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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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귀환
체력 증진용 매크로 체조는 바로 특정 속성의 신을 불러내기 위한 강신무의 일종이었던 셈이다. 단순한 동작을 반복함으로서 해당 속성의 신으로부터 힘을 끌어와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그런 율동이었던 것이다.
유아가 매크로 수련 중에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인 것은 어딘가에 있을 신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었다. 또한 그녀가 신녀로서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탐색을 통해 신의 편린과 마주하면서 격이 향상된 덕분이다. 물론 그러기에 충분한 신성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즉, 지금 유아의 몸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이 신전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희망과 생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유아가 처음 매크로 수련을 했을 때는 아무 반응도 없다가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이것 역시 간단한 이유다. 유아 혼자서 부를 때야 그냥 무시한다 쳐도, 이렇게 수많은 인원들이 동시에 불러대니 그냥 모른 척 지나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과연 놀라우신 공포와 죽음.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형진에게 그러한 답을 내리셨단 말인가.
[너… 내 신도가 아니구나.]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희망과 생명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형진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희망과 생명이시여.”
[이 기운은… 그 재수 없는 공포와 죽음?]
“재수가 없는지는 아직 뵌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최소한 당신보다는 훌륭한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라!]
그 유아에게 깃든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희망과 생명은 분노를 표출했다.
하지만 막상 그 대상인 형진은 알 수 없는 검은 막 같은 것에 감싸인 채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있었다. 바로 공포와 죽음의 가호가 이 순간 시기적절하게 발동한 것이다.
역시 공포와 죽음. 이래서 좋아한다니까.
“최소한 제가 모시는 신께서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다니시지는 않으십니다. 어디에서 뭘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누구와는 달리.”
[…]
그 말에는 스스로도 찔렸던 모양이다. 희망과 생명은 형진을 향해 뿜어내던 분노를 거두고 우물쭈물거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시, 신에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법이다.] “사정이라. 그럴 수도 있겠군요.”[이해해… 주는 건가?] “이해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모시는 신도 아닌 것을.”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느냐는 듯한 형진의 말에 희망과 생명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가도 돼?] “안 됩니다.”[어째서?] “저야 그렇다 쳐도, 여기 모인 이들에게 말 한 마디 정도는 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들을 내팽개쳐 두고 있었는지. 어찌하여 이 추운 날 먹을 것 하나 입을 것 하나 제대로 장만하지 못할 정도의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었는지. 어째서 최소한 자신의 몸을 지킬 만한 수단마저도 주어지지 않았는지.”
[…]
입이 열 개 있어도 할 말이 없었던지 잠시 우물쭈물 하던 희망과 생명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그대로 줄행랑을 치려했다. 하지만 유아의 몸에서 발하던 빛이 사라지려는 순간, 형진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도망치시려고요? 어림없습니다. 어디 도망쳐 보십시오. 전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당신의 신도들을 불러다가 죽을 때까지 멈출 수 없는 이 춤을 추게 만들 것입니다. 당신이 과연 그 모든 부름을 무시할 수 있을까요?”
[미, 미쳤어? 제 정신이야?]
화들짝 놀란 희망과 생명이 다시 유아의 몸으로 돌아온다.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이 모든 신도들을 불러다가 춤을 추게 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죽을 때까지 춤추도록 만들게 하겠다는 대목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가급적이면 후자라고 믿고 싶다.
“가급적이면 저도 그런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구나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오히려 그쪽이 당신의 추종자들에게는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르지요.”
[…]
“일단 차분하게 대화를 해봅시다. 일단 다른 사람들이 모여들면 골치 아프니 적당히 조치를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힘들게 춤추고 있는 저들 역시 당신의 추종자들이니 이 추운 날씨에 몸 상하지 않도록 작은 배려 역시 부탁드립니다.”
[…]
희망과 생명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손을 내저어 신전을 감싸는 일종의 막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신전 안으로 불어 닥치던 차가운 바람이 사라지고 봄날처럼 따사로운 기운이 내부에 감돌기 시작한다.
