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herited the throne of the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290
82장. 걸음을 멈출 수 없을지니(4)
청탑주를 죽이더라도 그냥 내버려 두겠다고.
나는 순간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단군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는 변함없이 한 점의 흔들림 없이 고요한 얼굴로 나를 마주했다.
“……그를 과거로 보내지 않으면 폭주하는 태초의 기를 막을 수 없잖습니까.”
밟으면 떨어져버릴 게 훤히 보이는 함정이었다.
하나 그것이 발밑을 꺼트릴 함정임을 알면서도 나는 발을 내디뎠다.
낮게 억누른 목소리가 꽤나 거칠게 들끓고 있었지만 그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지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단군이 먼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다 한들 당신께서 그리하시겠다면 저는 결코 당신을 거스르지 않을 겁니다, 염라.”
하얀 코트 자락이 무심하게 나를 스쳐 지나갔다.
시야를 가리는 곧은 뒷모습에 나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꼭 잔잔하던 호수에 돌을 던지고 먼저 등을 돌리는 것만 같았다.
조약돌처럼 가볍게 던져진 그의 말은 바윗덩이가 되어 내 가장 밑바닥에 내리꽂혔다.
폭이 좁아지는 길로 자꾸만 몰아세우는 창을 꺾어버리고 싶단 욕망을, 그는 기어이 물 위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다시 눈을 뜬 이후로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이해하지 않으려 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단군이 이제 와서 왜 그따위 말로 나를 들쑤시는지도 알았다.
-그러니 이제 당신도 나를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정말로 내가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를 원했다.
-그렇다면 제가 대체 언제 저 위에서 내려와야 했습니까.
-7만 명의 목숨과 머지않아 한반도 전역을 덮쳐 올 재앙을 막는 것을 맞바꾸어야 했을 때?
그럼에도 그가 나의 저울에 올린 추는 7만 명의 목숨 같은 끔찍한 대가가 아니라 고작 나 하나의 절망뿐이라는 것이.
나는 그것이 과연 한 줌의 선의인지, 아니면 마지막 한 톨까지 털어낸 악의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 (!) 해당 영역의 카르마가 당신의 카르마에 반응합니다. ]나를 상념에서 건져 올리듯 팝업창이 떴다.
[ ‘역천(逆天)4’에 입장하셨습니다!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전설’입니다.
나는 청탑주의 필드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내 필드를 열었다.
[ ‘염라’ 필드가 생성되었습니다!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전설’입니다.
예정된 싸움을 앞두고 쓸데없는 단상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 (!) 공간의 지배베멋뇬깬뚜흐흐흐이 바뀝니다. ]한데 신화전이 시작된 순간 뜻밖의 팝업창이 뒤따랐다.
– (!) 해당 필드의 등법밖띈긍됩흐흐흐 ‘전설’입니다.
– 승리 조건 : 콩나무 베기
황탑주와의 신화전에서처럼 오류가 섞인 팝업창이었다.
[ ‘신비한 콩을 키우면 – 마당’에 입장하벨곽땍귀룔흐흐흐니다! ]– (!) 해당 던전벨덮됩흐 등급은 ‘영웅담’입베깩됩흐다.
– 클리어 조건 : 콩나무 베기
승리 조건과 클리어 조건이 동시에 뜨는 안내에 일행들도 이상을 감지했다.
청탑주도 황탑주처럼 자신의 필드에 무언가 조화를 부렸을 터였다.
“뭐야, 또 던전이 합쳐진 거야?!”
호구별성이 경계 어린 얼굴로 사방을 돌아봤다.
“풀 냄새가 짙습니다, 대왕님.”
강림 형도 서늘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마른 땅 위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초록색 잎들이 눈에 들어왔다.
보통의 나무와 달리 줄기가 없는 게 꼭 거대한 잔디 같았다.
“나무만큼 커다란 잔디라니…… 혹시 우리가 작아진 건가?”
북유럽에서 겪었던 야른비드르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와 비슷한 잔디밭에 경계를 높이는데 문득 달라진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바리와 호구별성은 소매가 부푼 하얀 블라우스에 앞치마를 두른 긴 치마 차림이었고, 다른 이들도 그와 비슷하게 셔츠에 조끼를 걸친 모습이었다.
“옷 봐봐, 이번에는 웬 양놈들 던전인가 본데?”
한눈에 봐도 한반도의 설화와는 거리가 먼 차림에 호구별성도 한마디 했다.
유럽 어딘가의 전통의상 같은 게, 모두가 모여 있는 모습이 꼭 동화책의 삽화처럼 보였다.
“청탑주는 유럽의 마법을 익혔었죠.”
나는 그녀의 말을 받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콩나무라면 아마 잭과 콩나무겠네요.”
하늘까지 자란 콩나무 이야기니까 나무를 다루는 청탑주와 제법 잘 맞는 설화일지도 몰랐다.
