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herited the throne of the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276
80장. 수문(水門)(1)
입동(立冬)을 앞둔 한반도는 해가 부쩍 짧아졌다.
커다란 창 너머로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탑주들과의 결전을 마음먹은 지 꼬박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더 쉬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창밖을 바라보던 때 불현듯 강림 형이 말을 걸었다.
“하늘에서도 줄곧 편히 쉬질 못하셨지요.”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이 나를 담았다.
“어차피 하룻밤으로 끝날 싸움입니다. 꼭 오늘 나서야 하실 이유는 없으십니다.”
해가 지면 곧바로 적탑을 치겠다는 결정이 형은 못내 신경 쓰이는 듯했다.
“그 몸은 인간의 것처럼 피로가 쉽게 쌓입니다. 부디 무리하지 마십시오.”
충언을 이어가던 형이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노괴와 역병처럼 낮에 눈을 붙이신 것도 아니시잖습니까.”
지난밤 삼신이 불러온 용신들과 천신들을 맞이하고 곧장 신화전을 대비한 전략을 나눴다.
대강의 전술이 완성되었을 때는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그 뒤로 계속 휴식을 가졌지만 형은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에요, 형. 저도 한참 잤어요. 긴장이 풀려서인지 졸리더라고요.”
나는 형의 염려에 고개를 저으며 웃어 보였다.
“주무시지 못한 것을 압니다.”
그러나 형은 도리어 얼굴을 굳혔다.
“제가 대왕님께서 주무시는지 안 주무시는지 구분하지 못할 리 없지 않습니까.”
돌아오는 대꾸에 나는 무어라 더하지 못하고 형을 바라보았다.
50년 가까이 한방에서 지냈으니 형은 내 숨소리만 들어도 내가 깨어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터였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는 대신 일부러 장난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러면 형도 계속 깨어 있었다는 말인데요. 제가 분명 차사들한테 꼭 쉬어야 한다고 했는데도.”
형이 내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쪽으로 말을 돌렸더니, 형의 곧은 눈썹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농담처럼 덧붙였다.
“아, 아니면 혹시 형이 더 쉬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
놀리듯이 물은 말에 형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문득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 제가 더 쉬고 싶습니다. 대왕님.”
차분하게 나를 바라보는 눈에 나는 순간 낭패감을 느꼈다.
“그러니 하룻밤 더 쉬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생각지 못한 역공에 그저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형은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짙푸른 눈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이 평소보다 무섭게 느껴져서 나는 형의 눈을 피해 조금 고개를 돌렸다.
“……죄송해요, 형.”
시선을 피해버리자 나도 모르게 억눌렀던 말이 흘러나왔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도, 그런데도 저는 아직 이런 식으로 높은 곳에 서서 인간에게 칼을 휘두르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잔뜩 억눌렀던 말을 내뱉고 나서야 그것이 어리광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 잠시라도 쉬면 완전히 멈춰버릴 것 같아요.”
하늘에서부터 땅까지 나를 몰아세웠던 일련의 설계에 대한 토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결국 내 힘이 모자라서라는 벽하원군의 말을 부정할 수 없어서 혼자 삭이려고 했던 분노이기도 했다.
그것을 형에게 들켜버리자 창피함이 피어올랐다.
무엇보다, 내가 이런 말을 한들 그는 인간을 당연하게 내려다보는 존재라는 게 견디기 어려웠다.
-저는 당신의 눈이…… 인간을 향해 있을 때가 두렵습니다.
형은 이미 내게 수차례 그런 우려를 내비쳐 왔으니까.
적어도 형에게는 이런 식으로 인간의 머리 위에 군림하기 싫다는 나의 마음이 결코 탐탁지 않을 터였다.
나는 그것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
내가 일방적으로 시선을 피하고도 형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 옆을 떠나지도 않고 그저 같은 자리에서 곧게 서있을 뿐이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의 눈이 내게 고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더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저 형의 숨소리에만 신경을 곤두세울 때였다.
“급하게 저승을 나서는 바람에 철상지옥의 씨앗을 심지 못하였군요.”
한참 만에 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가실 때는 보다 큰 힘을 손에 쥐셨을 테니, 어쩌면 저승의 지옥수들도 훌쩍 자라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뜻밖의 말에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형을 돌아보았다.
“저승의 하늘까지 곧게 가지를 뻗은 지옥수들이 보고 싶습니다, 대왕님.”
눈이 마주치자 형은 더 말을 잇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저 무언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듯한 눈빛에 나는 문득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진 우리가 몇 번이고 부딪친 끝에 형이 내게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우주의 시간이 하나라면, 저의 뿌리도 영원히 당신과 똑같은 인간에 머물러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때 그렇게 말해주었던 것처럼.
신과 인간, 서로 다른 마음을 가졌음에도 그는 지금 이 순간 내게 신의 마음을 강요하긴커녕 외려 내가 가진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 이기면 인간을 신에게 복속시킬 수 있다는 것과는 하등 관계없이, 그저 우리 형제가 항상 그리워하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설령 이것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길일지라도 내가 이대로 한반도의 신화를 완성한다는 것은 형에게 그런 의미라고.
그것은 이미 천 년도 전에 인간의 마음을 잘라내었던 신의 인간을 위한 노력이었다.
형은 인간의 마음으로 망설이는 내게 그 마음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마음에 맞춰 싸움에서 이겨야 할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 뜻을 아는 이상 나는 형에게 마냥 싸우기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네.”
형과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돌아가면 같이 철상이부터 심어요, 형.”
