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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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회합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리고 있는 유아를 중간에 앉혀 둔 채, 형진의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최고 사제는 일단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형진은 씩 웃으며 유아에게 말했다.
“너도 참석할래?”
“뭘요?”
“최고 사제 회합. 이 세계에 존재하는 희망과 생명 교단의 최고 사제급만 모이는 자리지.”
“네? 그런 게 있어요?”
“응. 내가 만들었어.”
“…”
태연하게 대답하는 형진의 모습에 유아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채 잠시 아무런 말도 못하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같은 바보가 참석해도 되는 거에요?”
“쿡.”
그래도 이 바보는 현명한 바보인 것 같으니 다행이다. 형진은 키득거리며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바보라도 일단은 신녀니까. 최고 사제들도 영접해 본 적 없는 여신을 그 몸으로 받아들였을 정도니 충분히 자격이 있지.”
“정말요?”
“물론. 여신께서도 유아는 특별하다고 하셨는걸.”
“아…”
“다만 가슴이 작은 게 흠이라고 하셨지만.”
“…”
특별하다는 말에 환하게 밝아졌다가, 가슴 얘기가 나오자 다시 울상이 되어 버린다. 형진은 그런 유아의 모습에 키득거리다가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고 이마에 살짝 입술을 맞춰 주었다.
유아는 형진의 입술이 이마에 닿자 살짝 기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최고 사제 앞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부끄러워하면서 떨어지려고 했다.
“이대로 있어. 회합에 참석하고 싶으면.”
“우…”
유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형진의 품 안에서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한다. 물론 회합에 참석하려면 자신의 품에 안겨 있어야 한다는 형진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추호의 의심도 품지 않고 그대로 믿어버리는 유아의 모습이 귀여워서 앞으로도 그냥 그런 설정으로 밀어붙이기로 결심한다.
[‘신녀’가 회합장에 입장했습니다.]유아가 회합에 참석했다는 메시지가 나타나자, 형진은 마침내 눈을 감고 자신 역시 회합장에 들어섰다.
형진이 급조한 회합장은, 하나 가득 꽃이 핀 언덕 위에 자리한 성소였다.
성수가 솟아오르는 작은 분수대를 둘러싸고 여러 개의 하얀색 기둥이 늘어서 있고, 주위는 아름다운 꽃이 가득 피어있는 그런 장소.
물론 이것은 형진이 빈약한 상상력을 동원해 대충 형상화시킨 상상의 공간에 불과하다. 나름 희망과 생명을 모시는 사제들인데 조명 하나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새카만 어둠 속에서 사운드 온리 표시만 뜨는 상대들과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일. 그렇지 않아도 생뚱맞은 대리자가 갑자기 튀어 나온 마당에 그런 식으로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 별로 현명치 못한 일이다.
회합장에 입장해서 성수가 솟아오르는 분수를 향해 다가서자,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아가 그를 알아보고는 얼른 달려온다.
“여긴 어디에요?”
“어디긴. 회합장이지. 자, 가실까요? 신녀님.”
“…”
마치 무도회장에서 춤을 청하는 것처럼 손을 내밀자, 유아는 살짝 홍조띤 얼굴로 그 손을 맞잡았다.
“아, 잠시.”
형진은 손을 뻗어 유아가 입고 있는 옷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몸에 걸치고 있던 메이드복 대신 여신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하늘하늘하고 풍성한 드레스로 모습이 바뀐다.
“좋아. 이 정도면 빈약한 가슴도 완전히 감춰지겠군.”
“우…”
갑자기 아름다운 드레스를 걸친 모습으로 바뀌자 놀란 표정을 짓던 유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가슴을 가지고 놀리는 형진의 말에 입을 삐죽 내밀었으나, 이내 그가 이끄는 대로 성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성소로 다가서자, 메시지를 받고 기도로서 응답한 최고 사제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가 뒤늦게 도착한 형진과 유아에게로 시선을 모은다.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여성들이었지만 개중에는 남성도 몇몇 섞여 있었고, 복식 또한 저마다 다른 지역의 문화를 반영하듯 제각각이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회합을 소집한 것에 대해 사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이번에 희망과 생명께 이 교단의 전권을 위임 받은 대리자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반려이며 또한 여신을 그 몸으로 받아들여 강림의 기적을 이루어낸 신녀입니다. 반갑습니다.”
