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24
00024 [다섯 번째 역] 엘뷔니 디어 =========================================================================
어쩌다가 저 치밀한 여자한테 이런 짓을 했나.
어쩌자고. 리건 에스펜서, 이 병신 새끼야……..
리건이 머리를 싸맸다. 아무데서나 굴러먹는 여자도 아닌 잉그리드 파르네세였다. 지난밤 일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한다면 그는 입이 만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저 영악한 계집은 그걸 노리고서 이 시간까지……. 조금씩 마음이 비워졌다. 헤젠도 어차피 못 벗어날 거라고 했다. 영지 사업도 다시 순항을 타기 시작했고……. 어차피, 빼도 박도 못하게 결혼하게 된 상대잖아.
손 좀 대면 어때. 아, 옘병할. 합리화가 안 된다.
수시로 바뀌는 리건의 안색에 잉그리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농담이에요, 간밤의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너무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시니까 제가 더 겸연쩍어지네요.”
리건은 저렇게 그의 속을 간파하는 것 같은 잉그리드조차도 싫었다. 원래는 그랬는데, 지금만큼은 저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리건이 더듬거렸다. 말더듬이 병신처럼 구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었다. 자신은 병신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내가……. 그러니까, 내가.”
“네, 말씀하세요. 리건.”
“내가, 내가…….”
누가 보면 세상에 아는 말이 ‘내가’밖에 없는 줄 알았을 것이다. 잉그리드는 눈치 빠르게 알아차리고는 슬며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늦더라도 돌아가려 했는데, 공께서 너무 꽉 안고 계셔서……. 사람을 부르는 것도 이상한 상황이라……”
그럴 것이다. 일단 눈을 떴을때 본 잉그리드의 차림은 거의, 그래, 그런 상황이었다.
“아무도 못 봤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중간에 살피러 온 하녀는 그냥 돌려보냈어요. 조금만 정신을 차리시면 돌아가려 했는데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어버려서.”
그 상황에서 잠을 잘 수가 있다는 게 말이 돼? 리건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너 제 정신이야? 취해서 미친놈이랑 밤이 새도록 한 방에 있어?”
“나쁜 짓 않으셨잖아요.”
“아무리 겁대가리가 없어도……!”
잉그리드는 어색하게 웃었다. 전혀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뭔가에 취해서 그녀를 끌어안은 리건의 힘은 몹시 셌다. 밀어내려 해도 끄떡도 않았다.
처음 그녀에게 벗으라는 말을 할 때는 농담인 줄 알았다. 그가 더듬더듬 드레스 끈을 풀어내고 벗기려 들 때는 당황해 소리라도 질러야 할까 했다. 하지만 잉그리드는 헤젠과의 대화 이후로 몹시 마음이 불편해 생각이 많을 때였다. 알 수 없는 말을 옹알거리며 비비적거리는 리건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붉은 머리칼을 한번 만져줄 때마다 기분 좋은 소리를 내는 리건은 평소와는 아주 달랐다.
리건은 그녀의 드레스의 허리끈을 풀어내는 데만 이십 분이 걸렸다. 그래놓고 ‘나 잘 하지’ 비슷하게 떠들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끌어안는 리건은 남자라기보다는 아기 같았다. 그는 아기처럼 쪽쪽대며 갑자기 키득거리다가, 울다가, 그의 인생이 얼마나 거지같은지에 대한 헛소리를 하다가, 골아 떨어졌다.
그때라도 어떻게든 추스르고 돌아갔어야 했는데 리건이 너무 세게 끌어안고 있어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쩐지 죄책감이 막심해 잠깐만 더, 잠깐만 더 하다가 그녀도 까무룩 잠이 든 것이다.
리건이 먼저 눈을 떠 질식할 것 같은 숨소리를 내며 인기척을 주지 않았더라면 아직 잠들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큰일이네.’
허락도 없이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파블리아 저택에서 밤을 지새웠으니 오빠들이 언짢아 할 것이었다.
지난 밤, 잠들기 전까지 잉그리드는 많은 생각을 했다.
“리건, 잠깐 얘기를 좀 나눴으면 좋겠어요.”
침대 맡에 앉은 잉그리드가 리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리건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곤혹과 충격과 분노와 그 밖의 여러 감정이 스쳤다. 어쩔 수 없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 때다. 그냥 포기하는 게 편하다. 헤젠도 그렇게 말을 했고, 그 역시도 이이상 발버둥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두 번이나 하기 싫은 결혼을 했는데, 세 번은 왜 못해. 인생이란 게 원래 이렇게 개같은 건데 제가 혼자 이렇게 스트레스 받아봐야 누가 좋다고.
