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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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귀환
잠시 멍한 표정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꾸러미를 바라보던 형진은 천천히 다가가 그 중 하나를 풀어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 도시락 용기인 것을 알아보고는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이런 미친! 도대체 얼마나 사람을 끌어 모았길래!”
“설마… 이게 전부다 도시락 용기에요?”
유아는 그저 놀란 표정을 지을 뿐이었지만, 형진은 그제서야 지부장 기젤이 수매에 곤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보내왔던 일을 떠올렸다.
아뿔싸. 그 지부장 기젤이 곤란해 할 정도라는 말에서 일의 심각성을 눈치챘어야 하는데, 어째서 그것을 가볍게 여겼단 말인가.
“내가 미쳐. 누가 호구신의 사제들 아니랄까봐.”
뭘 하든 적당히 라는 게 있는 법인데, 이 사제들의 사전에는 아무래도 적당히 라는 단어가 없는 모양이다.
아무리 호구스러워도 정도가 있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기에 이 난리란 말인가. 이래서야 발 디딜 틈도 없지 않은가!
“유아! 따라와! 신전에 가봐야겠다! 림! 하마란! 일단 집 안에 빈 곳이 있나 살펴서 짐부터 풀어놔!”
-넵! 스승님!
“알겠습니다.”
형진은 유아를 데리고 씩씩거리며 신전으로 향하려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는 일단 제랄딘의 저택으로 향했다.
형진이 유아와 함께 들이닥치자, 제랄딘과 미엘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저도 방금 전에 확인했어요. 미처 자세하게 확인을 하지 않았던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랄딘님이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다 빌어먹을 호구신 때문이죠. 전부 갯수가 정확히 얼마나 됩니까.”
“그게… 일단 확인된 것만 백만 개에요.”
“컥!”
사실 용기 백만 개라고 해봐야 값어치로 따지면 얼마 되진 않는다. 허드렛일이 다 그렇듯이 일이 귀찮을 뿐 아이들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만큼 단가는 얼마 안 되기 때문이다. 교환 비를 최대로 잡아도 기껏해야 은화 열몇 개 정도 가격 밖에 안 될 정도다.
은화 열몇 개 밖에 라는 표현은 좀 그런가. 나름대로 고액권 화폐인데. 요즘 돈을 좀 많이 벌다보니 금전에 대한 관념이 좀 바뀐 것 같다. 동화 몇 개 벌었다고 기뻐하던 것이 어제 같은데.
어쨌든, 그건 그렇다 치고.
물론 용기 백만 개가 있다고 해도 당장 그걸 전부 도시락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룬을 새겨서 보관 용기로 완성할 필요가 있으니까. 따라서 이 사태에서 가장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은 어쩌면 그 안에 내용물을 채워야할 형진보다는 보관 능력을 부여하기 위해 룬을 새겨야 할 미엘인지도 모른다.
“저거… 작업 가능하겠습니까?”
형진의 물음에 미엘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혼자서는 무리일 것 같네요. 룬을 새겨 넣고 그것을 활성화하려면 확실히…”
“새겨 넣는다고요?”
“네. 하지만 이게 사실 활성화시키는 것보다 더 까다롭죠.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용기에 구멍이 나지 않도록 칼로 살살 형태를 잡고 거기에 비약을 칠해야 하거든요. 솔직히 이 작업이 어려운 거지 활성화는 룬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시간은 그리 걸리지 않아요.”
어라, 그렇다면?
설명을 듣는 순간 형진은 의외로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럼 단순히 새겨 넣는 것 자체는 마법사가 아니어도 가능한 겁니까?”
“네. 다만 정교한 작업이라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어야만 해요.”
그렇다면 나쁘지 않다. 이걸로 가공 수련을 하면 되니까.