“훌륭합니다.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왜 그동안 쓰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니까.]
“호오. 신조차도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겁니까?”
[알고 싶은 얘기가 그거야?]
형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솔직히 궁금하긴 합니다만, 그보다는 당신께서 그동안 신도들을 내팽개치고 어디에 거하셨는지 궁금하군요. 설마 어딘가에 틀어 박혀 쿨쿨 잠만 주무시고 계시지는 않았을 것 같으니.”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당신이 깃든 그 바보 녀석이 그토록 힘들게 찾아나서야 할 장소라면, 최소한 쉽게 찾을 수 있는 장소는 아니다 싶어서 말입니다.”
[하긴. 이 아이는 확실히 특별해.]
희망과 생명은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유아의 가슴을 만져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가슴이 너무 작은 것이 흠이긴 하지만.] “동감입니다.”형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긍정의 뜻을 표하자, 희망과 생명은 피식 웃어 버렸다.
[내가 있었던 곳은… 그대들이 흔히 엘리시온이라고 부른 곳이야.] “엘리시온… 말입니까?”[재미있는 곳이지. 내가 완전한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
엘리시온이라니.
느닷없이 튀어나온 그 단어에 형진은 헉 하고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 동안 엘리시온에 대한 것을 잊고 있었다. 이곳의 생활이 너무나 즐거워서, 이 안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일상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너… 엘리시온에 가본 적이 있구나?] “…”역시. 아무리 호구라고 해도 신은 신인가. 설마 공포와 죽음의 가호로 지켜지는 자신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본 것은 아닐 테고, 표정에 드러난 감정을 읽은 것이리라.
“글쎄요. 그것은 함부로 말씀드리기 어려운 일이라.”
[흐음.]
희망과 생명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형진을 바라보았다.
[궁금하지만 괜히 손을 대면 그 참견쟁이 녀석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 괜히 빌미를 만들 필요는 없겠지.] “…”[그래. 결국 나에게 원하는 것이 뭐지? 이루고 싶은 소원이라도 있나? 아, 참고로 넌 이미 공포와 죽음에게 속한 상태라 내가 임의로 소원을 이루어 준다든가 하는 식은 불가능해. 만약 그 녀석을 버리고 나에게 속한다면 또 모르지만.]
제법 달콤한 유혹이다. 제법 그럴 듯한 제안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눈앞의 이 여자를 따르는 순간 지금껏 공포와 죽음으로부터 얻었던 모든 것을 잃는다는 뜻도 된다. 그것 외에 방법이 없다면 모르되, 그렇지도 않은 이상 이런 불합리한 제안을 따를 필요는 없는 일.
게다가 그토록 세심하게 성도를 보살피는 신을 버리고 이렇게 무책임이라는 단어를 형상화한 듯한 신을 섬기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또한 지금 상태에서 엘리시온에 간다해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엘리시온이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형진은 아직 알지 못한다. 단순히 그가 했던 게임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살던 세상을 말하는 것인지조차 그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그곳으로 간다고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황공할 정도의 말씀이십니다만, 불행히도 전 이미 공포와 죽음께 귀의한 몸이라.”
[흥.]
주저 없이 거절의 의사를 표하는 형진의 모습에 희망과 생명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뭐 때문에 나를 부른 거지?]조금 토라진 듯한 그녀의 말에 형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서로에게 득이 될 만한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제안?]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이 세계의 일, 귀찮으시죠?”
[…]
“신도들이 많기는 하지만 너무 많아서 돌보기도 귀찮고, 걸핏하면 호구라고 다른 신들이 놀려대는 것도 짜증나고, 그런 귀찮고 피곤한 일 보다는 완전한 자신으로 존재하는 엘리시온 쪽이 훨씬 더 끌리고 재미있죠?”
은근한 형진의 말에 희망과 생명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말 하고 싶은 것이 뭐야?]형진은 씩 웃었다.