“밤새도록 저 싫다고 칭얼거린 거 아세요?”
“…….”
“리건, 듣고 있어요?”
맥없는 리건의 얼굴을 바라보는 잉그리드의 보랏빛 눈동자에 쓸쓸함이 스쳤다. 늘 성질을 내고, 욕지거리를 퍼붓고 모욕을 하는 리건을 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기운 빠진 리건은 그녀를 슬프게 했다.
리건에게 있지도 않던 술버릇이 생긴 것도 그녀 때문이라 했다. 싫다싫다 했지만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다. 대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주었고 바랐기에 부릴 수 있는 오만과 비슷했다.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 남자라도 싫은 사람은 있는가보다. 하필이면 그녀가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한 사람이 그녀를 이렇게 싫어하는 것. 조금 마음이 아팠다.
에드원은 언젠가 잉그리드에게 그런 말도 했다. 취중에는 평소 억눌렀던 진심까지 전부 쏟아져 나오는 법이라고. 리건은 간밤 뭔가에 취한 채로 끊임없이 그의 불행을 이야기 했다. 가문도 다른 무엇도 신경쓰지 않고 오직 불행하지 않은 삶을 위해 선택했는데, 리건에게 그녀는 불행 그 자체인 모양이다.
“……왜 제가 그렇게 싫은지 여쭈어도 돼요?”
“싫은 데 이유가 필요한가.”
부러 사납게 말하면서도 말끝에는 힘이 빠졌다. 잉그리드는 그런 리건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저는 오히려 공께서 왕자님과 각별하셨기에 더 공과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아요. 왕자님은 저에게 그 이상 받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많은 애정을 주셨던 분이세요. 그런 왕자님이 함께 어울렸던 공도 당연히 좋은 사람일 거라고.”
“…….그런 얘기는 대체 지금 왜 하는 거냐?”
“…….저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싫은지 알고 싶기도 하고,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제가 너무 주제넘었고, 너무 막무가내였죠.”
이 여자 갑자기 무섭게 왜 이래.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다른 개선 가능한 이유로 제가 싫으신 거라면 말해주세요.”
흠잡을 데가 없는 여자가 흠집을 묻는다. 결국 어거지 같은 대답을 내놓으라는 뜻이다. 어거지 같은 대답은 하는 사람이 병신이 된다. 그는 이미 충분히 스스로를 병신 같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굳이 더 병신 같아질 이유는 없었다. 리건은 표정을 지웠다. 다른 것보다 차분한 잉그리드의 분위기가 몹시 미묘하여 거슬렸다.
“리건, 리건은 사업가이시죠.”
“……”
“사업을 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제가 그렇게 상품으로써 모자랄까요? 제가 처음에 과하게 공을 난처하게 만들어서 싫어하시는 것도 당연하지만, 저는 여태까지 당신이 당신의 부인을 대했던 것처럼 저를 그냥 물건처럼 보실 거라 생각했어요.”
리건은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지난 두 명의 부인을 어찌 대했는지에 관하여 귀족들 사이에 퍼지지 않을 리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물건처럼 대했다는 직설적인 단어에는 무슨 말로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무시하고, 모욕하고 그런 것이 일상이었다. 지참금만 두고 꺼지라는 태도 역시 그를 몹시 계산적으로 보이게 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저는 그저 파르네세의 딸일 뿐이고, 당신은 공작 각하시니 그 격차가 어쩌면 당신에게 있어 손해일 수도 있다고는 생각해요. 하지만 보셨다시피 저는 잘 할 수 있어요. 리건, 저는 결코 당신에게 누를 끼치지는 않을 거예요. 이게 제가 내걸 수 있는 가장 좋은 제안이에요.”
“……”
“하지만 더 고집부리지는 않을게요. 만약 지금 각하께서 ‘싫다.’ 라는 한 마디만 하시면 정말로 깨끗이 정리할게요. 폐하께도 다시 찾아뵈어 공께 더 이상 폐가 가지 않도록 혼담을 파해주십사 청할게요. 저 혼자의 연모가 깊어 이런 발칙한 거짓말을 했다고, 리건님은 저 때문에 고생하셨을 뿐이라고요.”
