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An Adult Game As A Former Hero RAW - Chapter (209)
그러나 문제는 없었다.
그들의 먹이는 도처에 널렸으니.
흡혈귀들은 몸에 박힌 화살을 거칠게 뽑아낸 뒤 생사여부에 관계없이 가까이 있는 인간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꽂고 피를 쪼옥 빨아당겼다.
인간의 몸이 미라처럼 쪼그라지는 것과 동시에 흡혈귀의 몸에 뚫린 구멍이 아물었다.
그 귀하다는 최상급 포션을 사용했을 때나 볼 수 있는 광경.
바로 이것이 지금껏 흡혈귀가 박멸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비결이다.
물론 원래는 흡혈의 치유 효과가 이 정도까지 뛰어나지는 않다. 그랬다면 대륙은 진작 흡혈귀들의 세상이 되었을 터였다.
현재 평범한 흡혈귀조차 저런 기예를 보여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검은 태양’ 덕분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흡혈귀를 상대하는 인간들은 알지 못했다.
“씨이발 저게 뭐야!?”
“몸에 구멍이 나도 바로 낫잖아? 저딴 걸 어떻게 상대해!”
흡혈귀들의 비상식적인 치유력을 목격한 병사들 사이에 동요가 퍼져나갔다. 그들 모두 정예 병사인 만큼 진형을 이탈하거나 하는 자는 없었으나 꺾여버린 사기는 어쩔 수 없었다.
다가온 흡혈귀들과의 충돌에서 그들의 진형은 너무나 쉽게 뚫리고 말았다.
진형이 뚫리고 벌어진 건 인간과 흡혈귀가 뒤섞인 난전이었다.
“하하하! 인간 놈들, 이렇게 마주해보니 산짐승과 다를 바 없구나! 물렁하고 약해빠졌”
서걱.
병사 하나를 반으로 찢어 죽인 흡혈귀의 목이 젠킨슨의 은검에 베어졌다. 은검에 베어진 흡혈귀의 목 단면은 치이익거리며 타들어갔다.
젠킨슨은 가까이 있는 흡혈귀 셋을 더 베어버린 후 전황을 살폈다. 인간과 흡혈귀가 뒤섞인 난전. 언뜻 보면 엇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제국 측이 열세였다.
‘병력 차이가 너무 심해.’
병사와 흡혈귀 사이의 기량 차이가 심각하게 크다.
그나마 페르디아크 가문의 가주나 기사, 그리고 성직자들이 한 사람 이상의 몫을 해서 아슬아슬하게나마 전선이 유지되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병사는 줄어들어 제국 측은 수적으로 열세에 빠질 것이다.
인간들은 지치는데 반해 흡혈귀들은 난전 속에서도 피를 마시며 체력을 온존 할 것이다.
이대로 가면 전투는 필패다.
전투가 이대로만 흐른다면 말이다.
‘역전을 위해 버텨야 한다.’
흡혈귀 쪽에 검은 태양이 있다면 제국에도 비장의 수단이 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예부터 제국에서 준비해둔 안배가 있네. 내가 직접 가야만 작동하는 거지. 작동시키는 것에 성공한다면 불리한 전황은 단숨에 역전될 걸세.
확신이 담긴 황제의 말.
정확한 내막은 몰랐지만 젠킨슨을 비롯한 다른 귀족들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고, 그 안배가 작동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흡혈귀들과 싸우고 있었다.
‘폐하 부디 빨리 작동시켜 주시길.’
젠킨슨은 그리 기도하며 자신의 부관을 해치려던 흡혈귀를 베었다.
“이쪽일세!”
황제와 그의 정예 기사들은 황궁의 복도를 전력질주했다. 밖에서 버티고 있을 병사들을 생각하면 조금도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다행히 황궁에까지는 흡혈귀의 마수가 닿지 않았다. 그들은 금세 황제의 침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황제는 고급스러운 침대 옆, 벽에 달린 촛대를 잡더니 오른쪽으로 돌렸다.
끼기기기긱.