천계에서도 그의 영향으로 토끼발 신수나 켈트 신화의 루 라와더가 나오기도 했으니, 그가 유럽의 던전을 바탕으로 필드를 전개했어도 이상할 것 없었다.
“오빠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바리가 앞쪽을 가리키며 내가 말을 받았다.
“집도 무척 커요. 벌써 콩나무를 타고 거인의 하늘까지 올라온 건가 봐요.”
“엥, 저게 집이라고?!”
바리의 말에 호구별성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그쪽을 올려다보았다.
“진짜네! 너무 커서 집인 것도 못 알아봤어!”
한눈에 전부 담지도 못할 정도로 거대한 그것은 다시 보니 정말 저택이 맞았다.
나는 벽을 따라 시선을 쭉 올리고서야 비로소 창문의 존재를 알아챘다.
끝도 없이 하얗게 솟은 벽 중간에 창틀과 화분걸이가 삐져나와 있었다.
“이야기대로라면 콩나무를 타고 거인의 저택에 올라온 잭이 저기서 여러 가지 보물들을 훔치는 전개일 텐데.”
잭과 콩나무 설화에서 잭은 첫 번째 방문에서 금화와 은화가 들어있는 돈주머니를 훔치고, 두 번째 방문에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훔쳐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의 어머니는 위험하니 더 이상 하늘을 찾지 말라고 하였으나, 그는 기어이 세 번째로 올라와 스스로 노래하는 하프를 훔치다가 거인에게 들키고 만다.
“클리어 조건을 보아 지금은 세 번째 방문인 것 같군요.”
단군이 차분히 문자를 흘리며 말했다.
“하프를 훔쳐 거인을 깨우면 하늘에서 내려가는 전개일 겁니다.”
“그렇겠네요. 잭이 콩나무를 베는 것은 거인이 잭을 따라 콩나무를 타고 내려올 때니까.”
나는 그의 설명에 한숨을 쉬며 저택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저렇게 큰 집이면 들어가는 것부터 쉽지 않겠는데…….”
거인의 저택은 무척 커서 그에 비하면 우리는 주먹만 한 크기였다.
이런 상태로 굳게 닫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할 테니 무언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오빠, 유리창을 통하면 될 것 같아요.”
그때 바리가 저택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말했다.
“저택 전체에 훼손할 수 없는 인과가 깃들어 있는데 유리창만 빼놓았어요. 창이 열려 있거나 아예 창을 깨트려서 들어가면 돼요.”
“흠, 그럼 그냥 벽이나 문을 뚫고 들어갈 수는 없단 거네.”
설명을 들은 호구별성이 미간을 좁히며 창문을 올려다봤다.
“어우, 근데 저기까진 또 어떻게 올라가지? 너무 높잖아.”
“음, 그건 공군의 힘을 빌리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긴 해요.”
나는 그녀에게 대답하며 아직도 공군이 깃든 채인 가슴에 손을 올렸다.
다만 저렇게 높은 곳까지 공군이 여러 차례 우리를 태워줘야 할 것을 생각하니 역시 좀 미안했다.
파아앙!
그래도 공군은 기꺼이 나를 도와줄 생각인지 내가 미처 부르기도 전에 흔쾌히 나와 주었다.
펄럭!
밖으로 나온 공군이 말만 하라는 듯 힘차게 날개를 펄럭일 때였다.
-컹컹컹!
불현듯 뒤쪽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컹컹컹컹!
점차 가까워지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갈색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가 잔디밭 위를 공처럼 통통 튀며 빠르게 다가왔다.
“와씨, 개도 겁나 크잖아!”
깜짝 놀란 호구별성이 개를 올려다보며 독기를 뿜었다.
거인이 키우는 개라서 그런지 아직 어린 강아지인데도 무척이나 컸다.
악의가 보이지 않는 천진한 얼굴이었지만, 기실 공룡만큼이나 거대한 크기만으로도 우리에게는 꽤나 위협적이었다.
“굳이 쓰러트릴 필요까지는 없겠습니다.”
강아지를 올려다본 단군이 말했다.
“저택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이군요. 저택의 거인과 마주칠 때를 위해 최대한 힘을 비축해 두어야 하니 공군이 차례로 올려다 줄 때까지 버티는 게 낫습니다.”
“우선 먼저 올라가시지요, 대왕님.”
그의 말에 강림 형이 곧바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 뒤에 노괴를 올리시면 되겠습니다.”
우선 내가 올라가고 전투력이 부족한 사라를 다음 순서로 데려가라는 뜻이었다.
하나 그렇게 따지자면 사라부터 안전하게 올리는 게 낫지 않나 싶어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사라가 내게 위쪽으로 눈짓했다.
“그리하거라, 대왕. 잠깐 먼저 올라갔다가 하루 종일 저놈한테 군소리 듣기 싫다.”
