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156
00156 [스무 번째 역] 자장가 =========================================================================
리건은 마차에 앉아 창밖의 풍경만 바라보았다. 갑갑한 속이 풀리지 않아 파블리아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저 엘뷔니의 외곽만 뱅뱅 도는 중이었다. 엘뷔니의 전경이 눈동자를 스친다.
그러는 동안 해가 저물었다. 간간이 호흡이 가빠졌다. 닳도록 만져댄 장미손수건을 쥐었다. 주먹째로 손목까지 떨려서 마차의 푹신한 소파를 꾹 눌렀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자꾸만 두근거리는 가슴이 두려움 때문인지, 아직 남은 후유증인지는 잘 모르겠다.
지난 반년 간 그는 강제적으로 인내라는 것을 배웠다. 자신이 스스로를 자제할 힘을 잃게 되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 스스로를 통제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여 견뎌내는 방법을 배웠지만 그보다 단단하고, 그보다 강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첫 날의 실패, 둘째 날의 외면, 셋째 날의 무시. 자신이 파르네세 일가를 모욕해온 것 그대로 돌려받는다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들이 잉그리드를 쥐고 있었다. 매일 찾아가면 한 번쯤은 잉그리드를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이제 슬슬, 정말로 파르네세 공작부처의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발끝부터 그를 갉아갔다.
만일 두 번째로 찾아갔던 날, 벤디트 파르네세가 말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제 성질머리를 이기지 못하고 또 다시 횡포를 부렸을 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각하께서 예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인상 깊었다는 건 솔직히 인정하겠습니다. 예전에 각하께 보였던 무례도 이 자리에서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중독 문제는 평생의 문제라고 하더군요. 각하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느닷없이 나타나 각하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주장하신다 해도 이쪽이 입장을 고수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또, 그동안 파르네세가에 각하께서 보이셨던 태도는 단순히 각하 개인의 술이나 약물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전이라면 ‘씨발, 네가 뭔데 내게 선생질이야?’하며 즉각 반발했을 터지만 지금은 리건도 자신이 그들의 미움을 받을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했다. 애초부터 잉그리드를 그에게 보낸 것을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니까.
‘……벤디트 경, 하지만 나는 정말로 앞으로는……’
‘각오보다는 각오를 유지하는 게 어렵다는 것이 정설이라는 걸 각하께서도 지금 정도의 판단능력으로도 이해하실 겁니다.’
‘파르네세가에는 권한이 없어, 국왕 폐하께서도……’
‘제 아버지인 공작각하와 다르게 어머니께서는 정치적인 분이 아닙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예전에 그가 파르네세 공작에게 폭행미수를 저질렀던 사건이 있었다. 커다란 무례였고, 실례였다. 그러나 리건은 사과하려 하지 않았다. 그나마의 사과도 대강의 ‘유감이다, 보상해준다.’하는 시건방진 말이었다. 그에 분개한 에드원이 쫓아와 그에게 지랄을 해댔었다. 리건은 그 후에는 조금의 진정성을 담아서 한 번 더 사과를 했다. 파르네세 공작은 ‘사과따위 필요 없다.’하고 예의를 차려 답이라도 주었다.
하지만 파르네세 공작부인은 일체의 반응도 않는다. 벤디트의 말처럼 상황이 얼마나 더 악화가 되건 간에 파르네세 공작부인은 절대로 꺾이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리건은 아무리 큰 사고를 쳐도 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기본 이상의 대접을 받아왔다. 리건은 제가 멀쩡해지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 헛꿈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의 기억 속 자신은 여전히 작년까지의 자신이었다.
잉그리드만 그를 알아주면 되는 게 아니었다. 잉그리드를 알아주는 이들이 그를 알아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사과문을 다시 보낼까? 하지만 무릎까지 꿇었는데 꿈쩍도 않는 이들이다. 리건이 결코 반박할 수 없는 ‘미래의 가능성’을 방책처럼 세워두고 그를 막아선 이들이 고작 종이쪼가리에 다시 그에게 기회를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자꾸만 달달 떨리려는 다리를 꾹 손바닥으로 쥐어 눌렀다. 정식으로 법관에게 요청해 파르네세가에서 잉그리드를 내놓도록 명령장을 얻어내야 할까. 그렇다면 정말로 돌이킬 수가 없어진다. 리건은 살아생전 처음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인정받지 못하는 게 이렇게 좆같은 기분인 줄 몰랐다.
마음이 조급해지면 후유증도 더 커진다는 걸 알아서 최대한 진정을 해보려 하지만 어려웠다. 이대로 시간만 끌다 잉그리드가 마음이 바뀌는 건 아닐까. 여태까지 포기하지 않아주었지만 계속해서 그들 가족이 ‘리건 에스펜서는 못 믿을 사람.’이라고 속닥거리면 정말로 그녀를 잃어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러고보니 지난주와 이번주 스렌타인사 주간지는 잠잠하다. 자신이 파르네세 공작저를 찾아갔던 걸 잉그리드는 아직 모를까? 파르네세 일가가 어디까지 잉그리드와 이야기를 공유하는지를 모르니 짐작만 할 뿐이지만, 만약 알고도 자신을 외면한 거라면 어떡하지? 다시 돌아왔는데, 예전보다 형편없어진 거 같아서 이제 정이 떨어진 거면 어떡하지, 아니, 다른 새끼가 잉그리드에게 접근해서 잉그리드가…….
