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herited the throne of the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189
54장. 피와 꽃(2)
여기서 하필 야마와 마주친다고?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표정 풀어. 아빠가 반갑지 않나 보지?”
야마가 보석처럼 형형한 눈을 휘며 능청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겁니까?”
흥미를 숨기지 않는 시선에 내가 먼저 그에게 물었다.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헬을 노리겠다던 야마가 헬이 부리는 드워프들과 손을 잡았을 리 있겠는가.
그녀를 무너뜨리기 위해 날 이용하려던 오딘이다.
야마의 힘이라고 탐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음, 무슨 망치를 되찾아주면 헬을 넘기겠대서.”
그 또한 상황을 파악했는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대답했다.
결국 오딘은 처음부터 나와 야마에게 똑같은 제안을 한 것이다.
누가 묠니르를 차지하든 그는 더 뛰어난 쪽과 동맹을 맺는 셈이니까.
설령 그 탓에 나와 야마가 반감을 갖게 된다 한들, 우리 역시 북유럽의 신화를 노리는 이상 계속 자신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리라.
그런 작자가, 그렇게 맺어진 동맹을 상대로, 과연 제대로 된 신의를 보여줄까?
내 안에서 오딘과의 교전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물론 그것도 오딘의 힘을 빌어 헬을 꺾은 뒤의 일이겠지만.
“흐음…….”
생각을 되짚는 동안 야마가 턱을 문지르며 나를 살폈다.
“그놈들은 너와 내가 싸우는 걸 보고 싶은 모양인데. 아들, 넌 어때?”
이어지는 물음에 살짝 인상을 썼다.
여상하게 말하는 그에게서 범상치 않은 신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일까.
분명 처음 만났던 야마는 신성이 깊지 않았는데.
모든 조건을 배제하고 단순히 신성 하나만 따진다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그를 압도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정도였다.
한데 다시 만난 야마에게서는 몇 배나 더 깊은 신성이 느껴졌다.
지금도 홀로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짧은 시간 만에 이토록 달라졌다는 사실이 거듭 그를 경계하게 만들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신성이 이보다 더 깊어져 있으리라는, 썩 유쾌하지 못한 예감이 들었다.
“거기다 도시락은 왜 안 먹었고?”
야마는 도리어 내가 지닌 신성을 꿰뚫어 보며 물었다.
“그놈이 안 보내줬을 리는 없는데. 근데 왜 아까랑 달라진 게 없지?”
“……설마 발키리를 말하는 겁니까?”
표정이 굳어졌다.
내게 프레이야가 찾아왔듯이, 그에게도 오딘의 제안을 전하기 위해 또 다른 발키리가 방문했을 터였다.
“발키리!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그의 신성이 단시간에 깊어진 이유를 직감한 내가 말을 잃은 사이 야마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전장에서 전사들의 뒤통수나 치는 사신들!”
그가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신이라는 것들이 어련히 찾아올 망자를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채가다니. 품위가 없으니 맛도 영 별로였지.”
역시 야마는 오딘이 사신(使臣)으로 보낸 발키리에게서 죽음의 신성을 흡수했다.
말마따나 발키리는 전장에서 죽은 전사자에 그치지 않고, 쓸모 있어 보이는 전사라면 직접 죽여서 오딘의 군대로 데려가는 사신(死神)이었으니까.
즉, 오딘은 제 수하를 흡수한 자에게 아무런 제재 없이 손을 내민 것이다.
“그래서 궁금해.”
낄낄 웃던 야마가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훑었다.
“난 처음부터 네가 제일 맛있어 보였거든.”
내 발끝부터 느릿하게 핥아 올린 시선과 눈이 마주친 순간.
채애애앵!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들자마자 거친 쇳소리가 울렸다.
곤봉을 힘껏 부딪쳐 온 야마가 코앞에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대왕……!”
곁에 서 있던 사라가 휘말리지 않도록 야마를 강하게 밀어냈다.
채애앵!
채애애애앵!
채애애앵!
몇 번 더 검을 부딪치며 야마의 실력을 가늠한 나는 일단 사라를 안심시켰다.
“저는 괜찮습니다, 도령님!”
보다 깊어지긴 했으나 야마의 신성은 여전히 나보다 모자랐다.
회복시켜줄 사라도 함께였으니 내가 패배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채애애애앵!
위에서 찍어누르듯 덤벼오는 야마의 곤봉을 검으로 쳐올리며 물었다.
“정말로 제 신성을 노리는 겁니까?”
채애앵!
그가 핏빛 곤봉에 검은 신성을 짙게 휘감으며 웃었다.
“그럼 가짜로 노리겠어?”
호전적인 대답에 나도 죽음의 신성을 휘감으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채애애앵!
핏빛 곤봉과 은색의 검이 거세게 부딪치며 두 죽음의 신성이 불꽃처럼 튀었다.
채앵!
채애애앵!
채애앵!
