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103
00103 [열일곱 번째 역] 밀로아 =========================================================================
밀로아에는 놀러온 것이 아니다.
리건은 산더미처럼 밀려있는 영지 문제로 이튿날부터 눈코뜰새 없이 바빠졌다. 대개 일은 요헨과 클레아가 도맡아 해주었고, 헤젠이 오며가며 어느 정도 정리를 해주어 당장 급한 문제는 없다. 그럼에도 리건은 영주다. 영지를 떠나있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고, 실질적으로 영지 사업이 영지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었고, 영지 내에 벌어진 일들 중 그가 신경 써야 할 일이 있는지 정도는 살필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헤젠 씨가 어쩐지 고생하시는 것 같네요.’ 하는 잉그리드의 한 마디가 마치 ‘너는 왜 고생해서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처럼 괜히 찔려 뭐라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은 것도 이유 중 하나이긴 하다. 잉그리드는 알아주지도 않을 것이고, 원래 부려먹으려고 돈을 주고 고용하는 건데 찔릴 이유가 없다는 근본적 진실은 그렇다 치고. 처음에는 좀 분한 기분도 들었는데, 문득문득 마음먹고 책상 앞에 앉아있는 자신이 조금 희한하다는 생각도 들어 나쁘지는 않았다.
그가 영지 관련 문제로 경황이 없어진 지 사흘째 되던 날, 클레아는 잉그리드를 데리고 밀로아 시가지로 나갔다. 어제는 잉그리드가 여독 때문인지 많이 피곤해 해서 오늘 첫 나들이에 나선 것이다.
리건은 창밖으로 떠나는 클레아와 잉그리드의 마차에서 시선을 뗐다. 조금 두근거렸다.
잉그리드는 도시여자에 가깝다. 세련되고, 아름답고, 의상의 장식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타고난 감각이든 노력으로 쌓은 것이든 간에. 그녀는 늘 값비싸고 화려한 것들에 둘러싸여 자랐다. 밤 없는 엘뷔니에서 평생을 살다가 이제 처음 밀로아로 내려온 것이다. 엘뷔니를 떠나기 싫다고 했던 여자. 잉그리드의 취향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로아가 시골은 아니지만 엘뷔니에 비하면 낡은 건물이나 목조 건물이 많다. 건물들도 화려하고 크지 않고 아기자기하며 수수하다.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어쩌지. 요즘 잉그리드와 겉보기에는 그럭저럭 지내지만, 그게 아닌 거 같아서 불안은 매일매일 커졌다.
미친 생각이지만 잉그리드가 ‘난 이 좆같은 밀로아를 떠나서, 역시 세련되고 멀쩡한 엘뷔니 사람과 결혼하겠어요.’하고 이혼장을 팔팔 날리는 것까지 상상했다. 물론, 잉그리드는 절대로 좆같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만.
그나마 안심이 되는 것은 클레아의 허영이다. 워낙 제 어미의 성정이 사치스러우니 잉그리드를 데리고 좋은 데만 돌아다니면서 괜찮은 인상을 줄 것이다. 어미의 사치스러움에 처음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리건은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와이더스 와일더의 책에 흘깃 눈길을 주었다. 다시 읽어보려고 하는데 역시나 적성이 맞지 않아 초반부에 멈춰두었다. 재미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다. 책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리건이 시계를 보았다. 오전 열 시. 잉그리드는 이제 반나절은 지나야 돌아올 테니 지금 잠깐 술을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커튼을 치고, 잔에 손가락 마디만큼만 술을 따라 홀짝홀짝 넘겼다. 기분은 조금도 좋지 않았다. 막 시가를 무는데 문이 열리며 퀭한 헤젠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침침하게 뭐하십니까?”
환한 오전인데도 리건의 집무실만큼은 초저녁처럼 음침했다.
“그냥.”
“남은 지금 잠도 못자고 재검토다 뭐도 바빠 뒤지겠는데 각하는 아주 살 판 나셨어. 백주대낮부터 밤 분위기 내면서 술이나 마시고 있습니까.”
“적당히 쉬어가며 하라니까.”
“바빠요. 한 달 뒤에 열흘 정도 비우셔야 하는 거 일정 조정도 해야 하고, 내일 모레는 틴토 상단주랑 약속 있는 거 아시죠? 리건 님이 직접 만나본다 하셨으니까 파토내면 안됩니다. 이쪽 면이 안 서요.”
“내일 모레라고?”
“예, 그리고 이것들도 한 번 보시죠. 지난 달 분 철공소 거래내역입니다. 대금 지불 하기 전에 확인부터 하세요. 나중에 나한테 횡령했니 뭐니 하는 소리 하지 마시고요. 물가가 좀 올랐습니다.”
“둬.”
“지금 바로 확인해주시면 안됩니까? 나가봐야 하는데요.”
리건은 아주 짜증이 났다.
