정신 좀 차려, 이 바보야. 너는 너대로 최고가 된 거야. 굳이 시로네처럼 싸우지 않아도, 이루키처럼 전쟁을 좌지우지하지 않아도, 너는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거라고.”
“빛나지 않아도 상관없어.”
진심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그랬지. 우리 3명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어. 나는 절대로 빛나는 역할은 아니었지. 빛나는 건 시로네야. 이루키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왜 지금은 빛나려고 해? 시로네한테 맡겨. 이루키한테 맡기라고.”
“빛이라.”
네이드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졸업하고,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의 회장은 내가 되었지. 회원이라고는 이루키와 시로네, 둘뿐.”
즐거운 시절이었다.
“우리 3명이서 발표회를 한 적이 있거든. 초자연 심령에 대한…….”
“알아. 백 번도 넘게 들었어.”
네이드는 머쓱한 내색 없이 학창 시절을 떠올리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날 밤, 모두 잠든 시간에 우리 3명이서 중앙 공원에 누워서 별을 봤는데, 북극성 말이야.”
네이드가 폭소를 터뜨렸다.
“그때는 진짜 유치했지. 영원한 우정이 어쩌고 졸업이 어쩌고 그랬던 것 같은데……. 그래도 그 순간에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더라고.”
여운을 자르듯 입술을 손으로 비빈 네이드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그랬을까? 발표회를 성공적으로 끝내서? 내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여서?”
리즈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아니. 우리 3명이라서.”
당시의 전율을 상기한 네이드의 입꼬리가 떨렸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 우리 3명이 함께 있는 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지금 그런 친구가 힘들어하고 있어.”
원소 폭탄 프로젝트의 참여자로서, 이루키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리즈도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맡긴다면 이루키의 부담을 더 크게 지우는 거야. 왜 나냐고? 하고 싶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내가 해야 하는 이유는…….”
네이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루키가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야.”
리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녀석은 머리는 좋은데 바보라서, 모든 걸 혼자서 끌고 가려고 하지. 아무 말도 못 해. 도움조차 요청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알지. 그게 내 역할이니까. 이 상황에서 그 녀석의 부담을 덜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차라리 해 달라고 말이라도 했다면.
“그런데 외면하라고? 이루키가 부탁하지 않았으니까, 그 고통을 모른 척하라고? 죽어도 싫어. 리즈, 난 그렇게 할 수 없어. 너를 너무 사랑하지만, 너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어 줄 수 있지만…….”
네이드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나는 가야 해.”
리즈의 어깨가 허탈하게 내려갔다.
“하아.”
침대로 돌아가 힘없이 엉덩방아를 찧은 그녀가 머리를 넘기며 눈물을 삼켰다.
창문이 열리고 마부가 말했다.
“회장님, 본가에 도착했습니다.”
인근에 있는 대저택을 전부 사들여서 새로 공사를 했기에 본가에 도착하고서도 한참을 더 가야 했다.
마음을 진정시킨 리즈가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내밀었다.
“누구는 이번 일로 결혼까지 했다던데.”
네이드도 그제야 웃음기를 되찾았다.
“하하,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 너도 생존 대상자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누가 지금 그걸 말하는 거야?”
“사랑해, 리즈.”
옆구리 찔러서 절 받는 격이었으나, 막상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흥.”
본가의 메인 저택에 도착하자 네이드의 부모인 볼룸과 테리아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아들.”
항상 일그러진 얼굴로 네이드를 두렵게 했던 무서운 어머니는 없었다.
끝을 모르는 것 같던 투기와 시기도, 상식을 초월하는 재산 앞에서는 한낱 인간의 감정일 뿐이었다.
네이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네. 다녀왔어요.”
돈이 그녀를 바꿨든, 풍요로운 생활 속에서 본성을 되찾은 것이든,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볼룸이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일이 바쁘지?”
