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150
00150 [스무 번째 역] 자장가 =========================================================================
리건은 올 초에 스스로 심한 중독자임을 밝히고 재활치료소로 들어갔고, 그 후로 소식이 없었다. 잉그리드가 처음 파르네세가와 여론전쟁을 시작했을 당시 리건의 행보를 주시했던 이들도 소식 없는 그에게 시들해진 상태였다.
리건이 치료를 끝내고 나왔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다. 국왕은 물론이거니와 왕비, 1왕제 레이먼드, 2왕녀 베니아, 3왕자 윈스테드와 그 왕자비가 전부 모였다. ‘아, 낯 뜨거워서 일 좀 가라앉으면 돌아오렵니다.’하고 유유자적 여행을 떠난 4왕자와 5왕자만 자리에 없었다.
1왕자 레이먼드가 가장 놀랐다. 왕실의 가족들은 리건이 그토록 심각한 중독자였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한 채 그를 대해왔다. 술과 시가를 가까이 하고, 가끔 약을 한다는 정도만 알았을 뿐이었다. 때문에 리건이 늘 어딘지 곤두선 채 능청스럽게 굴고, 가끔 사람 속을 긁어대며 신경질을 드러내는 걸 그의 성정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리건은 아주, 뭐랄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비 전하, 왕자님과 왕녀님들도.”
훨씬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예전보다 살이 빠져 더 인상도 뚜렷해져 있었다. 늘 찌푸려져 있던 미간도 풀려 있다. 거의 항상 거뭇하던 눈 밑도 색이 비교적 밝았다. 항시 약간의 핏발이 서, 탁해보였던 벽안은 국왕의 적자들과 다를 바 없이 맑았다. 화려하지 않게 차려입은 자주색의 예복까지.
극심한 마약 문제가 있어 중독치료를 하러 갔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멀쩡해보였다.
“……좋아 보이는군.”
1왕자 레이먼드가 슬며시 국왕과 왕비 마젤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근래 왕실 내에서도 리건 문제로 냉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리건이 불시에 들이닥친 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웠다.
국왕은 그 순간 어쩔 수 없이 부성에 휩쓸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국왕이 보아온 리건은 거의 대부분이 예민하고 불안한 모습이었다. 2왕자인 엘디스가 죽기 전에도 리건은 왕궁에서 살았지만, 리건에게 각별히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은 2왕자 엘디스가 죽은 후였다. 리건은 늘 왕실의 일원들에게 깍듯이 했지만 묘한 거리감과 경계심어린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늘 자신을 숨기고 감추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느껴졌던 건 착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국왕은 리건의 모친인 클레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으므로, 2왕자 엘디스가 죽은 후 리건이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하는 것이 가엾어 더 공개적으로 그를 포용해주었다. 그 탓에 리건이 오만방자해졌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떠돌았지만 그건 소문이고, 실제로 본 적이 없으므로 그냥 넘겼다.
그런데 돌아온 리건은 무언가 달랐다. 자연스러운 미소, 주눅들지 않은 눈빛, 차분함. 비로소 지난 리건이 심신이 병든 채였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변화였다. 국왕은 리건과 눈을 마주치고는 퍼뜩 물었다.
“그래,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는데, 언제 돌아온 게냐.”
“지난주 초에 어느정도 치료를 마치고 나와서 밀로아에 들렀다가 이제야 올라왔습니다.”
“기별도 없이.”
“파르네세쪽에서 제가 엘뷔니에 돌아왔다는 걸 알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왕비 마젤리가 입술 끝을 당겨 비웃었다.
“흐음, 꽤나…… 고생하셨겠군. 에스펜서 공.”
“여전히 제가 달갑지 않으신 얼굴입니다. 왕비 전하께서는.”
직설적인 물음에 왕실의 일원들은 일동 경직했다. 리건은 보통 웃어 넘기거나 모른 체 능청을 떨곤 했다. 저렇게 대놓고 말한 적이 없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1왕자 레이먼드가 나서려는 찰나였다.
리건이 말했다.
“왕비 전하와 관계나 좀 개선해볼까 하고 찾아뵈었습니다. 선물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오늘 오후쯤 도착할 겁니다.”
“필요 없는 수고를 하셨군. 잉그리드는 그대가 돌아온 걸 알고 있나?”
잉그리드의 이름에 리건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아직 알리지 못했습니다. 잉가를 더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 제 선에서 정리해야 할 것들부터 해결하려고요.”
“그대가?”
“저 때문에 요 몇 달 왕비 전하께서도, 국왕 폐하께서도, 다른 왕자님과 왕녀님도 큰 고생을 하셨다 들었습니다.”
