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herited the throne of the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277
80장. 수문(水門)(2)
“그래서 고놈들이 물을 쓴단 말이지?”
배웅을 나온 서해 용왕이 성난 구름처럼 하얀 수염을 떨며 말했다.
“우리가 나서면 물의 지배자가 누군지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데 말이야!”
제일 처음으로 상대할 전설이 강의 신 하백이라는 말에 호승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뭐, 초장부터 전력을 다 드러낼 필요는 없지.”
옆에 동해 용왕이 가볍게 서해 용왕의 말을 끊어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무리하지만 말게, 염라.”
이어지는 염려에 나는 그저 멋쩍게 웃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시오, 염라!
그때 용왕들 사이에서 앳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허공 위 비눗방울처럼 반짝이는 물방울 속을 둥둥 떠다니는 고등어였다.
바늘로 찔러도 터지지 않는 방울은 자기도 염라를 보고 싶다며 따라온 막내를 위해 서해 용왕이 걸어준 주술이었다.
-나쁜 사람들을 벌해주어야지!
순진하게 외친 왕자가 고양된 것처럼 꼬리를 흔들었다.
영원히 어린 아이로 남은 내 작은 친구의 눈에는 내가 악인을 벌하러 가는 정의의 용사 정도로 비치는 모양이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왕자가 통통 몸을 굴리는 물방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었다.
“하늘도 바다도 너를 비호하고 있음을 있지 말거라.”
용왕들의 옆에서 팔짱을 낀 자청비가 말을 보탰다.
옆에는 그녀의 남편 문도령도 함께였다.
하늘과 땅의 시간이 어긋났음에도 천신들이 제때 내려올 수 있던 것은 바리공주가 길을 열어준 덕이라고 했다.
하늘과 땅의 문을 연결한 그녀의 주술이 시간까지 맞물리도록 이어준 것이었다.
그에 나는 삼신과 단군의 계획에 바리공주 또한 함께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천기를 정확하게 읽는다는 두 신과 한 도사는 오래전부터 오늘을 봐 왔던 것이다.
“그럼 이제 가보겠습니다.”
복잡한 심경을 억누르며 마중을 나온 용신들과 천신들을 돌아보며 인사했다.
염라의 탈을 쓴 삼신은 나오지 않은 채였지만 굳이 부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 밤이 지나면 뜻을 이룬 그녀와 다시 마주해야 했다.
이 싸움이 끝나면 나는 이제 저들과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신화의 주인이 된다.
다시 한번 그것을 실감하며 일행들과 함께 적탑으로 향했다.
***
남방의 전설 적탑은 한강의 남쪽에 자리했다.
천부인에서 머지않은 위치인 것은 사실상 적탑과 천부인이 한데 엮여 있기 때문이겠지.
“이야, 입동이 코앞인데 장미가 폈네.”
적탑의 성역을 돌아보며 호구별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겨울의 문턱이었음에도 적탑의 성역에는 늦봄처럼 온난한 바람이 불어왔다.
곳곳에 핀 붉은 장미는 이곳이 적탑주의 가호를 받음을 방증하고 있었다.
모든 구성원이 붉게 물들인 머리에 검은 마스크를 쓰는 차림새.
거기에 사시사철 성역을 에워싼 가시덤불과 장미는 적탑만의 상징이었다.
화기를 다루는 남방의 전설로 언제든 장미가 만개하는 계절에 멈춰 있는 적탑의 성역은 신자들의 환심을 사기 충분했다.
“겉보기에는 평범하군.”
성역의 중앙에 선 붉은 탑을 올려다보며 사라가 한마디 했다.
적탑의 탑주가 머무는 ‘적탑’이었다.
탑의 꼭대기에서 적탑주는 한창 신화전의 필드를 설계하고 있을 것이다.
“탑의 존재 자체가 방진을 짜고 있습니다.”
앞에 나선 단군이 차분히 설명했다.
“저 앞에 일반적으로는 볼 수 없는 관문이 있지요. 넘는 순간 적탑의 진이 발동되면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공간에 서게 될 겁니다.”
“음, 근데 저 방진은 너도 같이 짠 거 아냐?”
설명을 듣던 호구별성이 불쑥 눈썹을 굽히며 끼어들었다.
“어차피 저 탑은 너네 둘이 같이 세웠잖아.”
그의 두 번째 신분이 적탑의 부탑주였던 것을 새삼 상기한 듯했다.