나는 점점 더 빠른 공방을 유도하다 일순 신성을 방출하여 그를 거듭 더 멀리 떨어뜨렸다.
촤아아아악.
내 신성에 밀려난 야마가 공장의 바닥에 긴 자국을 남기며 미끄러졌다.
“와, 기운 좋은데?”
재밌다는 듯 소리 내 웃은 야마가 다시 내게 달려들려는 찰나.
나는 검 대신 다른 손을 뻗었다.
그가 진심으로 날 노린다면, 나 역시 전력을 다할 따름이었다.
[ 검수지옥(L) ]서슬 퍼런 지옥의 신성이 휘몰아치며 은빛의 칼날나무가 순식간에 숲을 이루었다.
촤아아악.
촤아아아악.
촤아악.
하늘을 찌를 기세로 솟구치는 칼날의 나무.
칼날나무 숲에 갇힌 야마가 예상치 못한 듯 눈을 부릅떴다.
죄인을 벌하는 칼날 잎이 신의 몸을 꿰뚫고 그의 몸 곳곳에서 피가 터졌다.
붉은 머리칼과 붉은 옷자락, 붉은 핏방울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그러나 나는 안심하지 않고 검수지옥에 사로잡힌 그를 지켜보았다.
“허…….”
뒤에서 사라의 낮은 탄식이 들렸다.
“확실히 신성은 대왕, 네가 위다. 다만…….”
검수지옥의 신성은 야마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그 사실에는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사라가 쉬이 안심하지 못하는 것은, 나와 마찬가지로 야마에게서 기이한 위압감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
칼날나무에 꿰인 그의 몸이 경련하듯 크게 떨렸다.
조금만 신성을 더하면 이대로 그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 수도 있을 터였다.
분명 그럴진대, 어째서인지 내키지 않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하여 치명상을 입은 그를 앞에 두고도 도통 마무리 짓기가 꺼려졌다.
【……크, 흐흐. 크흐하핫!】
그때 칼날나무 속에서 귀가 아플 만큼 선명한 소성(笑聲)이 울려 퍼졌다.
【흐하핫, 거기서 멈춘다고? 정말 어리고 여리구나, 내 아들!】
파아아앙!
신성이 담겨 기괴하리만치 커진 웃음소리와 함께 시커먼 신성이 시야를 뒤덮을 기세로 번쩍였다.
신을 꿰뚫어 가두었던 칼날나무의 잎사귀가 온 사방으로 요란하게 튀었고, 칼날의 숲은 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기왕 힘을 쓸 거였으면 가진 신성을 전부 쥐어짰어야지.】
피칠갑이 된 몸에서 부서진 칼날이 후드득 떨어졌다.
핏물로 붉어진 이를 활짝 드러내며 야마는 웃었다.
귀신의 왕에 걸맞게 섬뜩한 미소였다.
【어설프게 틈을 남기니까 이렇게 되잖아.】
채애애앵!
벌린 거리가 무색하게 눈 깜짝할 새 다가온 그가 곤봉을 휘둘렀다.
【아니, 그냥 착해서 아빠를 봐준 건가?】
“……!”
채애애애애앵!
곤봉과 검이 부딪치며 쇳소리를 내었다.
이때까지와는 다른 압도적인 힘에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피로 얼룩진 야마의 몸에서 그새 한층 더 짙어진 죽음의 신성이 흘러나왔다.
채애앵!
채애애앵!
채앵!
빠르게 무기를 섞으면서도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대상의 본질을 꿰뚫고 보이는 정보를 규합하는 업경의 촉이 내게 전하고 있었다.
야마는 내가 어설프게 신성을 남기는 바람에 자신이 살아났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모든 힘을 들이지 않았기에 이 정도로 상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자신이 당한 공격으로부터 힘을 흡수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치명상을 입은 그를 앞에 두고도 결정타를 망설이게 한 불길함의 정체였다.
【표정이 왜 그래?】
야마는 온몸에서 검은 신성을 줄기줄기 피워 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채애애애앵!
장난스러운 몸짓과 달리 그가 쥔 곤봉이 묵직하게 내 검을 짓눌렀다.
【혹시 봐준 게 아니었어? 우리 아들은 원래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나? 이런, 그것도 모르고 아빠가 실수했네!】
노골적인 도발에 쓴웃음이 샜다.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야마는 교활했다.
얼핏 생각 없이 수다스러운 듯 보여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며 수작을 부렸다.
“아뇨, 스킬은 이제 됐습니다.”
힘을 흡수하기 위해 재차 지옥 스킬을 쓰도록 날 유도하는 지금처럼.
“당신은 이 검 한 자루로 충분해요.”
내 망설임 없는 대답에 야마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내가 자신의 능력을 간파했음을 눈치챈 듯했다.
【똑똑하기도 하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 그가 손에 쥔 곤봉을 빠르게 휘둘렀다.
【그렇다면 죽음 대 죽음으로 겨루어 볼까.】
채앵!