천계에서처럼 즐거운 웃음은 결국 나오지 않았지만, 형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해가 완전히 저문 후.
나는 차사들과 두 도사를 데리고 적탑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우리가 먼저 적탑주와 신화전을 치르면 삼신과 다른 신들이 공개적으로 천부인을 치는 순서였다.
그리 계획한 것은 이 싸움이 정말로 인간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싸움이기 때문이었다.
삼신이 맡을 천부인은 전설의 비호를 하나도 받지 않는 상태였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순식간에 정리할 수 있으니, 적탑주를 쓰러트린 후 인간들에게는 그야말로 찰나에 이루어진 신의 심판만 연출하겠다는 뜻이었다.
“적탑은 여기서 멀지 않군요.”
태블릿 PC로 지도를 확인한 탈해가 말했다.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할 만한 길도 있고, 전초기지로는 썩 괜찮은 곳입니다.”
아마 단군이 그것까지 감안해서 준비한 공간이었을 테니 기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나는 새삼 탈해가 이 싸움의 내막을 자세히 모른다는 것을 실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리퍼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거죠?”
길을 확인하는 탈해에게 다른 말을 꺼냈다.
“네, 혹시나 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북유럽에서 소멸했음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반도에서 다시 깨어났던 그림 리퍼.
그는 저승에 머물면서 신을 깨우는 자들에 대해 따로 조사하던 중이었다.
우리가 천계에 다녀오는 사이에도 그는 여러 차례 이승과 저승을 오고 가며 정체불명의 자들을 추적하는 중이었는데, 보름 전에 나간 후로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원래도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는 연락이 없다가 돌아오곤 했습니다. 어쩌면 이번이 유독 오래 걸리는 것일지 모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내 표정이 어두워졌는지 탈해가 말을 덧붙였다.
“어쩌면 무언가 큰 실마리를 찾은 것일지도 모르지요.”
“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는 탈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나 당장은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할망이 말했던 뭔지 모를 외국 놈들 전설은 이번에 밝혀지겠지?”
나와 탈해의 대화를 지켜보던 호구별성이 끼어들었다.
“이번에 적탑이랑 연합한 게 고구려, 백탑, 청탑, 황탑이잖아. 얘들 빼면 이제 하나 남는 거고.”
그녀가 치켜세운 검지를 흔들었다.
“사실상 황탑 하나만 확인하면 되네.”
“그러네요. 만약 황탑이 한반도의 전설이라면 자동적으로 미륵의 궁예가 외국의 전설을 가진 게 되겠죠.”
한반도의 전설은 모두 10개.
그리고 천부인의 단군을 포함하여 한반도를 나눠 가진 전설급 각성자는 9명이었다.
한데 나와 삼신 또한 각각 한반도의 전설을 가졌으니, 남는 전설은 8개뿐.
즉 한반도를 차지한 각성자들 중에 최소 한 명은 외국의 전설을 가졌다는 뜻이 된다.
만약 미륵의 궁예가 외국의 전설을 가졌다면 나는 이번 싸움으로 삼신의 것을 제외한 모든 한반도의 전설을 얻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우선 고구려를 상대하게 될 것입니다.”
문득 뒤쪽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도를 한다고 줄곧 작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단군이었다.
여느 때처럼 초연하고 단정한 얼굴의 그가 내 옆에 와서 섰다.
“…….”
나는 그를 돌아보며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정확히 어떤 기분이라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들었다.
그가 짜낸 판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 때마다 그것을 만들어낸 게 결국 나라는 것마저 상기하는 탓이었다.
“나머지 탑들의 순서는 고구려를 상대한 후에 정해지겠지요.”
그러한 감정을 끝내 숨기지 못하는데도 단군은 여상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적탑주는 뛰어난 설계자이니 시시각각 필드의 인과를 바꾸는 식으로 나올 겁니다.”
태연히 고구려와 적탑을 입에 담는 그를 맞대하자 불쑥 대나무숲에서 마주쳤던 주몽이 떠올랐다.
-적탑주와 무언가를 꾸미고 있습니까?
-도혁이한테 도영이가 많이 섭섭해한다고 전해줘요. 직접 하자니 걔가 나는 끝까지 안 만나줄 것 같아서.
주몽은 그때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겠지.
그럼 이대로 적탑을 치면 최전방에서 나와 단군을 기다리는 주몽과 맞닥뜨리게 되는 걸까.
천계에서 잠시 호흡을 맞췄던 그가 떠오르자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신화전에서 있었던 잠깐의 협력만으로 그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 꺼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미래를 내다보는 도사들이 자기들끼리만 그것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게 불쾌했다.
“그때 주몽이 적탑주가 많이 섭섭해한다고 전해달라고 했는데, 제대로 전할 걸 그랬군요. 콩가루 집안이 기어이 한반도를 뒤집어 놓을 줄이야.”
그 불쾌감에 나도 모르게 비꼬는 말을 내뱉었을 때였다.
“…….”
나를 돌아본 단군이 그 순간 뜻밖에도 살짝 눈을 휘었다.
“뭐, 저를 빼놓고 두 분이서만 대화방을 따로 만들었을 때부터 예견했던 일이지요.”
뻔뻔스럽게 돌아오는 농담에 일순 할 말을 잃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말을 내뱉고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혹은 정해진 결말에 다다르는 동안 이미 미움을 받는 것에 이골이 나버린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어쩔 수 없이 그에게 가질 수밖에 없는 양가감정이 다시금 신물처럼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