“네, 맞습니다.”
호구별성의 말에 단군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탑에 접근할 때 발동될 장치들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파훼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적탑주도 그것을 감안하고 있을 테니 큰 의미는 없겠지만요.”
그가 붉은 탑을 훑으며 문자를 흘렸다.
“몇 가지 장치를 파훼하면 곧바로 신화전의 필드가 전개될 것입니다.”
그는 바로 방진을 파훼할 셈인지 앞으로 나섰다.
흘리던 문자들은 일순 더 강한 빛을 발하며 회오리처럼 휘몰아쳤다.
나는 방진을 파훼하는 그를 지켜보며 언젠가 내 앞에 섰던 적탑주를 생각했다.
-나는 그가 왜 당신을 원하는지 알아요, 염라.
-권선과 징악의 신인 당신이 내리는 벌은 결국 신의 뜻이 될 테니까요. 인간은 그것에 감히 의문을 표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나는 당신과 그 남자가 손잡은 세상이 오는 게 무서워요.
그녀는 여전히 청탑주와 단군의 속내를 구분하지 못하는 채로 단군에게 맞서는 것일까.
-왜 적탑주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은 건가요?
-제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그분은 이미 우주의 뜻을 정확히 보실 수 있는 도사입니다.
아니면 그때 단군이 했던 말처럼 이제 또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일까.
-이름이 뭡니까.
-그건 왜 묻는 거죠?
그녀가 떠오르자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가 곱씹혔다.
-잊지 않으려고. 신을 미워하는 인간의 얼굴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려고.
그녀가 나와 같은 얼굴을 했었다는 것이.
또한 우리가 지금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지에 대한 단상이.
“방진이 완전히 파훼되었어요.”
앞에선 단군을 지켜보던 바리가 말했다.
“이대로 들어가도 될 것 같아요, 오빠.”
바리의 말에 강림 형이 서늘한 눈으로 적탑을 훑으며 앞에 나섰다.
“앞장서겠습니다, 대왕님.”
너른 등으로 내 앞에 선 그가 성큼 발을 내디뎠다.
곧바로 신화전에 돌입하게 될 것이라는 말에 날 염려하는 것이다.
나는 머릿속을 채운 상념들을 억지로 몰아내며 그를 따라나섰다.
몇 걸음 내딛자 단군이 말했던 대로 신화전을 알리는 팝업창이 떴다.
동시에 높게 솟아 있던 붉은 탑이 녹아내리며 한순간 주위가 크게 흔들렸다.
필드가 전개되면서 공간이 완전히 뒤바뀌고 있었다.
“일단은 아무것도 없구나.”
주변을 돌아보며 사라가 건조하게 말했다.
“가뭄에 바닥을 드러낸 강 같아.”
그의 말대로 사방은 풀 한 포기 없이 메마른 땅뿐이었다.
공간을 전개한 전설이 강의 신 하백의 힘인 것을 생각하면 꽤나 이질적이었다.
물을 다룰 수 있으니 오히려 당장은 물을 완전히 감춘 것일 수도 있겠지만.
[ ‘역천(逆天)1’에 입장하셨습니다!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전설’입니다.
“염병하네, 역천이라니.”
필드를 알리는 팝업창에 호구별성이 코웃음을 쳤다.
불경한 자들에게 병을 내리던 역신은 도사들의 오만을 비웃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엉망진창으로 굴러가게 내버려 둬야 해요.
내 눈길을 잡아끌었던 그녀의 얼굴이 계속해서 되새겨졌기 때문이었다.
“신화전의 필드를 열어주십시오, 염라.”
자꾸만 잡념에 사로잡히려는 때 단군이 내게 말을 걸었다.
“필드를 전개할 신앙과 카르마 포인트는 각각 백만 정도면 되겠군요.”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나는 그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물론 보통의 상황에 신앙과 카르마 포인트 백만은 적지 않은 자원이었다.
하나 상대가 수년간 한반도에 군림했던 전설들인 것을 생각하면 백만은 그다지 충분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적탑주가 설계한 신화전은 한 번이 아닙니다. 다섯 개의 전설이 각각 하나씩 필드를 전개하여 다섯 번의 신화전을 치르는 형태니까요.”
내 반문에 단군이 설명을 덧붙였다.
