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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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귀환
형진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고 희망과 생명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었다.
[싫은 표정이라기엔 뭔가 미묘하네. 얼굴을 찌푸린 이유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겠어?] “설명해 드리면 조건을 바꿀 수도 있는 겁니까?”기다렸다는 듯한 형진의 대답에 희망과 생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가장 좋은 방법은 네가 나의 신도가 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니 이런 식으로 타협점을 찾은 것 뿐이야. 네가 신녀와 맺어진다면, 설령 공포와 죽음을 섬긴다 해도 핑계는 생기는 셈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나와 전혀 상관없는 자에게 그런 중대한 권한을 넘길 수는 없는 일이잖아.]그건 확실히 그렇다. 아무리 호구신이라도 그건 역시 좀 무리한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호구신이라고 불리는 판에, 인간의 협박에 굴복해서 덜컥 요구를 들어주는 것도 체면 빠지는 일일테니까.
“요컨대, 정략결혼 비슷한 개념인 셈이군요.”
형진의 말에 희망과 생명은 바로 수긍했다. 물론 또다시 한 마디를 덧붙인 채로.
[그런 셈이지. 하지만 이것은 또한 이 아이의 소망이기도 해.] “끙…”바보 메이드 녀석. 그런 마음은 좀 잘 숨겨두란 말이다. 저런 허접한 호구신 따위에게 바로 들키지 말고. 하기야 그런 걸 숨길 수 있었다면 바보 소리를 들었겠나 싶긴 하다만.
형진이 앓는 소리를 내자, 희망과 생명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을 잇는다.
[신녀의 소망을 이루어주는 동시에, 서로가 이루고자 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는 얘기지. 나로선 꽤 많이 양보한 셈이야. 네 무례함에는 화가 나지만, 내가 몹쓸 신인 것은 분명한 일이니까. 하지만 네가 만약 이 조건마저 거부한다면, 나는 아마도 화가 나서 심술을 부리게 되겠지. 아무리 호구신이라고 불리는 몸이라해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내 심술은 인간에게는 굉장히 무서울 거야. 어쨌든 신은 신이니까.]그건 틀림없는 일이다. 비록 형진이 매크로 수련이라는 카드를 쥐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수단은 아니다. 막말로 이 호구신이 짜증이 나서 막 나가기로 마음먹으면 공포와 죽음에 의해 보호받는 형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이들에게는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테니까.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되었든 신의 심술이란 문자 그대로 재앙일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뭘?]
“맺어진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궁금합니다.”
[뭐긴 뭐야. 교미 행위지.]
“쿨럭.”
너무 적나라한 희망과 생명의 표현에 형진은 사레가 들려버리고 말았다. 하기야 인간도 가축이나 애완동물의 행위를 그런 식으로 표현하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품위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왜? 좀 더 점잖은 표현을 원하는 건가? 그러면 성교라고 해두지.]희망과 생명은 그런 형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단어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난감하기는 마찬가지. 그대로 놔뒀다간 어떤 식의 말이 나올지 몰라 급히 말을 받는다.
“크흠. 제가 묻고 싶은 것은 행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수반되는 격식 같은 것도 필요한지였습니다.”
[격식? 아… 결혼을 말하는 건가. 그런 건 상관없어. 어쨌든 나로서는 조건만 갖추어지면 되는 일이니까. 아무리 내 사정이 있다 한들 그런 일까지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지. 필요하다면 두 사람이 알아서 하면 되는 일이기도 하고.]
멍청한 바보 메이드 같으니, 애매하게 맺어진다 어쩐다 하는 식의 소망 말고 결혼 같은 걸로 딱 못을 박았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하여튼 줘도 못 먹는다는 건 정말 이런 경우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이마를 감싸 쥐자, 희망과 생명이 문득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다만, 너희들의 맺어짐이 어떤 결실을 가져오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분명히 책임을 지도록.] “결과… 라면?”[아이 말이다.] “…”
[결혼 같은 절차는 따지고 보면 인간에게나 의미 있는 얘기일 뿐. 안전한 출산과 양육이 보장되고 그것을 책임질 수 있다면 상관없는 일이지. 애초에 결혼이라는 제도의 취지도 그것 때문이고.]
상당히 파격적인 의견이다. 하긴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나 제도의 굴레에 간섭받지 않는 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시각일지도 모르지만.
다만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여신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의 맺어짐 그 자체보다는 그로 인해 태어난 생명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희망과 생명은 이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에게 있어 부모의 상황이나 다른 여러가지 환경이 일반적이지 않다면 여러모로 자라나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겠지.]확실히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부모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가정환경이 일반적이지 않을 경우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차별의 이유가 되니까. 물론 이런 얘기를 하면 의지나 노력 운운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문제가 될 소지를 만들지 않으면 의지나 노력을 그런 곳에 소모할 필요가 없다.
“결국은 결혼이 가장 간편한 방법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결혼이라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그리 해도 괜찮다는 얘기야.]
뭔가 애매하다. 이 신은 도대체 형진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인가.
“왕이라도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왕이라면 결혼이라는 형식에 구애받을 필요 없이 마음대로 여자를 안을 수 있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왕실의 후사를 잇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런 왕이라도 정식으로 결혼한 상대, 즉 왕비의 존재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 식으로 정실과 후실의 구분이 생기면, 당연히 슬하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서도 어미의 출신에 따라 벽이 생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도 제대로 된 방법은 아니다.