“간단한 얘깁니다. 저한테 넘기십시오.”
[뭐?]
“아, 물론 신의 자리를 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게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도 저는 알 수 없는 얘기니까요. 하지만 당신에게 속한 성도와 신전들, 그 많은 이들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저 아이들을 보십시오. 얼마 전에 제가 음식을 나누어 주기 전까지 빵 한 조각도 배불리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그래서?]
“제가 당신을 대신해 신전과 그에 속한 이들을 관리하겠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대리인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당신께서는 이곳의 일을 신경 쓰지 않아서 좋고, 저는 제가 하고자 하는 일에 필요한 충분한 인적 자원을 얻을 수 있어서 좋고, 이들은 지금보다 훨씬 윤택하고 안전하며 즐거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니 좋고. 어떻습니까. 모두에게 은혜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무작정 착취하려 들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공포와 죽음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이 서로를 위한 최고의 상이 될 것이라고.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순간, 형진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조금 무모할 수도 있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일에서 볼 수 있듯이, 신전에 속한 이들의 노동력은 쉽게 볼 수 없는 수준이다. 말이 백만이지,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더구나 이들은 단순 노동만 능한 것이 아니다. 적절한 보호 수단만 강구된다면 이들이 지닌 회복 능력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누구보다 훌륭한 인적 자원이 된다.
더구나 지금은 대미궁까지 발견된 상태. 게임에서도 격수가 없어서 사냥 못 나가는 일은 없지만, 사제가 없으면 파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토록 회복 포션의 수요가 엄청났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힐러 역할을 할 사제가 없으니 그것이라도 대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호구신의 사제를 건드리는 순간 신의 분노에 직면한다는 사실 하나만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 있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아무나 막 들이대는 사태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사제를 파견하는 것이 어렵더라도, 포션의 공급을 독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돈방석은 예약해둔 상태나 다름없다.
물론 그 일을 전부 형진이 떠안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신과 영접할 기회를 잃어버렸던 최고 사제들로 하여금 협의체를 만들게 하여 최대한 업무 부담을 최소화하고, 형진은 굵직굵직한 일들만 해결하면 된다. 일반적인 단체라면 이런 식의 권한 이양은 부패를 양산하는 초석이 되겠지만, 호구신의 사제들 중에 그런 식으로 잔머리를 굴릴 수 있는 인재가 과연 있을까 싶다.
만약 그런 자가 있다 해도 적당히 잔머리를 굴리는 정도의 융통성이 있는 자라면 불러다 일을 시키면 그만이고, 빼도 박도 못하는 악독한 범죄자라면 집행자의 손으로 처벌해 버리면 된다.
즉, 이것이 성사되면 형진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 세계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는 신의 세력 하나를 통째로 꿀꺽하는 셈이다.
[설마… 내 신도들을 공포와 죽음에게로 귀의시키려는 거냐?] “설마요. 공포와 죽음께서는 아무나 막 자신의 추종자로 들이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이런 호구스런 이들은 제발 받아들여 달라고 해도 거절하실 겁니다. 확인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아이에게조차 제 본색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입니다. 저는 그저 희망과 생명을 신도들을 돕는 조력자 정도로 인식되겠죠.”[흠…] “어떻습니까. 제 생각이.”
희망과 생명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건 제안이 아니라 협박이다. 만약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형진은 앞서 했던 말대로 이 세계의 모든 희망과 생명 신도들에게 체력 증진의 매크로 체조를 가르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희망과 생명은 엘리시온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계속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 묶여 있어야만 한다.
처음부터, 거절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결국 희망과 생명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고 공포와 죽음이 약속한다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다.]형진은 사악한 표정으로 웃음 지었다.
“실로 현명하신 결단이십니다.”
하지만 희망과 생명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단, 하나 더 조건이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희망과 생명은 자신이 깃들어 있는 유아의 몸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이 아이와 맺어지도록. 이것은 내가 그대에게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