“네. 저는 바로 올라가 봐야 해요, 급한 업무가 있어서. 하지만 리즈는 며칠 동안 여기에서 지낼 거예요.”
이번 프로젝트의 생존 대상자에게는 기밀 엄수라는 조건이 붙었고, 리즈는 탁월한 연기자였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진즉 찾아뵀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여기 있는 동안 우리 좋은 데 많이 다녀요.”
“호호, 물론이지. 내가 최고급 식당을 예약해 놨단다. 오붓하게 둘이 가서 먹자꾸나.”
테리아가 리즈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다행이었다.
“그럼 저는 가 볼게요. 리즈, 잘 지내고 있어.”
10분 정도 대화를 나눈 네이드가 작별 인사를 하고 마차를 향해 돌아섰다.
“어머님, 잠깐만요.”
리즈가 황급히 네이드를 따라가 돌려세웠다.
“기다려. 코트 깃이 구겨졌잖아.”
핑계라는 건 알고 있지만, 네이드는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다.
“미안해.”
리즈는 울컥했으나, 이내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줘.”
“그래.”
코트를 탁탁 털어서 결을 없앤 그녀가, 두 손으로 깃을 강하게 붙잡으며 말했다.
“기왕 할 거면 확실하게 끝내. 최고로 멋있게 빛나란 말이야. 학창 시절 찌질이처럼 갈팡질팡하지 말고. 알았어?”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네이드가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게 해 줘서.
짧은 입맞춤을 나누고 마차로 걸어가는 네이드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내가 간다, 이루키.’
원소 폭탄의 탄도명은 럭키 보이였다.
***
거핀과 이카엘은 헥사의 능력으로 오지에 은신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왜 안 되는 거지?”
돗자리를 깔아 두고 대자로 누운 거핀이 중얼거리는 가운데, 이카엘이 과일을 채집해 왔다.
“아직도 고민하고 있어?”
사방에서 그녀의 권속인 3각, 2각, 1각 마라가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제가 들겠습니다!”
이카엘은 자신에게 내밀린 6개의 손을 빤히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신호의 아슈르, 증강增強의 레테, 전격의 라무스.
이카엘의 3대 수호신으로 불리는 자들이 소쿠리를 들겠다고 달려오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나는 참으로 운이 좋다.’
천사의 직속이라도 앙케 라의 권한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들은 이카엘을 선택했다.
“괜찮아요. 백경을 떠나니 할 일이 없군요.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겠죠.”
아슈르가 고개를 숙였다.
“이카엘 님이 존재하시는 것만으로 축복입니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어떤 확률로도 다시 만들 수 없으니까요.”
“어머, 아슈르도 참.”
이카엘이 입을 가리고 웃는 가운데, 거핀이 옆으로 누워 배를 벅벅 긁었다.
‘간사한 놈 같으니라고.’
거핀에 대한 질투가 조금은 깔린 발언이겠지만, 이 정도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증강의 레테가 두 손을 내밀었다.
“저에게 주십시오. 다시는 이카엘 님이 이런 험한 일을 하시지 않도록 1억 개로 늘리겠습니다.”
레테는 특정 사물의 수치나 개수를 늘릴 수 있다.
“괜찮아요. 어차피 거핀이 먹을 거니까요. 여보, 오늘 점심은 과일이에요.”
상체를 세운 거핀이 퀭한 눈으로 말했다.
“오늘 점심도 과일이지.”
“다른 거 줄까?”
이카엘의 성광체가 확장될 기미를 보이는 순간, 거핀이 사과 하나를 베어 물었다.
‘내 팔자야.’
그래도 위장은 시렸다.
“섭식의 즐거움을 모르는 건 이해해. 하지만 말이야, 이거 먹고 어디 힘쓰겠어?”
“잘만 쓰더구먼, 뭐.”
벌써 수많은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 거핀과 이카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문제는 다르다는 거야. 그것도 아예 달라.’