가공 수련이 어려운 점은 집중력이 필요할 정도의 난이도 있는 작업을 다량으로 수주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지금 만들어진 백만 개의 도시락 용기에 룬을 새기는 작업을 시도한다면 어떨까. 목재든 석재든 등급을 올릴 정도로 수련을 하려면 그 부산물을 처리하는 것이 큰일이지만, 도시락 용기는 어차피 전투식량의 납품에 쓰일 물건이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격이다.
“할 수 없군요. 이왕 사들인 것이고, 제가 발단이었으니 돕는 것도 제가 할 수밖에요.”
“힘들지 않을까요? 따로 사람을 구해보는 것이…”
“벌 받는 셈 치면 되죠. 후.”
일단 그렇게 도시락 용기에 대한 협의를 마친 형진은 다시 유아를 데리고 신전으로 향했다.
형진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 모습을 알아본 사제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얼른 그를 맞이한다. 자신들이 해놓고도 역시 심했다 싶었던 모양이다.
사제들의 안내를 받아 최고 사제의 방으로 들어간 형진은 우물쭈물하고 있던 최고 사제를 향해 말했다.
“도대체 몇 명한테 일을 맡긴 겁니까?”
“그, 그게…”
“말 해보세요. 지금 저기 쌓여 있는 게 전부가 아니죠?”
“네… 죄송합니다.”
형진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어디 들어나 보죠. 얼마나 더 있습니까?”
“두 배… 정도…”
“큭!”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뒷목을 잡았다. 모르긴 해도 두 배 라는 것도 얼추 잡은 것일테니 최소라고 봐야한다.
“제 정신입니까? 자작나무 씨를 말리려고 작정을 했어요? 희망과 생명의 사제 맞습니까? 나무도 엄연히 살아있는 생명이란 걸 설마 모르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희도 사람들에게 일을 맡길 때 주의를 주었습니다. 나무의 생장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로만 채취를 하라고요. 다만 일이 이렇게 커진 건 다른 신전에까지 일이 넘어가면서…”
최고 사제의 말을 듣던 형진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잠깐. 지금 뭐라고요? 다른 신전? 다른 신전에도 일을 맡겼단 말입니까?”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끙…”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더라니. 몇백만 개가 애들 이름도 아니고 아무리 애들을 착취하고 그리칸 인근 시민들을 총동원했어도 가능한 수량이 아니다. 다른 지역의 신전들까지 총동원하는 바람에 이런 사단이 일어난 것이다.
“내가 안 사주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들어나 봅시다.”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후… 희망과 생명께선 신도들을 돌보지 않는 겁니까? 어째서 이렇게까지…”
“죄송합니다.”
잠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있던 형진은 문득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매크로 수련으로 인해 유아가 특이한 증상을 보였을 때, 그것에 대한 것을 라야의 총괄 지부장인 탁스 두겐을 통해 공포와 죽음께 문의를 드렸던 일이 있다. 당시 공포와 죽음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다.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후 그리칸에 있는 호구신의 신전에 거하는 자들 모두에게 그것을 가르쳐 보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내려줄 수 있는 최선의 답이며, 또한 서로를 위한 최고의 상이라고…
사실 전부터 호구신에 대한 것을 접할 때마다 의문스러웠던 점이 있다.
다른 신들의 경우, 특히 공포와 죽음 같은 신의 경우에는 항상 매우 세심하다는 생각을 들 정도로 솔선해서 성도들을 돌본다. 오죽하면 황자를 처치하고 돌아온 왔을 때 임무를 수행한 것도 아니고 페스타에 참여한 것도 아닌데 활약이 즐거웠다며 상자까지 내려줬을까. 덕분에 혹시 관음증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떠올렸을 정도다.
신뢰와 헌신 역시 잠시 동안이지만 하마란의 일을 통해 자신의 추종자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 보였고, 파괴와 재생의 경우엔 아예 스스로 강림하려다가 형진에게 저지당하기 까지 했다.