리건의 무딘 목소리에 왕실의 일원들은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 파르네세가의 싸움이 왕실내의 싸움까지 번졌으니, 고생을 않았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리건은 지난 반 년 중 첫 석 달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을만큼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잉그리드와 죽은 자식 말고는 무언가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고문이었다. 가장 괴로운 시간을 겨우 숨만 붙어 넘긴 후,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진 나머지 석 달은 여러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살아왔던 병신 같았던 행적을 되짚고, 자신의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이들의 이유를 떠올리고, 그럼에도 처음 결혼했을 때의 약속을 지켜주는 잉그리드. 마지막 귀결은 늘 잉그리드였다.
그들이 아이를 잃었을 때조차도 제 아픔에 허덕이며, 극단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잉그리드를 위로해주기는커녕 그녀의 위로를 받은 후에야 안도했다. 제 아픔보다는, 말없이 7개월을 불안을 억누르며 품어왔을 잉그리드가 더 아팠을 텐데 그러지조차 못했다.
그 후에도 홀로 견뎌내는 잉그리드를 생각하면서 그는 잉그리드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했다. 가족들을 사랑하는 잉그리드가 그 가족들과 대립하는 것을 잉그리드가 원했을 리가 없었다. 작년의 어느 날, 에드원의 앞에서 그를 감싸주었던 때와는 아마 조금 다를 것이다.
“그동안 제가 많이 모자라게 굴어 이런 일이 벌어진 데에 사죄말씀 올리고, 왕비 전하께서 부디.”
“…….”
“저와 제 어머니를 용서해주셨으면 합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왕비 마젤리의 입술이 서서히 다물렸다.
마젤리는 늘 꼴 뵈기 싫었던 저 붉은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클레아를 생각했다.
클레아 르제나는 아주 당찬 계집이었다. 정숙함 따위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여성. 마젤리는 리건을 볼 때마다 아주 당당하게 ‘국왕 폐하와 뜨거운 연애를 했다.’고 말하고 떠들어 다니는 클레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클레아도 리건처럼 아주 선명한 붉은 머리칼을 가진, 정열적인 여자다. 그런데다 리건의 성격마저 클레아처럼 경우가 없다는 소문까지 도니 도저히 사심 없이 대하려야 그럴 수가 없었다. 제 옹졸하게 질투로 흔들거리는 마음을 마주볼 때마다 더 화가 나서 리건을 대놓고 싫어했다.
“저에 대한 미움이 크다는 건 압니다. 원하신다면 다시는 왕비 전하의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엘뷔니로 돌아오지 말라 하신다면 그냥 밀로아에만 머물겠습니다. 그러니 파르네세가의 역성을 드는 건 그만둬 주십시오. ……잉그리드는 저 같은 모자란 새끼와 결혼한 죄밖에 없습니다.”
온전히 제게 향한 눈빛 때문에 마젤리는 묘하게 찡그려지려는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애썼다. 리건 에스펜서가 저럴 놈이 아니다. 저럴 놈이 아닌데? 이때까지 리건은 마젤리가 그를 싫어하는 티를 내도 ‘네가 싫어해봤자 나는 신경도 안 쓴다.’하는 오만한 태도로 더욱 그녀를 불쾌하게 했다.
늘 오만방자하던 새끼가 저렇게 왕실 가족들 앞에서 대놓고 화해를 청하니, 거절하면 그녀가 더 옹졸해보일 것이었다. 국왕이 은근슬쩍 왕비 마젤리의 손을 잡았다. ‘나도 많이…… 미안해하고 있었소.’ 그렇게 중얼거리며 비어가는 정수리를 슬며시 만지작댄다. 보름 간 제 눈치를 보느라 접근도 못하던 일생의 남편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듣는 사과였다.
국왕이 클레아와 외도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것이었으나, 왕비 마젤리는 자존심 때문에 그에 대해 먼저 입술을 떼지 않았고 국왕도 먼저 자신의 외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던 탓이다. 보름 쯤 전의 큰 다툼이 그들이 국왕의 외도를 두고 언성을 높였던 24년만의 첫 다툼이었다.
국왕은 조용히, 다시 한 번 사과했다.
“리건을 가지게 된 건 후회하지 않지만, 늘…… 그대에게는 미안했어.”
왕비 마젤리는 붉어지는 눈가를 감추기 위해 일어났다.
“마지, 어디, 어디가시오.”
“따라오지 마세요.”
‘제가 가 볼게요.’ 다소곳이 앉아 리건을 응시하던 2왕녀 베니아가 왕비 마젤리를 위로하기 위해 따라 일어섰다. 이사벨과는 다른 아름다운 금발의 그녀는 나가기 전, 어느 새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은 철없던 이복동생을 향해 축복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리건, 이사벨이 너를 많이 응원하고 있단다. 철이 든 너를 보면 자랑스러워 하겠어.”
리건은 작게 입술을 벌렸다.
세상 사람들이 다 자신을 저주하고 있다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잉그리드가 거절한 혼담에 스스로 걸음을 향한 이사벨에게 고마움을 느낀 적도 없었다. 하지만 죽을 것 같은 절망의 미로를 헤쳐나와, 지금은 타향의 누님이 콧등이 찡해질만큼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콧잔등을 매만지며 엷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