벽에 실금이 생겨나더니 그대로 분리되어 아래로 내려갔다.
벽 너머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생겨났다.
기사들은 눈을 크게 뜨며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쳐다봤다. 설마 황제의 침소에 이런 장치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감탄할 시간 없네. 어서 내려가세.”
“아, 예!”
황제와 기사들은 계단을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간 끝에야 기다란 복도가 드러났다. 황제는 기사들과 함께 달리며 생각했다.
‘이 일이 끝나면 이놈들부터 죽여야겠군.’
이 안배의 존재는 대대로 황제에게만 전해지는 극비 중의 극비이다. 존재 유무가 알려진 것은 차치하더라도 정확한 위치까지 알려져서는 안 됐다.
‘게다가 어쩌면 다른 이들마저 숙청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흡혈귀들과의 치열한 전투가 끝나면 각 가문들의 전력이 약화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근래 귀족들의 세력이 늘어나기만 해서 걱정이었는데 마침 잘 되었다. 이참에 필요 없는 것들은 전부 숙청해버려야지.
황제는 제국에 전해진 안배의 힘을 믿었다. 그렇기에 제국이 패배하는 미래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 소동이 끝난 후의 처신을 떠올리며 뛰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안배의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성인 남성의 허리까지 오는 높이의 흑요석 받침대와 그 받침대와 연결된 흑요석 잔.
이 잔에 황실의 피를 넣으면 안배는 작동된다.
손에 상처를 내려던 황제는 검을 뽑으려다가 멈췄다. 그의 검은 절삭력이 너무 뛰어나서 실수했다간 손바닥 채로 잘리는 수가 있다.
“이보게, 혹시 단검 있…?”
단검을 빌리기 위해 등을 돌린 황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그를 따라와야 했을 기사들이 없었다.
“이게 그 안배니 뭐니 하는 거야?”
“..!”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황제가 굳었다.
‘기척을 못 느꼈다.’
황제에게 들키지 않고 그의 뒤를 잡았다. 황제보다 적어도 몇 수는 앞선다는 이야기였다. 아마 그를 따라오던 기사들도 모두 저 자에게 당했겠지. 기사들이 모두 당했을 정도의 실력자라면 황제가 싸워 이길 가능성은 없다.
그나마 있는 가능성은 회유.
황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대는 누구지?”
“무엄하다면서 다짜고짜 덤벼들 줄 알았더니 아니네? 황제는 황제라 이건가? 잔머리가 잘 돌아가.”
“…이 목소리, 들어본 적 있군.”
“이제야 떠올린 거야? 잊은 줄 알고 서운할 뻔했다고.”
기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배신했지?”
“이 상황에서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야? 목숨 구걸 같은 건 안 해?”
“따로 원하는 게 있었나?”
“이 아저씨 이거, 남 말은 안 듣는 성격이네. 하긴 자기가 대륙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니 아랫것들의 말 따위는 들을 필요도 없었겠다. 그치?”
“…”
“그래, 왜 배신했냐고 물었었지? 그야 당연히 좆같으니까.”
퍽!
기스가 황제의 등을 힘껏 걷어찼다. 앞으로 날아간 황제가 바닥을 뒹굴었다. 황제는 몸을 돌리며 검을 위로 휘둘렀다. 기스는 검을 붙잡았다. 그가 힘을 주자 검에 금이 가더니 그대로 박살났다.
자신의 검이 쉽게 박살난 걸 보고 황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한심한 꼴을 보며 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같이 뭣도 아닌 새끼들이 상전이랍시고 꺼드럭대는 꼴을 보느라 좆같아 죽는 줄 알았다고. 니들이 근엄한 목소리로 어험, 어험 거리면서 명령 투로 말할 때마다 얼마나 빡치던지.”
생각만 해도 다시 열이 뻗치는지 기스는 황제를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끄헉. 컥! 커헉!”
“이것 봐. 명색이 황제라는 양반이 지금은 아무것도 못하잖아.”