이 빌어먹을 피해망상이 또 시작된다.
리건은 애써 얼굴을 문지르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아니었다. 아니다. 이렇게 자신을 갉아먹는 건 잉그리드를 더 실망하게 할 것이다. 뚝뚝. 마차 벽을 두드렸다. 마부가 응답했다. ‘예, 각하.’
리건은 갈라진 목소리로 명했다.
“파블리아로 돌아가.”
파르네세 공작부인과 꼭 닮았던 잉그리드를 떠올렸다. 그녀를 보지 못한 지 반 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리건은 간혹 주간지에 실리는 잉그리드의 사진만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그녀는 여전히 우아하고, 그녀는 여전히……
보고 싶어 죽을 것 같다.
잉그리드가 보고 싶어 죽을 것 같다.
다시 한 번 예전처럼 미친놈이 되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마차는 착잡한 그를 태우고 얼마간 더 달렸다. 멀미가 날 것 같다. 리건은 자꾸만 불안이 치대는 가슴을 꾹 눌러 쓸었다. 제발 진정해라, 제발 진정해. 마차가 멈추었다.
파블리아 저택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적하고 조용했다. 1층에 도착하자 헨슨이 그를 맞이했다. 헨슨은 리건의 축 쳐진 어깨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매를 당겨 웃었다.
“주인어른.”
“……왜.”
“오늘 좀 늦으셨습니다.”
리건은 착잡한 심경에도 헨슨이 답지 않게 왜 이러나 싶어 눈살을 찡그렸다. 평소라면 그가 대낮에 들어오든, 저녁에 들어오든, 새벽에 들어오든 묵묵하기만 한 자였다. 그러고보니 저택의 분위기가 오늘 낮과 달랐다. 헨슨의 뒤에 서있는 하녀의 얼굴도 상기되어 들뜬 것처럼 보였다. 제 기분은 좆같은데 저택의 분위기는 왜 이렇게 편안한지 그 괴리감에 더 속이 쓰리다 생각할 때였다.
리건은 이끌린 것처럼 헨슨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리건과 눈이 마주치자 헨슨의 얼굴에 번져있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 순간, 이상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멈추었던 가슴이 오늘 내리 타고 다녔던 마차의 흔들림처럼 덜컹덜컹 했다.
“부인께서 오셔서……”
헨슨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얄팍하게 그를 붙들고 있었던 이성이 크게 펄럭였다. 뒷말을 들을 여념도 없었다. 절로 몸이 휘청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계단을 달려 올라가고 있었다. 그도 모르게 소리쳤다. ‘잉그리드!’ 온 저택을 울릴 것 같은 고함이었다.
꼿꼿하게 서있던 헨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리건이 달려 올라간 계단을 내디뎠다. 엘뷔니에서 벌어지던 지긋지긋했던 파르네세들의 전쟁이 끝난 날이라 했다. 비록 잉그리드와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헨슨은 잉그리드가 리건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홀로 고군분투 했는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았다.
이제 스무 살이 되셨나? 어리기만 하다 생각했던 부인이 역시 대귀족의 딸이구나 싶기도 하고, 범인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감당해내는 것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참 고맙기도 했다.
“축배를 들기 좋은 날이니, 로니 양, 저택 내 고용인들에게 준비를 이르도록. 너희도 하루쯤은 쉬어야지.”
이제 리건이 술을 마시지 않으니, 티 파티를 하는 게 좋겠다. 헨슨은 제 계획에 흡족했다.
“준비, 준비할까요? 오늘……”
“내일로 하게, 오늘은 두 분께도 시간이 필요하실 테니.”
“네! 헨슨 님!”
파블리아 저택의 하녀와 하인들은 이미 신이 났다. 그들은 지난 번 에스트라 에릴과의 스캔들 때문에 잉그리드와 리건이 이혼하게 될까봐 많이 노심초사 했다. 에스트라 에릴의 성정을 겪어본 파블리아 저택의 이들은 십이면 십 그녀를 싫어했으니 그 스캔들을 믿지도 않았다.
파블리아 저택의 고용인들은 세 번째로 맞이한 에스펜서 공작부인을 사랑했다.
그들이 이곳에서 일하는 한, 주인어른과 오래오래 함께하길 매일매일 기원할 것이다.