그런데, 희망과 생명은 그런 식으로 현실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이 전혀 없다. 오죽하면 어느 정도냐면, 호구신의 사제가 강간당해 아이를 낳는 경우마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이후로 사제들이 혼자 여행을 다니지 못할 정도다. 신들의 개입이 아주 왕성한 이 세계에 있어서,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싶을 정도다.
이와 같은 정황에, 매크로 수련 중에 유아가 보였던 반응, 공포와 죽음께서 내리신 대답, 그리고 집결지에서 일어났던 기적의 성광까지.
이 모든 단서들을 하나로 합치자, 형진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스스로도 설마 싶은, 그런 결론에.
“희망과 생명께서 그리 하라 말씀하시더이까?”
“아, 아닙니다. 그런 불경한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형진의 말에 최고사제는 화들짝 놀라며 그렇게 대답한다. 여기까지는 정상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그럼 이래서는 안 된다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까?”
“그, 그건…”
이어진 형진의 말에 최고사제는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보고 형진은 확신했다.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바로 공포와 죽음께서 내리신 답을 실행하는 것 뿐이다.
“지금 당장, 이 신전 안에 거하는 모든 이들을 한 데 모으십시오.”
“네?”
“어, 어쩌시려고요?”
최고 사제는 물론이고 옆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유마마저 화들짝 놀란다. 하지만 형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다그쳤다.
“어서요. 저는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원래는 많았는데, 이번에 아주 확 줄어 버렸습니다. 정녕 제가 막 나가는 걸 보고 싶으십니까?”
“아,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고정하십시오.”
최고 사제는 얼른 사람을 불러 신전 안에 거하는 사람들 모두를 신전 앞마당에 모이도록 지시했다. 형진은 잠시 기다리다가 사제 하나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모두 모였음을 알리자 비로소 밖으로 나갔다.
많다.
많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정말 많다. 이렇게 먹일 입이 많으니 그렇게 돈이 궁해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거겠지.
“말씀하신 대로 모두 모이게 했습니다.”
“좋습니다.”
형진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호구스러운 시선들을 한번 스윽 돌아보고는 단상으로 나아가 자세를 잡았다.
“추운데 모두 모이게 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저에게도 여러분에게도 매우 중대한 일이란 점을 명심하십시오.”
“…”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도록 하겠습니다. 유아, 앞으로!”
“아, 앞으로.”
갑자기 자신을 호명하자 얼떨결에 앞으로 나선 유아는 뒤이어 흘러나온 형진의 말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지금부터 체력 증진 매크로 수련을 시작한다. 실시!”
“실… 네? 그걸요? 여기서?”
“왜? 뭔가 문제라도?”
“그게… 그걸 하게 되면.”
“그래서 못하겠다?”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구요.”
유아는 당황한 와중에도 형진이 인상을 팍 구기자 찔끔하며 마지못해 체력 증진 매크로 수련을 시작했다.
“모두 따라합니다. 열외 없습니다. 견습사제든, 사제든, 고사제든, 최고사제든, 그리고 신전에서 양육되고 있는 아이들이든, 전부 따라합니다. 뭐합니까! 어서 따라하지 않고!”
“알겠습니다. 따라하겠습니다.”
최고 사제가 허둥대며 유아가 하고 있는 매크로 수련을 따라하자 다른 이들도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유아는 모두의 앞에서 이것을 펼쳐 보인다는 사실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그 동작 하나 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그녀를 따라 하던 신전의 식구들 역시 같은 현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느새 추운 날씨는 잊고 땀까지 흘려가며 신전의 식구들 모두가 그렇게 일치단결한 동작을 펼치던 어느 순간.
갑자기 유아의 몸으로부터 한줄기 빛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른다.
“역시.”
형진이 그렇게 말하며 바라보는 순간, 흐리멍덩하던 유아의 눈빛이 앙칼진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변하더니, 이내 짜증스럽다는 듯이 주위를 돌아보며 빽 소리를 지른다.
[누구야! 누군데 이렇게 자꾸 불러대!]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