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herited the throne of the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211
62장. 돌아온 후(2)
용궁과 북유럽을 다녀온 사이 이렇게나 훌쩍 자라다니.
나는 강림 형의 손에 들린 막내 흑암이에게 바짝 고개를 들이밀었다.
단군에게서 받은 물뿌리개로 형이 매일 물을 주긴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분명 손톱만 한 새싹이 보일락 말락 했었는데 잠깐 사이 한 뼘 이상 자란 것이 놀라웠다.
“북유럽에 머무는 동안 광천못의 신성이 꽤 깊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용궁에서 힘을 썼다더군요.”
이야기를 듣자 하니, 오휼과 오혜가 한 번 찾아왔다고 했다.
용왕들이 이전에 약속했던 대로 용궁으로 연결되는 보패를 설치하면서 광천못에 물의 신성을 듬뿍 보태고 돌아갔다고.
“아, 그 덕분에 발설이가 이렇게 컸구나!”
발설이와 형제들을 향해 다가갔다.
이렇게 보니 다들 내 허리까지 자랐네.
어떤 물을 주느냐가 이렇게 중요하구나.
“예, 그자의 물뿌리개로 광천못의 물을 주니 흑암이도 많이 자랐습니다.”
형이 흑암이 화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느 때 같은 무표정으로 보여도 자세히 보면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용궁과 북유럽을 오가는 동안 내 곁에서 내내 긴장을 풀지 못했던 형이다.
그러던 때에 지옥수들의 성장으로 간만에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서 나도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형을 따라 웃으며 흑암이를 바라보자 형이 내 쪽으로 화분을 좀 더 가까이 해주며 말을 이었다.
“용궁을 떠난 뒤로는 평범한 물밖에 주지 못했습니다만, 노괴가 빛의 신성은 꾸준히 불어넣었지요. 광천못의 물을 주면서 균형이 맞게 되었다더군요.”
하긴 형이 물만 잔뜩 주었을 때도 발설이가 시들해졌으니까.
반대로 흑암이는 제대로 된 물을 마시지 못해서 성장이 늦어진 모양이었다.
단군의 물뿌리개가 어느 정도 보충했겠지만, 그래도 한창 성장기였으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겠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자에 앉은 형의 너른 등 너머로 밤하늘에 걸린 초승달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음력으로 2071년 6월 3일이었다.
양력으로는 6월 30일, 하지로부터 벌써 일주일도 넘게 지난 때였다.
우리가 용궁에 간 게 4월 중순이었으니 그새 두 달이 넘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용궁에서 제법 오래 머무르긴 했지만 우리가 정말로 그만큼이나 저승을 떠나있던 것은 아니었고,
아마 북유럽에서 한반도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모종의 시차가 발생한 듯했다.
넘어가고 보니 과거의 북유럽이었던 것처럼, 보다 미래로 돌아오게 된 것 역시 이상한 일은 아닐 테지.
“…….”
그것을 의식하자 새삼 한반도의 정세가 곱씹혔다.
돌아온 후 방에서 쉬는 동안 알아본 한반도는 두 달 사이에 또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안 그래도 세 번째 천벌 이후로 뒤숭숭했던 천부인과 단군에 대한 여론이 더욱 악화된 상태였다.
단군이 한반도를 비운 사이 한반도의 전설급 길드 중 하나인 수로왕의 가야가 천부인과 무력으로 충돌하는 사건이 있었다.
대형 길드끼리 부딪친 역대급 사건이었음에도 단군은 입장을 내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 춘분, 하지, 추분, 동지에 맞춰 지금껏 공개적으로 올려 왔던 제사도 그냥 지나가버렸다.
단군이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은 15년 만에 처음 있는 일.
나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지만, 사정을 모르는 다른 이들은 온갖 낭설을 퍼트리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네 번째 천벌을 나와 주몽이 막게 된다니.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단군을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천벌은 단군이라는 존재와 한반도의 정세를 완성시킨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수만 명의 목숨이 달린 끔찍한 재앙은 동시에 그것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을 범접할 수 없는 영웅으로 만들었다.
천벌을 예견할 수 있는 것도, 불완전하게나마 그것을 방어할 수 있는 것도 단군뿐이었다.
한데 이제 그 유일무이한 역할마저 다른 이들이 차지해버린다면.
