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157
00157 [스무 번째 역] 자장가 =========================================================================
다리는 멋대로 움직인다. 달려갔다. 매일 같이 잉그리드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잉그리드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구기듯 안아 더듬었다. 이게 꿈이 아닌지, 정말로 돌아온 건지. 뒷머리를 움켜 당겼다. 잉그리드의 웃음소리가 턱 아래에서 울렸다. 그 웃음소리에 그는 눈물이 났다.
“이리, 이리 와, 이리 와.”
이미 제 품에 있는 여자를 어떻게든 더 제게 끌어당기기 위해 꽉 힘주었다. 잉그리드의 팔이 그를 마주 안아 주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녀를 온전히 느끼는 것 같았다.
“살 빠졌어.”
잉그리드가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리건은 자꾸만 울음으로 떨리려는 제 가슴에 잉그리드를 더 꽉 가두었다. 잉그리드가 어깨 위로 떨어지는 눈물에 아이 달래듯 속삭였다.
“엄마아빠가 봐줬어요.”
잉그리드는 알고 있었다. 파르네세 공작부인이 끝까지 막으려 했다면 그녀는 공작저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잉그리드는 제 가족의 과도한 보살핌을 엘뷔니 법관에게 고발해야 했을 것이고, 정말로 이제까지와는 다른 더 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파르네세 공작부인은 그녀를 막지 않았고, 벤디트는 그녀를 배웅해주었다. 지금으로써는 그 정도면 충분한 일이었다.
리건은 잉그리드의 뺨에 제 얼굴을 문지르며 계속 뇌까렸다.
“고마워, 고마워, 잉가. 나, 나, 진짜 이제 술도 안 마시고, 약도, 약도 이제 안해. 그래도 잘 버티고 있어, 나…….”
희미하게 웃은 잉그리드가 말했다.
“응, 믿어요. 찬장이 다 비었더라, 고생했어요. 힘들었을 텐데 당신 혼자 둬서 미안해요.”
지난 반년 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는 전쟁을 벌였던 여자가 그의 싸움을 돕지 못해 미안하다 말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자신은 그녀를 돕지 못했지만, 그녀는 늘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네가 있어서’라는 말만으로는 지금 그의 기분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었다.
“사랑해, 잉그리드, 진짜, 씨발,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어떻게 더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정말로 사랑해. 아니야, 씨발 아니야, 진짜……. 아니.”
말더듬이 병신이 된 거 같다. 자신이 뭐라 떠들어대는지도 모르겠다. 리건은 결국 변명을 포기하고 잉그리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잉그리드의 머리칼이 뺨을 스친다. 코끝에 그녀의 향기가 어렸다. 자꾸만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아래로 힘주어 뜬 눈이 뜨거웠다. 떨어지던 그의 시선이 잉그리드의 꺼진 배에 닿았다.
다독이듯 그의 뒷목을 쓰는 잉그리드의 손길에 결국 왈칵 눈물이 터졌다.
“……그 때.”
재활치료소에서 첫 몇 주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해 하는 그를 뜯어 말리기 위해 항시 한 사람이 그의 방을 지켰다. 그 차갑고 잔혹했던 겨울, 작별 없이 떠난 아이, 그를 포기할 것 같았던 잉그리드, 그 모든 것이 그를 죽고 싶게 만들었다. 매일 그 날의 자신이 얼마나 병신 같았는지 상기하며 울었다. 그래도 잉그리드가 그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가 그를 살아 버티게 해주었다.
리건의 달달 떨리는 손이 잉그리드의 배로 미끄러졌다. 매일 밤, 조금씩 더 커다랗게 부풀었더라. 그것이 신기하기도 해서 자다 깬 잉그리드의 아랫배를 어루만지는 것은 어느덧 매일 밤 그의 일상이 되었다. 그것이 벌써 7개월 전이었다. 리건의 손이 완전히 제 배에 닿자 잉그리드의 몸이 조금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 때, 내가……”
“……”
“내가 너무 병신 같아서, 내가 너를.”
더 힘들게 했다. 그 사실이 가시처럼 박혀 말을 멈추었다. 목이 메었다. 자신 때문에 아이가 죽었다며 우는 여자에게, 저 혼자만 괴로운 것처럼 겁먹고 매달렸다. 제 얼굴을 보기 힘들다는 여자에게, 저 혼자 살자고 매달려 떠나지 말라 빌었다. 그 병신 같은 몸뚱이를 하고도 ‘아이는 또 가지면 된다.’는 개소리나 떠들었다. 자신 때문에 죽은 아이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밀어 치우고서.
정신이 들어서야 제가 얼마나 끔찍한 인간이었나 했다.
“나, 그 아이도 정말 사랑했어. 잉그리드, 네가 낳은 아이라면, 어딘가 잘못된 아이였더라도.”
아이에게는 이름이 있었다.
“내가 평생을 다 바쳐서라도, 사랑…… 사랑했을.”