일을 한 번 직접 살펴보겠다 말하니, 헤젠은 아주 신이 나서 그에게 떠넘기기 시작했다. 사업상 만남 일정까지 묻지도 않고 다 짜놓는 바람에 더 정신이 없다. 사업상의 만남은 보통 엘뷔니에 있을 때부터 필요에 따라 결정된 것이고, 리건이 밀로아로 내려오는 일이 늦어지는 바람에 시간이 촉박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빡빡해도 너무 빡빡하다. 이제야 일이라는 걸 좀 진지하게 해보려는데, 쪼아대는 부하직원 때문에 이렇게 울컥울컥 짜증이 난다.
헤젠의 잔소리에 불도 붙이지 않은 시가를 씹으며 눈알 돌아가게 많은 숫자들을 살펴야 했다. 나름대로 꼼꼼히 보려 했다. 철공소와의 교류 중 발생하는 비용과 밀로아 동부에서 한창 철도역 착공에 동원된 이들에게 드는 돈 중 일부가 잉그리드의 지참금이라는 사실을 상기한 탓이다. 새삼스럽게 잉그리드와 결혼한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었는지 상기하게 되었다. 헤젠이 지폐 한 장이라도 날림으로 횡령한다면 그 배로 토해내게 해야겠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혼자 피식거렸다.
헤젠은 실성이라도 한 것 같은 리건을 게슴츠레 뜬 눈으로 흘기다가 리건이 서명해 돌려주는 서류철을 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리건은 이제 좀 마음 편히 술과 시가를 하려 했다. 편하지 않지만, 뭐, 최소한 나중에 잉그리드와 클레아가 돌아왔을 때 병신 새끼처럼 손발을 달달거리지 않을 정도로는 취해 있는 게 좋다. 멀쩡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
그런데 것도 쉽지가 않았다. 짜증나는 게 두 마리 더.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홱 인상을 쓰는 순간 발칵 문이 열리며 목에 수건을 걸치고 웃통을 까고 있는 요헨이 모습을 드러냈다. 요헨은 늘 부지런해서 이 시간 즈음이면 훈련 후의 땀에 절어 있곤 했다. 8월 한여름이니, 날이 더워서 옷을 제대로 챙겨 입지 않은 모양이다.
“여, 형님, 박쥐처럼 뭐해.”
리건이 손을 휘휘 저으며 시가에 불을 붙이려는 찰나였다. ‘들어와. 내가 누구 좀 데려왔어, 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혼자가 아닌가? 한쪽 눈썹을 스윽 올려 보니 까만 머리카락의 갈색 눈을 지닌 여자가 눈치를 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제 동생이 미쳐서 그에게 여자를 갖다 바치려나 하는 것이었다. 요헨이 그럴 놈이 아니긴 했지만 여자를 데려올 이유가 그런 것 말고는 전혀 생각이 안 나서.
“뭐야.”
리건은 근래 잉그리드와 잠자리가 없어서 짜증이 났다. 다른 여자 말고, 잉그리드랑 붙어먹고 싶다. 멀쩡한 부인 두고 수절하면서 다른 계집애한테 힘 쓸 생각은 전혀 없다. 자존심이 상하고 짜증나는 짓거리다. 지난 번 정부니 뭐니 하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좀 받은 후로는 더더욱.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계집질은 너나하고 데리고 꺼져.’라며 말을 하지 않은 여자의 얼굴이 눈에 익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 안녕하세요, 영주님. 아스트리드 베르드예요.”
아스트리드?
“아아.”
요헨이 좋다고 붙어먹어 클레아의 속을 썩이는 여자였다. 상단을 운영하는 아비를 둔 여자. 언뜻 두어 번 본 기억이 있다. 부유한 편이기는 하지만 결국 평민이다. 리건은 무심히 무시하려다 그냥 대강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래, 얘기는 들었는데, 네가 요헨의 약혼녀였던가.”
“그건 아니고……”
아스트리드가 양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라는 말이 사실 이상한 건 아니었다. 저 두 명이 한 약혼이지 클레아가 버티고 서 있는 한 결혼 문턱까진 가지도 못할 터였다. 요헨이 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긴 무슨, 약혼이지. 그나저나 형, 형수는 어디 있어? 나갔다는데 언제 오는 지 알아?”
“알 것 같냐?”
“모를 거 같긴 한데. 언질 안 줬어?”
왜 저 새끼가 잉그리드를 찾나. 리건은 요헨과, 요헨의 가슴팍에 겨우 오는 쪼그만 여자를 번갈아 보다가 표정을 구겼다.
“잉그리드한테 물밑작업 할 생각 하지 마.”
리건의 말에 아스트리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요헨은 의표를 찔렸으나 외려 담담히 대꾸했다.
“뭐 어때? 형수가 아스트리드 만나보고 싶다고도 했고, 어차피 나중에 한 가족 될 텐데.”
저 새끼도 참 징하다. 클레아의 성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다른 건 참 올바르게 시키는대로 하고 자랐으면서 아스트리드인지 하는 저 여자는 몇 년째 포기를 않는다. 딱 보니 잉그리드에게 잘보여서 어떻게든 제 편을 늘일 생각인 것 같은데 리건은 아주 불만족스러웠다.