채애앵!
채애애앵!
타격 하나하나에 죽음의 이치가 담겨 있었다.
긴장을 거둘 틈 없이 내가 익힌 죽음의 검을 휘둘렀다.
채애애애앵!
한데 죽음과 죽음을 부딪칠수록 위화감이 느껴졌다.
채애애앵애앵!
그가 점점 나를 압도하고 있다는 불쾌감이었다.
스킬을 배제하고 오직 손에 익힌 곤봉과 검으로 이어가는 싸움.
그 한 축에서 나는 신성을 넘어선 연륜을 실감했다.
떠밀리듯 왕좌에 앉은 나와 달리, 야마의 죽음은 아주 오랜 세월 당연하게 왕의 자리에 군림해 왔던 자의 신화 그 자체였다.
신화적 죽음.
그것을 의식하면 할수록 그와 검을 맞부딪치는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내가 익혀야 할 죽음의 이치가 야마의 팔에 깃들어 있었다.
흘려보내선 안 된다.
나를 압박해 오는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씹어 삼키듯 직시했다.
나는 그의 죽음을 통해 나의 죽음을 완성해야 했다.
나의 아버지가 부재하는 이상, 내게 왕의 죽음을 가르쳐줄 수 있는 이는 이제 염라와 같은 뿌리를 가진 야마라자뿐이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반드시 쓰러트려야 할 숙적이었고, 한편으로는 뒤쫓아서 넘어서야 할 스승이었다.
【호오, 이것 봐라.】
그러던 그때.
채애애애애앵!
수없이 부딪쳐 온 붉은 곤봉에 이때까지와는 다른 압도적인 신성이 실렸다.
【귀여운 고양이라고 생각해 잠깐 놀아주었더니.】
야마를 중심으로 뻗친 검은 신성이 돌연 불길한 형상의 개를 두 마리 그렸다.
네 개의 눈을 뜬 야마의 검은 개, 사라메야였다.
검은 연기처럼 피어오른 개들이 내게 아가리를 벌렸다.
【겁도 없이 날 삼키려 드는 호랑이 새끼였네?】
콰드드드득!
당장이라도 짓누르려 드는 곤봉에 발이 묶인 틈을 타서 사라메야가 나를 물어뜯었다.
“큭……!”
터져 나온 핏물을 무시하며 곤봉을 우선 떨쳐내려 했다.
하나 그보다 먼저 사라메야가 이빨을 점점 더 깊이 박아 넣더니, 두 마리 모두 삽시간에 굵은 오랏줄로 변해 온몸을 거세게 죄었다.
뻗어진 오랏줄은 곤봉을 막아선 팔까지 잡아 내리기 시작했고, 몸이 죄인 자리마다 찢기듯 살갗이 갈라졌다.
【역시 이빨이 다 자라기 전에 잡아먹어야겠다.】
야마는 여유롭게 곤봉을 내리며 피로 젖은 입술을 핥았다.
그가 손을 뻗었다.
신성을 두른 손바닥에 피어난 검은색 연꽃.
그 낯설지 않은 기운에서 불길한 조화가 읽히자, 이대로 흡수당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위기감이 몰려왔다.
“당신 뜻대로는 되지 않아……!”
연꽃과 닿기 직전, 검을 늘어뜨린 손아귀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 (!) 무용담(E) ‘흘린 피는 흐르는 피로’가 당신이 흘리는 피를 감지합니다. ]내가 입은 상처가 치명상 판단을 받으며 무용담이 발동되었다.
[ (!) 무용담(E) ‘흘린 피는 흐르는 피로’의 효과로 공격력이 ‘1,000%’ 상승합니다. ]상처는 생각보다 치명적이었는지 발휘된 무용담의 효과는 최대치였다.
그것은 곧 싸움을 오래 버틸 여력이 부족하다는 말과도 같았으나, 이 상황을 타파할 좋은 패임은 분명했다.
【꼭 꺼지기 직전의 촛불 같구나.】
내 상태를 알아본 야마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오랏줄 먼저 끊어 내려는 찰나였다.
【아니, 그럴 일은 없다.】
귀를 어지럽히던 야마의 신언을 가르고 익숙한 신언이 들려왔다.
【내가 곁을 지키는 한 왕이 쓰러질 일은 없어.】
그와 동시에 낯선 팝업창이 떴다.
[ (!) 무용담(E) ‘흘린 피는 흐르는 피로’가 무용담(E) ‘시들지 않는 꽃’과 공명합니다. ]내 무용담과 사라의 무용담이 공명한다니.
생소한 팝업창에 나도 모르게 멈칫하며 눈을 깜빡이는 사이.
[ (!) 대상의 카르마에 따라 ‘연계 무용담(E)’이 완성되었습니다. ]내가 흘린 핏방울이 꽃잎처럼 흩날리며 가슴에서부터 선명한 붉은 꽃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