처음에는 저항하던 황제가 어느 순간부터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기스는 밟는 것을 멈추고 황제의 머리카락을 잡아 그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니 새끼나 니 주변 새끼들이나 그동안 꺼드럭댈 수 있었던 건 모두 프릴리테, 싸가지 없는 년 덕분이야. 그년이 니들을 비호해줘서 못 건드린 거라고. 그런데 지금은 그년이 없네? 이러면 배신할 수밖에 없잖아! 안 그래?!”
“쿨럭…”
“지금 기분이 어때? 천한 놈이라고 무시하던 놈한테 밟힌 기분은? 역모의 저지를 바로 눈앞에 두고 실패하는 기분은?”
“끄흐윽…”
“병신 같은 신음만 내지 말고 반응을 해! 기분이 어떠냐고!!”
기스의 고함에 공동이 쩌렁쩌렁 울렸다. 황제는 힘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사…”
“사?”
“살려…”
“에라이, 시발.”
기스는 황제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분노와 희열이 담겼던 그의 얼굴에는 이젠 실망감만이 가득했다.
“재미없는 새끼… 이딴 것도 황제랍시고 비호하다니, 프릴리테 그 년도 대가리에 든 게 없는 년이었어.”
“제, 제발…”
간절한 목소리로 비는 황제를 보며 기스가 한숨 쉬었다.
“살고 싶어? 그럼 내 질문에 답해봐. 실은 내가 여기까지 오는 길에 황궁을 슬쩍 둘러봤거든? 근데 여자가 하나도 없더라? 황후는 물론 시녀들조차 없었다고. 내 생각에는 이거 자기들끼리 비밀 장소에 숨은 것 같은데… 맞지?”
“으…아…”
“야, 야. 아직 뒤지지 마. 뒤져도 그년들 어디에 있는지 말한 뒤에 뒤져. 특히 네 아내, 황후. 그년만 찾게 도와주면 어머니께 부탁해서 노예로나마 살려줄게.”
“내… 아내..?”
“그래. 시발, 볼 때마다 얼마나 꼴리던지. 아닌 척 참느라 고생했다니까? 그러니까 어서 말해봐. 말하면 살려줄게. 진짜로.”
“…여.”
“조?”
“염병하네… 천한 놈…”
카악 퉷.
황제는 피 섞인 침을 기스의 얼굴에 뱉었다. 기스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살려준다고 해도 지랄이야. 그래,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 내가 직접 찾으면 되니까. 내가 네 아내를 찾으면 기대해.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테니까.”
기스는 상상만 해도 즐겁다는 듯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황제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기도했다.
부디 누군가 저 악마를 막아주기를…
그리고 그게 그의 마지막이었다.
“뒤졌네. 하여간 허약한 새끼.”
기스는 조소하며 단검으로 황제의 목을 땄다.
전황은 시시각각 변해갔다.
젠킨슨의 예상대로 병사들은 흡혈귀와의 신체 격차를 이겨내지 못했고, 차례로 하나둘씩 쓰러졌다.
수적으로 열세에 처하자 전장에는 패색이 짙어졌다.
‘폐하께서는 실패하신 건가.’
젠킨슨과 다른 귀족들은 흡혈귀들을 상대로 상당한 시간을 버텨냈다. 그 제국의 안배라는 것이 작동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시간을. 그러나 제국의 안배는 작동하지 않았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황제가 안배를 작동시키는 것에 실패했거나 혹은 그 안배라는 것 자체가 거짓이었거나.
…무엇이 진실이든 이제는 상관없지만.
이 싸움은 이제 ‘이기느냐 지느냐’가 아닌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변질되었으니까.
이런 종류의 싸움에선 시간을 지체할수록 죽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알버튼!”
젠킨슨이 소리치며 어디 있는지 모를 부관을 불렀다. 주군의 호명에 부관, 알버튼은 자신에게 달라붙은 흡혈귀를 가까스로 떼어내곤 부름에 응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병사들을 수습해라. 수습되는 대로 도시를 빠져나간다.”