다른 때도 아니고 요즘 잉그리드가 몸이든 정신이든 편해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어디 아프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이 걱정뿐인데 괜히 잉그리드를 끌어들여 클레아와 한 판 하게 하려 한다면 리건은 당장 나서서 저 아스트리드라는 계집부터 치워버릴 터였다.
“개소리는 그쯤 하지. 빈 말인 거 모르나? 어디 근본 없는 걸 데려와서 지금 내 부인한테 생떼를 놓으려고 해?”
“그렇게 말하지 말랬지. 아스트리드한테 함부로 말하면 형이라도 안 참아.”
“까불어라.”
아스트리드라는 여자는 리건의 사나운 말에 입술을 꾹 다물고 치맛자락만 쥐락펴락 하고 있었다. 리건은 제 언사의 과함에 조금의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요헨의 기세를 보니 포기를 않을 표정이었다. 짜증이 난다. 치이익, 시가에 성냥불을 붙이고 한 모금 마셨다.
“형처럼 인간성 쓰레기 같은 사람한테 뭘 바라겠어, 그래도 형수가 응원해준다고 했거든?”
생각해보니 잉그리드가 예전에 요헨이 파블리아 저택에 갑자기 방문했을 때, 그런 말을 했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얼굴로 웃으면서 ‘우리 응원해줘요.’하고, 세상에서 제일 착하게 말을 했지. 그 때 헥트르 에이버리 새끼가 생각이 나서 기분을 크게 잡쳤던 것이 기억이 난다.
‘아……, 씨발.’
괜히 속에 또 뭔가 걸린다.
요즘 잉그리드 때문에 가뜩이나 속이 편치가 않은데, 요헨이 제 약혼 문제로 잉그리드를 들쑤시면 좋은 꼴 볼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잉그리드가 그 날 응원하자는 말을 한 건 99퍼센트 빈 말 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잉그리드는 1퍼센트도 안심할 수 없는 여자다.
만일 요헨이 살살 꼬득여 잉그리드가 요헨과 아스트리드의 관계에 대해 자신에게 이야기하게 되면, 자신은 십중팔구 ‘그딴 거 신경 꺼.’하는 식의 대꾸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또 별 것도 아닌 일로 서로 기분이 더러워질 것이다. 가뜩이나……. 가뜩이나 힘든데.
어차피 요헨이 저따위로 나오면 언젠가 잉그리드가 저 계집을 만나게 될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것만큼은 리건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리건은 길게 연기를 내쉬며 욕지거리를 삼키고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문 닫고, 거기 여자 이리 와봐.”
리건의 말에 아스트리드가 흠칫 놀란 것처럼 움찔하더니 조심스레 집무실 문을 닫았다. 리건은 주춤주춤 다가오는 여자의 앞에 훌쩍 다가가 섰다. 잉그리드보다는 노란 빛이 도는 피부다, 잉그리드의 백금발보다 훨씬 별로인 머릿결이다, 잉그리드의 눈보다 별로 안 예쁜 갈색 눈이다, 잉그리드의…… 미친, 지금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리건이 샅샅이 뜯어보는 시선이 불편한 것처럼 아스트리드가 흘끔흘끔 요헨을 돌아보았다. 리건이 툭 뱉어 물었다.
“내가 밀어줄까?”
“예?”
“형?”
갑작스러운 말에 요헨이 스스로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요헨에게 있어 리건은 본인 일 말고는 그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는 인간말종이었다. 그래서 한 번도 그에게 아스트리드와의 관계에 도움을 받겠다 생각한 적이 없다. 오히려 무슨 걱정을 했냐면, 여자라면 잡식성인 제 형이 혹시라도 아스트리드에게 흑심을 품을까봐 그동안 숨기기도 했었다.
“무슨 속셈이야?”
“왜, 싫나?”
“아니 형이 뭘 도와줘? 우릴?”
리건은 손가락 마디만큼 따랐던 술이 금세 바닥이 났다는 데에 아쉬움을 삭이며 느른히 미소를 그렸다.
“대신에, 아스트리드.”
“……예, 예.”
아스트리드는 아주 당황한 기색이었다. 근본 없는 년이니 뭐니 한 게 방금 전인데 갑자기 이렇게 다정하게 말하니 혼란스럽다. 밀로아의 영주인 리건의 성미가 변덕스럽고 불같은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요헨으로부터도 까탈스럽다는 말을 익히 들어오긴 했지만 막상 당하니 농담인지 아닌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내 부인이랑 만나게 되면, 내가 아주 열심히 너랑 요헨 새끼를 응원했다고 말 해.”
요헨은 멍청하게 제 형을 바라보았다. 그제 저녁, 클레아가 ‘리건, 이상한 약 먹었더라.’ 하고 심드렁히 말하는 것을 듣긴 했다. 원래 마약에 절어 사는 리건이 새삼스레 더 할 약이 있나하며 한심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정말로 제 형이 이상했다. 정말, 내 형이 잉그리드 양을 좋아하나? 그런 생각에 미치자 그도 모르게 히죽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