믿을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이라고는 그저 한반도 절반의 지지밖에 없었던 고립된 영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 그의 가장 위험한 정적이자 형이라는 주몽 또한 그것을 노리고 나선 것일 텐데.
-인간을 인간에게 맡겨선 안 됩니다.
그가 꾸준히 내게 해 왔던 말이 생각났다.
기꺼이 인간을 위해 자신을 바친 인간이 어떤 식으로 인간에게 침수되어 가는지를, 내게 보여주려는 것 같다는 다소 비틀린 감상과 함께.
……단군이라고 해서 이런 형태로 자신의 시대가 무너지는 것을 진심으로 바랄 리 없을 테니까.
“킹?”
생각에 잠기려는 때 문득 그림 리퍼가 나를 불렀다.
“왜 그래?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졌잖아.”
“아…… 아니에요.”
어깨를 감싸는 손길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리퍼에 이어, 발설이와 형제들의 성장을 자랑하며 들뜬 얼굴을 했던 형이 도로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이 나서 우리를 데리러 왔던 리퍼에게도, 모처럼 긴장이 풀린 모습을 보여준 형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커지는 사이 이번에는 뒤쪽에서 호구별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빨리 애들 좀 불러오라는데 왜 이렇게 안 와?”
돌아보니 호구별성뿐만이 아니었다.
사라, 바리네 가족, 탈해와 도깨비들, 로봇 하인들까지 줄줄이 함께였다.
“뻔하지! 강림 저놈이 또 세월아 네월아 죽치고 있었겠지!”
나는 서천꽃밭에 한가득 모인 저승 식구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로봇 하인들이 야외용 그릴이며 아이스박스까지 들고 온 것을 보면 아예 이곳에 자리를 펼 생각인 것 같았다.
“음, 원래는 마당에서 놀려고 했는데 영감이 새로 지은 정자에 눕고 싶다더라고.”
호구별성이 옆에 선 사라를 흘기며 대답했다.
“아, 맞아요. 그새 근사한 정자가 생겼더라고요.”
고개를 끄덕이며 정자를 돌아보았다.
서천꽃밭은 아직도 꽃이 피지 못한 상태였지만, 땅은 고르게 정돈되었고 멀찍이 광천못이 보여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대왕님.”
탈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추가 기능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정자에 다른 기능이 있어요?”
고개를 갸웃하자 탈해가 투명한 안경알을 번쩍이며 리모컨을 꺼냈다.
“홀로그램으로 풍경을 바꿀 수 있는 기능입니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바로 보여주겠다는 듯 탈해가 리모콘을 딸깍였다.
파팟!
주변이 번쩍이면서 서천꽃밭의 풍경이 놀랍게도 한순간에 모래알이 곱게 반짝이는 해변으로 변했다.
“우와…….”
홀로그램이라더니 거의 공간 이동 수준이었다.
나는 생생하게 펼쳐진 바다를 둘러보며 입을 벌렸다.
투명하게 파도치는 바다에서는 믿을 수 없게도 정말로 바다 냄새까지 밀려오는 듯했다.
“그냥 보이는 풍경만 바뀌는 것도 아니네요.”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의 울음소리, 그리고 바다 특유의 짠 냄새까지 놀라울 정도로 생생해서 나는 탈해를 돌아보며 물었다.
“맞습니다. 홀로그램 기술에 저희 도깨비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환상 주술을 더해 보았죠.”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니 탈해가 말을 이었다.
“바다가 마음에 차지 않으신다면 다른 풍경도 가능합니다.”
파팟!
그 말과 동시에 이번에는 신록이 싱그러운 숲속으로 변했다.
보기 좋게 자란 나무들이 울창하게 드리우자 이번에는 부드러운 산바람과 풀냄새가 선명하게 코끝에 번졌다.
“주로 자연 경광이 많습니다만 도시도 있어요. 물론 이런 것도 가능하지요.”
파팟!
그가 또다시 리모콘을 조작하자 이번에는 네온사인이 번쩍번쩍한 번화가의 풍경이 되었고.
파팟!
한 번 더 누르자 마치 유람선에 탄 것처럼 느릿하게 물길을 따라 올라가는 광경이 펼쳐졌다.
“우선 130가지 정도 준비해 보았습니다. 그중 마음에 드시는 화면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우선’과 ‘130가지’가 함께 쓰여도 되는 조합인가?