그레서일까. 희망과 생명은 어디 고민해 보라는 듯이 웃으며 대답한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해. 하지만 너라면 그것보다도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 “…”결혼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혹시 이것이 앞서 말한 심술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네가 말한 권한은 이 아이와 맺어지는 순간 얻을 수 있다. 괜히 엉뚱한 녀석에게 권한을 빼앗기지는 말아. 그렇게 되면 나는 정말로 화가 날 테니까.] “알겠습니다.”당연한 일이다. 형진이 굳게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희망과 생명은 다시 느슨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그럼 중요한 얘기는 이것으로 끝인 모양이군. 달리 문제가 없다면 나는 이만 돌아가 봐도 될까. 한창 저쪽에서 일을 하던 중이라서 말이야.]이쪽 세계의 일을 팽개쳐 두고 저쪽에서 뭔 일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하긴 하지만, 거기까지 파고들 생각은 없다. 솔직히 알아봐야 쓸 데도 없고.
하지만 아직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매우 중요한 문제가.
“잠깐.”
[왜?]
“기왕 베푸시는 김에 하나만 더 베풀고 가시죠.”
[뭘?]
“그 녀석 가슴…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희망과 생명은 얼굴을 찌푸리더니 혀를 찼다.
[쯧. 하여튼 남자들이란.] “어쩔 수 없습니다. 그건 본능 같은 거니까요. 물론 그렇지 않은 취향을 지닌 자도 있긴 합니다만, 불행히도 저는 아니군요. 게다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희망과 생명께서도 동의하신 일 아닙니까.”쓸데없이 당당한 형진의 대답에 희망과 생명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좋아. 그 소망, 들어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단, 조건이 있다.] “무슨…”
[맺어지면 맺어질수록, 이 녀석의 가슴은 네가 원하는 이상적인 형태가 되어 갈 거야. 원하는 모습을 만들어 내려면 아마도 꽤 열심히 노력해야 겠지.] “…”
째째하긴. 그냥 한 번에 끝내면 되지, 꼭 이렇게 조건을 달아야 하나.
[왜? 싫어? 아예 없어지게 해줄까?] “쿨럭. 아닙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뭐… 열심히 노력해 보도록 하지요.”생각 같아서는 다시 한 번 협박을 할까도 싶지만, 더한 심술을 부리면 그것도 큰일이라 일단 이 정도로 해두기로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신이니 괜히 긁어 부스름을 만들 필요는 없는 일이다. 어쨌든 원하는 건 다 얻었으므로.
[그럼 이만 돌아갈 수 있도록 다들 깨워.] “알겠습니다.”형진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아직까지도 열심히 매크로 수행을 거듭하고 있는 사제와 아이들을 깨웠고, 그렇게 강제로 수련을 멈춘 이들은 이내 정신을 잃고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희망과 생명의 권능으로 신전 안의 추위는 가셨다지만, 쌀쌀한 날씨에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입이 돌아가기라도 하면 그것도 큰일이라 따뜻한 방 안으로 옮겨야 했다. 달리 도울 사람도 없는 상황이다 보니 그야말로 중노동이다. 이런 걸 보고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건가. 아니면 사필귀정이라고 하는 건가. 쳇. 여러모로 악당의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뭔가 입으로는 쉴새없이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분주하게 사제와 아이들을 깨우고 안으로 데려다 놓는 형진의 모습에 희망과 생명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쓸데없이 자기 속을 긁어대긴 했어도, 저 정도라면 맡길 수 있다. 공포와 죽음에 속하지 않았다면 진작 자신이 손을 써서 끌어들이지 않았을까. 이미 늦은 일이긴 하지만.
재수 없는 공포와 죽음. 정말 언제나 기가 막힐 정도로 손이 빠르다.
솔직히 호구신이라는 별명이 붙도록 만든 그 사건에 대해서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 식의 말을 하든 그것은 변명에 불과했고, 굳이 형진에게 구차하게 그런 변명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어쨌든 한동안 이곳의 일을 등한시 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거기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미안하다.
그렇게 방치했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믿고 따른 아이들에게.
[그러고 보니 벌써 그런 시기가 되었나.]문득 희망과 생명의 표정에 쓸쓸함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형진이 사람들을 모두 안으로 옮기고 헉헉거리며 다가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긴장감 없는 표정으로 돌아가 버린다.
“후… 다 끝났습니다.”
[수고했다. 이리 가까이 오도록.]
“네?”
[어서.]
“…”
이 호구신이 또 왜 이러나 싶어 주춤주춤 다가서자, 희망과 생명은 피식 웃더니 손을 뻗어 형진을 끌어당긴 후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언젠가. 이것이 도움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나를 한 번 더 기억해 주길 바라.] “그게 무슨…”느닷없이 키스 세례를 받은 형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음 순간 유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몸을 차지하고 있던 신이 사라지자 유아는 줄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이크.”
형진은 얼른 유아를 안아 들었다. 그러자, 희미한 여체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유아의 체향 따위 이미 몇 번이나 맡은 적이 있지만, 방금 전까지의 얘기 때문인지 오늘은 더욱 색다르게 느껴진다.
“쳇… 이걸 언제 키운담.”
슬쩍 가슴을 만져 봤지만 역시 한숨만 나온다. 이걸 어느 세월에 노력해서 키워놓을지 실로 암담할 정도다. 아예 아무것도 안 잡히는 수준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인가. 기왕 소망을 품을 바에야 이것도 좀 빌어뒀으면 얼마나 좋냔 말이다. 역시 바보는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잠시 유아를 품에 안고 푸념을 하고 있자니, 문득 신전 안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기껏 안에 데려다 눕혀 놨던 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채 밖으로 나온다. 유아는 일전에 같은 상황에서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골골댔는데, 이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꽤 쌩쌩한 모습이다. 나름대로 희망과 생명이 손을 쓴 것일까.
“바, 방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형진은 강림으로 인해 완전히 탈진해 버린 유아를 공주님 안듯 들쳐 안고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제들에게 대답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