그렇게 말해오면 사라에게 따로 권할 명분이 없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내 머리 위를 빙빙 도는 공군에게 말했다.
“나를 먼저 창틀에 올려주세요, 공군.”
펄럭!
내 말에 공군이 바로 내 어깨를 잡아채며 날아올랐다.
펄럭!
펄럭!
로켓처럼 순식간에 위로 솟아오른 공군이 눈 깜짝할 사이에 창틀 위를 날았다.
나는 발밑으로 보이는 창틀과 화분걸이를 내려다보며 눈을 끔뻑였다.
화분걸이에는 세 개의 화분이 있었는데 모두 꽃이 피어 있었다.
“일단…… 창은 열려 있고.”
창문이 열려 있으니 무사히 올라오기만 하면 저택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한데 열린 창문 말고도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화분에 벌이 모여 있네.”
화분에 핀 꽃 주위로 꿀을 따는 다섯 마리의 벌.
워낙 모든 것이 크다 보니 꿀벌들도 코끼리만큼이나 커다랬다.
경계할 수밖에 없는 크기에 눈을 가늘게 뜨는데 불쑥 팝업창이 떴다.
[ ‘신비한 콩을 키우면 – 마당’의 숨법멍됩흐진 조건이 발생벴놂땍귀룔흐흐흐니다. ]– 숨겨진 조건 : 꿀벌 일당의 굴복
“숨겨진 조건?”
뜻밖의 안내에 조금 긴장하며 벌들을 더욱 주시했다.
저택에 들어서야만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마당의 강아지 외에도 파수꾼이 있을 법도 했다.
공군이 화분을 향해 활강하자 꽃술에서 한창 꿀을 따던 꿀벌들이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붕붕!
붕붕붕!
벌들은 나와 공군을 인식하자마자 세차게 날개를 움직이며 달려들었다.
펄럭!
갑작스러운 습격에 공군이 활강하던 것을 멈추고 그대로 벌들을 향해 부리를 벌렸다.
파아아-앙!
공군의 부리에서 연녹색 신성이 뿜어져 나왔다.
대포처럼 쏘아진 신성에 모여서 날아들었던 벌들이 마치 스트라이크 당한 볼링핀처럼 튕겨 나갔다.
“우와…….”
단번에 벌들을 날려버리는 위력에 작게 탄성을 질렀다.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신성을 맞은 벌들은 한방에 방향을 잃고 추락해버렸다.
바닥을 뒹구는 벌들을 내려다보며 공군이 기세 좋게 날개를 펄럭였다.
펄럭!
펄럭!
다시 또 벌들이 공격해 올까 싶어 내려가지 않고 공군과 함께 벌들을 살폈다.
하나 공군의 신성만으로도 타격이 컸는지 벌들은 초라하게 날개를 꿈틀거릴 뿐 별다른 반격은 없었다.
“일단 내려가 주세요, 공군. 다들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아요.”
쓰러진 벌들이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아서 우선 공군에게 내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 (!) 꿀벌 일당베냇냈긍룃흐흐흐 당신의 놀라운 힘에 무릎을 꿇습니다. ]다행히 공군이 완전히 제압했음을 인정하는 팝업창이 떴다.
[ (!) ‘신비한 콩을 키우면 – 마당’의 숨법멍됩흐진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 (!) 꿀벌 일베깸땟흐들이 당신을 새로벨님꿨흐 주인으로 모십니다. ]“응? 갑자기?”
한데 이어지는 전개는 여전히 아리송했다.
뜬금없는 전개에 그저 멀뚱히 팝업창을 바라보는데, 쓰러져 있던 꿀벌들이 붕붕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 (!) 꿀벌 일당들벨덱꿨흐 새로 모신 주인의 명령벨덫꿨흐 기다립니다. ]“으으응?”
재차 의미를 알 수 없는 전개에 벌들 앞에서 목덜미를 긁적일 때였다.
“아!”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내 앞으로 모여든 꿀벌들에게 말했다.
“혹시 저 밑에 다른 일행들을 여기로 데려올 수 있나요?”
[ (!) 꿀벌 일당들벨덱꿨흐 새로 모신 주인벨덮됩흐 뜻을 따릅니다. ]추측이 맞았는지 꿀벌들이 곧장 붕붕 날개를 펄럭이며 잔디밭으로 내려갔다.
“아하, 이렇게 다들 창문으로 올라오는 거였구나.”
잠시 뒤 꿀벌을 타고 올라오는 일행들을 맞이하며 던전의 공략법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이 수를 쓰려면 어쨌든 누구 한 명은 꿀벌들 없이 올라와야 하는 거잖아?”
문득 위에 올라와서 꿀벌들을 복속시켜야 꿀벌을 타고 올라올 수 있는 흐름에 의문이 들었으나, 일단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일의 앞뒤가 바뀐 일이야 이미 지겹도록 겪는 것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