리건은 근래에 의심이 많아졌다. 잉그리드의 저 말도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지난 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지금 이 계집이 태도를 바꾸었나? 자신이 얼마나 심한 폭언을 했기에 저렇게 나오는 건가. 왜 지금 그 생각이 들지. 냉큼 싫다고 대답했다가 또 무슨 수렁에 빠지는 건 아닐까.
“대답해주세요. 조금의 여지도 없이 싫으신가요?”
보통은 그렇다. 여자가 밤이 새도록 붙잡고 남세스러운 짓을 했던 남자에게 ‘내가 좋으냐, 싫으냐.’를 묻는다면 좋다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잉그리드는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말장난으로 사람을 몰아가지는 않았다. 대개 그녀의 만행은 전부 예상치 못한 순간 날아온 뒤통수 같은 것이다.
뭣보다도 지금 잉그리드의 표정에서 묻어나는 것은 거리감이었다. 부러 친밀하게 관계를 좁히려 하지 않는 적절한 거리. 잉그리드 파르네세를 만난 이래 간밤처럼 가까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기억은 나지 않더라도 눈을 뜬 순간 이미 그녀에게 비비적거리고 있었던 것이 자신이다. 상황의 흐름이 뭔가 이상하다. 늘 이상했다. 잉그리드 파르네세의 생각을 알 수가 없다.
리건이 목 안쪽 무언가가 쑤시는 기분을 느끼며 씹듯 뱉었다.
“수십 번 했던 말이지만 못할 거 없지. 싫다.”
잉그리드는 입술을 당겨 무는 리건을 가만 응시하다가,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추었다.
“알겠어요. 에스펜서 공.”
미련 없이 일어섰다. 자신과 무슨 깊은 관계나 되었다고 울상이었다. 잉그리드가 한쪽 손으로 여전히 가슴팍 옷깃을 누른 채로 조용히 무릎을 굽혔다 펴 인사했다.
“그동안 정말로 죄송했어요, 제가 너무 이기적이고 못되게 굴었던 것 같아요. 덕분에 세베루스와의 파혼은 성사되었으니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빚을 갚을 수 있도록 할게요.”
“……”
“다시 한 번 폐 끼친 데에 사과드려요. 용서해주실지는 모르겠지만 용서해주지 않으신다 해도 괜찮아요.”
리건은 가만 입술을 씹었다. 가슴 한쪽이 쌔하다. 이상하다. 너무 쉽다. 이게 뭐지?
“이번에도 또 뒤에서 수작질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오늘 돌아가면 다시는 뵐 일 없을 거예요. 이번에는 정말로 그럴 생각이니까 믿……”
그때였다, 이런 아침부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마차 한 대가 커다란 바퀴를 굴리며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파르네세가의 방패 문장이 새겨진 마차였다. 잉그리드가 창밖을 한번 내다본 후 놀란 얼굴을 했다.
“다시 한번 죄송해요, 그럼 안녕히.”
안색을 굳힌 잉그리드가 제대로 작별인사조차 하지 않고 빠르게 방을 벗어났다. 리건이 잉그리드 파르네세라는 여자를 만난 이래 처음 보는 당황이었다.
리건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다가 떨어질 것 같은 목을 뒤로 젖혔다. 뒷목이 누구한테 맞은 것처럼 아프다. 이상하다.
밤이 새도록 여자의 가슴을 주무르던 손이 허전했다. 자신이 정말 몹쓸 새끼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이것도 수작인가?’
그러지 않고서야 그토록 집요하게 들러붙었던 여자가 이렇게 쉽게 떨어져나갈 수가 있나. 기이했다. 아니면 아직 제가 잠에 들어 있나. 이건 바라고 바랐던 것들을 보여주는 꿈인가. 하지만 뒷목의 저린 느낌은 현실적이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는 이 이상 제 인생이 개 같을 수가 없다 생각했는데. 차라리 그래, 그냥 저 여자랑 결혼하고 말지. 그렇게 내심 스스로 포기했는데.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간밤에 제가 했던 짓을 물고 늘어지기는커녕 깨끗하게 떨어져 나가겠다고 했다. 이상하게 리건은 불안해졌다.
‘…….진짜 뭐지?’
리건은 침대에 벌렁 누웠다. 떨어져 나가라 악을 쓰지도 않았는데 정말로 조금의 미련도 없이 일어선 것은 그쪽이었다. 만족감도 불만족감도 없었다. 정말로 이상해.
가만 누워 푸른 눈동자를 깜빡이던 리건이 불현듯 일어서 창가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