리건에게 있어 아이의 이름은 구원이었다. 지금 이 순간은 띄엄띄엄 이어지는 목소리와, 부드럽게 그의 뒷목에 닿는 잉그리드의 손길이 전부였다. 잉그리드는 한참을 조용히 그를 어루만지다가 말했다.
“알아요.”
“아니,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나는.”
잉그리드는 엷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었다.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해 떨리는 손으로 하나 하나의 건반을 눌러 기어코 완주해내던 남자를, 잉그리드는 매일을 지켜보았다. 가만 듣고만 있어도 코끝이 찡한 감동을 주었다.
잉그리드가 ‘뭐 하고 왔어요?’ 모른 체 물으면 ‘그냥.’ 하고 어물쩡 넘겨버리는 이 남자가 사랑스럽다 생각했었다. 매일 밤 어루만져주던 손길, 매일 낮 울리던 자장가는 자존심 센 리건이 할 수 있었던 그 나름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잉그리드는 묻어두었던 아픔을 꺼냈다. 그래서 가슴이 다시 헤집어졌지만, 자신보다 더 아파서 결국 죽어야 했던 아이보다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보랏빛 눈동자로 금세 그득이 눈물이 차올랐다. 그가 슬프고, 자신이 슬퍼서 함께 슬퍼해주지 못했다.
어제 만난 이들처럼 어색하지 않은 그들은, 그들의 일부는 여전히 헤어지던 그 날에 정체되어 있다.
잉그리드가 천천히 리건의 어깨를 쥐고 밀어냈다. 리건은 어깨를 얕게 오르내리며 쪽팔리게 눈물범벅이 된 뺨을 쓸었다. 잉그리드가 그의 뺨을 매만지며 웃었다.
“피아노를 쳐줘요.”
“…….”
“리건, 피아노를 쳐줘요.”
“지금?”
잉그리드의 요청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리건이 그도 모르게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잉그리드의 이어진 말에, 겨우 멎었던 뜨거운 것이 와르르 무너지듯 턱 아래로 떨어졌다.
“리건, 자장가 잘 치잖아요.”
“…….”
“많이 늦었지만, 우리 아이에게 들려줘요. 리건, 연습 많이 해서 잘하잖아요. 응?”
리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의 턱 아래로 떨어지는 눈물을 잉그리드가 거꾸로 쓸어 올리며 울었다. 잉그리드의 뺨을 타고 도르르 굴러 떨어진 눈물은 그의 손등에 떨어졌다. 지난 7개월 간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았던 묵어버린 아픔이 떨어졌다.
제 각각의 사정을 이겨내기 위해 깊은 곳에 돌을 쌓아 외면했던 지난 시간이 가슴을 무너뜨렸다.
리건이 천천히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떨림이 멎지 않았다. 그의 젖은 손등을 바라보던 잉그리드가 손을 뻗어 살짝 그의 손을 덮어 주었다. 혹시라도 아직 약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덜컥 겁이나 변명을 하려는데 잉그리드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다정히 말했다.
“점점, 더 나아질 거예요.”
리건은 양 손을 하얗고 까만 건반 위에 올렸다. 힘주어 눌렀다.
딩- 떨리는 손만큼이나 불안정한 음이 울렸다. 하지만 매일 한 곡만 쳤다. 스토기아 경과 헤젠의 앞에서 그렇게 망신을 당한 후, 언젠가 태어날 아이에게는 비웃음당하지 않아야지 하고 유치하게 하나만 연주했다. 그의 손은 조금씩 손가락에 익은 기억을 따라 움직였다.
조용하고 잔잔한 선율이 연주실의 침묵을 밀어낸다. 빠르지 않고 느린 음악 소리. 건반 하나를 누를 때마다, 눈물도 함께 떨어졌다. 잠든 아이를 피해 까치발을 하고 걷는 소리, 깨지 않게 손끝으로 뺨을 어루만지는 소리, 엉금엉금 기는 아기를 부드러이 감싸는 소리. 그들이 하지 못한 모든 소리였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할 수 있었다.
목소리 한번 듣지 못한 누군가를 이렇게나 그리워할 수 있었다.
눈물은 흐르라 두었다. 준비되지 않은 어린 부모를 찾아와 힘겹게 버티다 간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이 그뿐이었다.
“좋다.”
연주가 끝나자 잉그리드가 배를 쓸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다음번에는 더 잘할 수 있겠죠?”
“……더 잘 할게, 내가.”
“나도요. 다음번 아가에게는 우리 둘 다 조금 더 좋은 엄마아빠가 됐으면 좋겠어.”
아버지의 손이 건반을 떠난다.
영원의 요람에 잠든 아이를 위한 자장가도 함께 끝난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날까지.
============================ 작품 후기 ============================
[안내방송]
안녕하세요, 완결 장난 충분히 쳤으니 삭제.
길고 길었던 자장가 역은 이번 편으로 완벽하게 지나보냈습니다.
본편보다 본 기장의 안내방송을 더 찾는 분이 계시던데 말이야, 응? 좋습니까, 응?
바로 다음 역 홍보 나갑니다.
다음 역은 ‘인정’, ‘인정’ 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