“고구려와의 첫 번째 신화전에서 승리하면 그들이 필드를 전개한 자원을 새로이 얻게 됩니다. 그때 다시 자원을 더하면 됩니다.”
요컨대 우리의 자원을 투입하는 대신 상대에게서 빼앗은 자원을 쓰겠다는 뜻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되지만 혹시 신화전에서 고전하게 되면 이쪽의 필드를 폭파시키고 재도전할 수 있으니까요.”
그가 자원을 비축하는 이유를 마저 설명했다.
필드를 폭파시키는 것은 신화전에서 승산이 보이지 않을 때 쓰는 최후의 전략이었다.
신화전에서 패배하기 전에 필드를 폭파시키면 필드를 전개한 자원은 모두 잃게 된다.
하나 그렇게 되면 적어도 신화전의 패배로 상대에게 자원을 빼앗기지는 않게 된다.
그러니 패배하기 전에 자원을 폭파시켜서 상대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일만은 없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백만 포인트로 필드를 전개하겠습니다.”
나는 단군의 지시에 따라 필드를 전개했다.
“저와 단군에게 설계자 권한을 넘겨주시면 적절한 법칙을 만들게요.”
지켜보던 바리가 조용히 말을 보탰다.
한반도 최고 수준의 도사들이라면 백만의 자원으로도 충분히 실용적인 법칙을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적탑주가 굳이 신화전을 여러 번 치르도록 그걸 견제한 것일 테지만요.”
바리가 단군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번 신화전은 거대하고 정교한 법칙을 설계하는 것보다는 최대한 빨리 효율적인 법칙을 만들어 쓰는 것이 중요할 거예요.”
“그래, 그렇겠네.”
나는 바리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신화전에서는 효과가 크고 복잡한 법칙일수록 완성되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해서 청탑주와의 신화전에서 주몽은 미리 여러 법칙을 만들어서 지니고 다니기도 했다.
다만 그런 식으로 미리 법칙을 만든다 한들 신화전이 끝나면 그 법칙은 다시 쓸 수 없게 된다.
그 때문에 적탑주는 신화전을 여러 번 치르는 형태로 작전을 짠 것이다.
한반도 최고 수준의 설계자인 단군과 바리가 미리 법칙을 만들어 봤자, 신화전이 한 번 끝나고 나면 법칙들은 전부 무용지물이 되니까.
반면에 적탑주와 도사들은 우리를 불러들인 필드를 오래전부터 구상해 왔을 테니,
단지 신화전을 여러 번으로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효율적인 전략이었다.
[ ‘염라’ 필드가 생성되었습니다!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전설’입니다.
나는 백만의 자원을 들여 필드를 전개했다.
“에잉, 뭐야. 우리 쪽은 너무 심플한데?”
팝업창을 확인한 호구별성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쟤네도 역천이라 짓는데 우리도 뭐, 지옥에서 올라온 대마왕님 이런 거 해도 됐잖아?”
“가치 없는 헛소리니 귀를 기울이실 필요 없습니다, 대왕님.”
호구별성의 실없는 농담에 강림 형이 한심하다는 듯이 눈을 흘겼다.
[ (!) 두 필드의 법칙이 충돌합니다. ] [ (!) 법칙의 충돌로 신화전이 발발합니다. ]필드가 전개되자 신화전을 알리는 팝업창이 떴다.
[ ‘역천(逆天)1’이 당신을 적대시합니다!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전설’입니다.
– 승리 조건 : 동명성왕 승전(勝戰)
“염병, 진짜로 동명성왕 타령이네.”
상대의 승리조건을 확인한 호구별성이 어처구니없어했다.
“단군 저놈보다 주몽 그놈이 더 컨셉에 진심이구만!”
네 번째 천벌 때도 주몽이 고구려의 기병과 꼭 닮은 병사를 소환했던 것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쏴아아!
한데 그때였다.
쏴아아아아!
어딘가에서 귀청을 때리는 세찬 물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해일이다!”
사라가 눈을 크게 뜨며 앞쪽을 가리켰다.
“와씨, 저게 뭐야!”
그를 따라 돌아본 호구별성이 경악하며 몸을 떨었다.
바싹 메말라 있던 땅이 돌연 먹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검게 물들었다.
집채만큼 높은 해일이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였다.
“미친! 이게 하백이냐, 포세이돈이지!”
호구별성의 외침과 함께 순식간에 시야의 모든 것이 물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