상상 이상으로 많은 가짓수에 당황하는 날 보며 탈해가 의욕적인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얼마 전 정보 수집용 드론을 한반도 전역으로 띄웠습니다. 혹시 바라시는 풍경이 있다면 수일 내로 추가 가능합니다.”
그러더니 또 조금은 아쉽다는 어조로 덧붙였다.
“한데 화성탐사선은 생각보다 조립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화성 체험의 완성까지는 약 석 달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왜 한반도에서 바로 화성으로 가?
조선 팔도로도 충분한데 굳이 우주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내가 또 언제 화성 체험을 해보겠나 싶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 끝내주는 친구들이라니까.”
옆에서 듣던 그림 리퍼가 콧김을 불었다.
“그저께 태워준 태권도 로봇도 아주 굉장했거든!”
……태권도 로봇은 또 뭐지?
얘기를 들으니 정자보다도 그쪽이 몹시 궁금해졌지만, 로봇 하인들이 설치한 그릴에서 어느새 맛있는 냄새가 풍겨 왔다.
우선은 로봇들이 구워주는 바베큐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직 북유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할 용기는 없으나 그동안 그림 리퍼가 저승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듯 보여 다행스러웠다.
“근데 너 머리는 왜 그 꼴이냐?”
한편 팔짱을 낀 호구별성이 강림 형을 보며 시비를 걸었다.
“막내야, 집에 왔다고 군기 빠졌어?”
늘 말끔하기만 했던 막내 차사의 머리가 흐트러진 것을 새 으뜸차사는 놓치지 않았다.
형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그녀를 흘겼는데, 그래도 조금 신경 쓰이기는 하는지 느릿하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다만 머리칼은 더 이상 고정되지 못하고 형의 손길을 따라 다시 자연스럽게 흘러내릴 뿐이었다.
“근데 저는 그 머리가 더 보기 좋은 것 같아요, 형.”
그런 형을 보며 툭 말했다.
“뭔가 좀 더 편안해 보인다고 할까…….”
머리든 옷차림이든 항상 반듯하게 각을 잡는 것이 형답긴 하지만, 그래서인지 조금 풀어진 모습을 보자 나까지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내 말에 형은 드물게도 살짝 순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왕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더는 정리할 생각이 없다는 듯 그가 머리를 넘기던 손을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흐음…….”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구별성이 팔짱 낀 그대로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막내 주제에 너무 노티 나긴 했어, 그 머리는.”
머리가 흐트러졌다고 놀리긴 했지만 역시 그녀의 눈에도 이쪽이 더 나은 모양이었다.
그러자 형이 짙푸른 눈으로 호구별성을 쏘아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놈 보라고 한 게 아니니 신경 꺼라, 흉물.”
“염병! 지멋대로 내 눈에 띄어놓고 비싸게 구네!”
두 차사가 또 티격태격하는 사이 로봇 하인들의 솜씨 하에 바베큐는 먹음직스럽게 익어 갔다.
보기 좋게 익은 고깃덩이를 내 몫의 접시 위에 올리며 정자에 앉으려는데.
-멍멍멍!
이번에는 가슴에서 예고 없이 하얀 털뭉치가 튀어나왔다.
-멍멍! 멍멍멍!
여느 때와 달리 몹시 흥분해 보이는 멍군이었다.
네 발로 땅을 딛고 선 멍군이 수세미처럼 거칠게 털을 세웠다.
‘거짓말.’
‘죽음.’
업경을 통해 살벌한 뜻을 내비치면서.
“앗……!”
그제야 약속을 떠올린 내게 화가 잔뜩 난 멍군이 성난 벌처럼 꼬리를 붕붕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거짓말!’
‘죽음!’
그 순간 오래전 날 물었던 그 삽살개가 떠올라 몸이 굳었다.
분노가 담긴 마음의 소리와 함께 징악의 신수가 품은 이빨이 무자비하게 내 나를 물어뜯었다.
내내 잊고 있던 통증이 상기되어 눈을 질끈 감았는데, 어째선지 아프지 않았다.
조심스레 눈을 떠 보니 멍군이 물어뜯는 건 내가 아니라 내 옷자락뿐이었다.
“아…… 멍군, 미안해! 지금 구워줄게!”
멍군은 한참 내 옷자락을 물어뜯으며 분노했다.
나는 결국 거짓말쟁이를 응징하려는 징악의 신수를 질질 끌고 그릴에 손수 고구마를 올리고서야 훈방되었다.
……까먹어서 미안해.
그래도 한 번 봐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