*
몇 번이나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는지 모른다. 긴 복도를 달리는 동안 숨이 찬 줄도 몰랐다. 리건은 곧장 그들의 침실로 향했다. 잉그리드가 돌아왔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지만 잉그리드가 왔다는 말만으로도 오늘 내리 그를 괴롭게 하던 것들이 전부 사라졌다. 벌컥 침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리건은 멈춰 섰다. 침실은 오늘 아침보다 조금 더 정돈되었을 뿐, 인기척은 없었다. 아니었나? 잉그리드가 온 게 아니었나? 턱 끝까지 차오른 숨에 그제야 폐가 괴로웠다. 금세 땀이 흘렀다. 다리에 힘을 주고 서 얕게 헐떡이던 리건의 눈에 의자에 걸린 긴 숄이 보였다. 잉그리드의 것이다. 제 직감인지 아니면 바람이 너무 커서 그렇게 우기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리건은 그대로 뒤돌아 다시 잉그리드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헨슨에게 물었어야 했나? 빠르게 복도를 되돌아가, 응접실을 지나다 멈춰 섰다.
딩-
어디선가 청아한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 건반을 한 번 눌러본 것처럼 울렸다 사라졌다. 헛것을 들은 걸까. 멈춰 섰다. 건반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리건의 발길이 움직였다. 달려갔다. 가슴이 두드려 맞은 듯 울컥울컥 감격에 터졌다.
*
잉그리드는 단정하게 꾸민 차림이었다. 얇게 화장도 했다. 오랜만에 리건을 볼 텐데, 예쁘게 보이고 싶다하니 하녀 엘자가 정성껏 그녀의 단장을 도와주었다. 그래서 조금 늦은 시각에야 파블리아 저택에 도착했는데, 해저물녘 파르네세 공작저를 떠났다던 리건은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제 다 끝났어요, 헨슨 씨. 그동안 제 집을 잘 돌봐주어 고마워요. 다른 고용인들도 모두요. 잊지 않고 후일 답례 할게요.’
잉그리드의 귀가 인사에 헨슨과 고용인들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주인어른께서 정말로 기뻐하실 겁니다.’ 잉그리드도 그랬으면 바랐다.
리건을 기다리는 동안 잉그리드는 여러 가지를 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침실을 살폈다. 술과 잔과 시가케이스로 늘 가득 차있던 텅 빈 찬장을 보고 웃었다. 리건의 집무실도 훔쳐보았다. 책상 위에 스렌타인사 주간지가 쌓여있고, 파르네세가에 대한 것들이 한 다발이었다. ‘귀여워.’ 부모님과 오빠들이 자신을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하는 게 과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자신이 파르네세가를 떠나왔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머물 곳을 지키는 건 안주인으로써는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한참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리건의 흔적을 따라다니다가 연주실까지 흘러들어왔다.
리건이 그녀에게 선물해 주었던 하얀 피아노.
‘3년 만이야.’ 실수투성이 연주를 부끄러워했던 남자의 손가락이 노닐었던 건반을 눌러보았다. 왜 빨리 오지 않는 거야. 빨리 보고 싶은데. 저절로 입술이 삐죽해졌다. 건반 몇 개를 더 눌러보았다. 그러는 동안 잉그리드는 점점 숙연해졌다.
홀로 피아노를 연습하던 리건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 서툴던 연주곡의 이름이 떠오르고, 훌쭉해진 배가 공허했다.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서로가 아파서 어쩔 줄 몰라 외면했던 밀로아에서의 그 날이 리건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를 다시 만나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잉그리드는 비로소 조금 두려워졌다. 그는 지금 어떤 마음일지,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사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버텨야 한다 생각해서 매일매일 울음 삭이며 버텼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가 깊은 고민에 빠질 틈도 없이 빠른 발소리가 울리더니 벌컥 연주실의 문이 열렸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있던 잉그리드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 어깨를 작게 오르내리는 리건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은 마지막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단정한 길이로 짧아졌지만 헝클어진 채다. 그녀가 좋아하는 바다색의 눈동자는 청청했다.
리건은 말조차 잇지 못하고 잉그리드만 바라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꿈인 것 같았다. 마지막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길어진 백금발을 늘어뜨린,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게. 그의 지옥같은 시간을 지켜주었던 여자가.
“잉그리드.”
숨이 거칠어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언뜻 화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리건이 애써 다리에 힘을 주어 걸음을 뗐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다시 멈추었다. 씨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간신히 버텨 넘어지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잉그리드는 언제나처럼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 눈가가 자꾸 뜨거워졌다.
“……잉가, 지금, 달려가고 싶은데, 씨발,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잠깐……. 잠깐만.”
잉그리드는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날 것 같은 기분을 참으며 입술을 꽉 당겼다. 그녀는 작게 심호흡한 후 조용히 피아노 의자를 밀며 일어서려 했다.
리건이 꽉 잠긴 목소리를 뜯어 뱉었다.
“너 가만히 있어.”
세상천지에 지 부인 만났다고 온 몸에 힘이 풀려 기절할 것 같은 남편이 어디 있나. 하지만 여기 있었다. 리건은 다리가 후들거려 이대로 주저앉아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한심한 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갈 거니까.”
살짝 입술을 벌린 채 그를 응시하던 잉그리드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촉촉하게 젖은 눈을 예쁘게 접어 웃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를 움직이게하는 마법의 주문을 외운다.
“어서 와요, 내 남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