“황궁으로 갑니까?”
젠킨슨이 잠시 뜸을 들이곤 힘겹게 대답했다.
“아니, 바로 빠져나간다.”
“예? 하지만 황궁에 공작부인과 공자님이…”
“황궁에 돌아가기엔 늦었다. 조금이라도 꾸물댔다간 떼죽음이야.”
“허나…”
“말대답 그만하고 빨리 병사나 수습해!”
주군의 호통에 부관은 못마땅해하며 명령에 따랐다. 부관이 병사들을 수습하는 것을 확인한 젠킨슨은 고개를 돌려 다른 귀족들을 살폈다.
그들 또한 젠킨슨처럼 일이 꼬였음을 깨닫고 빠져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몇몇 귀족 무리는 이미 탈출을 행동에 옮기는 중이었다.
젠킨슨은 혀를 찼다.
‘이럴 때만 눈치가 빨라서.’
이거, 잘못해서 늦었다간 한순간에 고립될 수도 있겠다. 그랬다간 손도 못 써보고 죽겠지.
그러나 다행히도 그의 불안한 상상이 현실이 되는 일은 없었다. 고지식하지만 유능한 그의 부관이 빠르게 병사들을 수습하고 진형을 짠 덕분이다.
“젠킨슨 님, 명령하신 대로 병사들을 수습했습니다!”
“좋아. 다들 잘 들어라! 나와 기사단을 선두로 서문까지 돌파를…”
콰아앙!
무언가 빠른 속도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커다란 충격음에 자연스레 시선이 모였는데, 흙먼지가 사라지며 벽에 처박힌 인물의 신형이 드러났다.
“에킨 경?”
꼴사나운 모습으로 벽에 처박힌 건 에킨이었다.
쿨럭
다행히 죽지는 않았는지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고 한들 제국의 공작이 당한 광경은 제국인들에게는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감미로운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호오, 살아남았나? 제법 강하게 쳤거늘.”
운 좋게 살아남은 벌레를 보며 놀라는 듯한 말투.
제국인들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기다란 청은발을 흩날리는 미형의 남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모인 인간들의 시선을 느끼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여가 허락치도 않았는데 감히 여의 존안을 쳐다보다니. 두 눈알을 모두 뽑아야”
콱.
말하는 도중을 노린 두 기사의 기습 공격을 켈리던은 정확하게 잡아냈다.
두 기사가 경악하는 가운데 켈리던이 한심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혀를 찼다.
“예의라는 게 없는 종자들이로군.”
켈리던이 힘을 주자 검기가 담긴 검은 얇은 막대기처럼 뚝 부러졌다. 곧이어 그의 손바닥이 기습한 기사들의 안면을 붙잡았다.
“여에게 저지른 무례. 그 비천한 목숨으로 사죄하라.”
우드득.
켈리던의 손가락이 두 기사의 얼굴을 파고 들어가며 머리를 구겨트렸다. 그 말도 안 되는 힘에 제국인들이 압도된 사이 또 다른 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빨간 안개! 안개를 조심해! 사람을 죽인다아아악?!”
한 병사가 다른 이들에게 경고하다가 저도 모르게 안개에 집어삼켜졌다. 안개가 지나가고 남은 곳에는 뼈만 앙상한 시체가 남았다.
여러모로 충격적인 상황이었지만, 여기서 끝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들에겐 희박한 확률이긴 해도 운이 좋으면 살아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뒤이어 벌어진 일들이 제국인들에게 쐐기를 박았다.
“언데드? 흡혈귀가 언데드를 부려?”
“그보다 너무 많잖아!”
“신관! 신과아아안!!”
누군가가 부리는 대규모의 언데드가 갑작스럽게 등장하고.
“하, 하늘에서 피 화살이 쏟아진다!!”
“이런 시발, 마법사들은 뭐 하는 거야?!”
한 여성 흡혈귀의 혈마법을 마법사들이 감당하지 못한 탓에 하늘에서 피의 화살이 쏟아졌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