형태적인 부조화가 없다는 건 다행이지만, 탄생의 메커니즘부터 차이가 났다.
“그렇게 걱정돼? 후사라는 거 말이야. 물론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지만.”
모두가 신이 될 수 있다.
‘이카엘은 정신체다. 육체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신호를 이용해야 하는데.’
헥사로 율법을 뒤틀어 보았고, 이카엘도 많은 변화를 주었지만, 효과는 전무.
‘이카엘과 나의 접점은 마음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헥사로 합쳐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 그렇다고 간절히 원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검지 위에서 돌아가는 헥사를 멍하니 지켜보던 거핀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챙 하고 헥사가 깨졌다.
“마음?”
과일을 손질하던 이카엘이 고개를 돌렸다.
“여보, 왜 그래?”
“육체가 아니야.”
단지 서로의 마음이 이어져서 하나의 신호로 통합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자.”
무릎을 꿇고 멀뚱히 지켜보는 이카엘의 손목을 거핀이 붙잡고 끌어당겼다.
“뭐야, 갑자기?”
“괜찮아.”
못 이기는 척 따라오는 이카엘을 돌아보며 거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도 마음에 들어 할 테니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
아가페.
꽃밭에서 (1)
지옥의 군대를 기다리고 있는 루피스트에게 플루가 다가와 보고했다.
“현 시간부로 생존 대상자 286명의 망명 처리가 모두 끝났습니다.”
네이드처럼 토르미아 왕국에 남아 있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타국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또 다른 생존 대상자, 루피스트와 플루는 전장에 남기를 택했다.
원소 폭탄이 터지면 높은 확률로 휘말리겠지만,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는 건 질색이었다.
“그럼 가 볼까.”
성전이 합류한 토르미아 연합군이 학익진을 펼친 가운데 루피스트가 전방으로 나섰다.
“저도 끼워 주시죠.”
뒤를 돌아보자 단테가 다가오고 있었다.
루피스트의 기억에 치매가 오지 않았다면 분명 편제되지 않은 병력이었다.
“의외로군. 벙커에 있을 줄 알았는데.”
조롱의 의사는 없었다.
마족을 바슈카로 유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수많은 자들의 희생이지 정예 요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골방에 갇혀 있기가 질려서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바람이라도 쐬겠어요? 오히려 제가 묻고 싶군요. 협회장님과 비서실장님은 왜 여기에 있죠?”
단테가 아는 루피스트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감정에 휘둘리는 인물이 아니었다.
“물론 의지만으로 이 자리에 있는 건 아니지. 효율을 따졌다고 해야 할까?”
“효율?”
“어쨌든 나는 죽지 않을 테니까.”
“…….”
과도한 자신감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만, 그의 발언은 주변 지휘관들의 눈빛을 바꾸어 놓았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을 말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대장이라는 거겠지.’
측면에서 전령의 외침이 들렸다.
“적군 발견!”
전방을 돌아보자 지평선 쪽에서 피처럼 붉은 지옥의 군대가 넘실거렸다.
“우선 예기부터 꺾어야겠지.”
손바닥 위로 강철을 연성시킨 루피스트가 걸음을 옮기려는데, 단테가 나섰다.
“그 역할은 저에게 맡겨 주시죠.”
“네가?”
단테의 실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상대할 적은 흔한 마족이 아니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와 비교해 마족의 숫자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살아남은 마족이 정예이자 베테랑이라는 뜻.
“실패하면 너 하나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야. 군대의 사기가 짓밟힌다.”
단테가 루피스트의 곁을 지나가며 말했다.
“꽃밭의 최종 관리자가 저인 이유를 아십니까? 레드 라인 등급도 낮은데 말이죠.”
정보를 다루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지만…….
“왕국 최고의 수비수이기 때문입니다.”
마족들이 2킬로미터 거리까지 다가오자 대지가 고무판처럼 튀기 시작했다.
플루가 루피스트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