모여 있던 최고 사제들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신께서 강림하셨다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교단의 전권을 위임한 대리자라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이란 말인가.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믿기 어렵군요. 여신께서 어찌 하려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것입니까.”
그래도 아주 잠깐이나마 이 얘기를 먼저 전해 듣고 형진과 유아의 정체를 아는 그리칸의 최고 사제가 앞으로 나서며 질문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단의 운영이 너무 방만하여 이대로는 결코 좋지 않다는 판단이 내려진 것이지요. 저는 이를테면 외부에서 초빙된 경영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경영자요?”
“그렇습니다. 전 여러분들이 어떤 식으로 신앙생활을 계속하는지, 여러분의 신심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희망과 생명에 속한 자들이 굶주리고 핍박받는 현재의 세태를 개선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할까요. 저는 희망과 생명의 신도조차 아닙니다.”
“그런!”
최고 사제들의 표정에 당황이 감돈다. 느닷없이 여신에게서 교단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리자가 나타난 것조차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당황스러운데, 하물며 그 인물이 신도조차 아니라니!
형진은 그렇게 혼란에 빠져 있는 최고 사제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교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지금도 여러분들께서 잘 해주고 계셨으니 제가 손을 댈 여지가 없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요. 어떻게 보면 여신께서 거의 방치 상태나 다름없이 놔두고 있던 교단이 이렇게 외적으로나마 융성하고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여기 모이신 최고 사제 여러분들과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대임을 맡겼던 전대의 최고 사제들 덕택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그리고 여신의 뜻을 대신해, 그러한 여러분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 말과 함께 형진이 경건한 태도로 허리를 숙여 보이자, 최고 사제들은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마주 예를 취했다.
형진은 잠시 그렇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다가, 이내 몸을 바로 했다. 그리고 다른 최고 사제들이 예를 거두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
“교단을 키우는 것은 좋습니다. 희망과 생명의 뜻을 널리 알리는 것도 좋습니다. 배고프고 추운 자들을 먹이고 입히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요. 왜 사람들은 여러분을 호구신의 사제라고 부르는 걸까요.”
“그건…”
최고 사제 가운데 남자 하나가 반박을 하려 했지만, 형진은 손을 들어 일단 그의 말을 막았다.
“압니다. 모든 이들이 다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는 거 압니다. 개중에는 정말로 여러분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신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잘 압니다. 어려울 때 받았던 도움의 손길을 잊지 않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여전히 호구신의 사제들이라고 불리고 있지요. 제 말이 틀립니까?”
“틀리지… 않습니다.”
형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과연 호구신의 사제들. 도대체 호구신은 뭘 어떻게 가르쳤길래 죄다 이 지경이 되어버린 건지.
어쩐지 좀 우울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형진은 일단 대화의 방향을 조금 틀어보기로 했다.
“얼마 전에 그리칸 인근의 신전들에 이런 일감 하나가 떨어졌을 겁니다. 자작나무 껍질로 도시락 용기를 만드는. 아십니까?”
문득 그리칸의 최고 사제를 포함한 몇몇이 움찔하는 모습을 보인다. 형진은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와서 그 일을 따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추운 겨울철, 일거리가 없는 자들에게 소소하게나마 푼돈이라도 쥐어줄 수 있는 일거리가 있으니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한 행동 자체를 탓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째서 자신들이 지닌 영향력을 겨우 그 정도 밖에 활용하지 못하느냐를 묻고 싶은 겁니다.”
형진은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바로 이번에 신전에서 만들어냈던 도시락 용기다.
손가락 끝에서 느릿하게 빙글빙글 돌고 있는 그 도시락 용기를 가만히 바라보던 형진은 다시 최고 사제들을 돌아보았다.
“이번에 수매된 이 용기의 숫자는 무려 백만 개입니다. 말이 쉽지, 백만 개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게다가 수매되지 못하고 쌓여있는 물량도 그것의 두 배 가까이 됩니다. 일감을 맡아서 알린 것은 좋았는데, 막상 수매 물량이 넘치니까 신전에서 부담을 떠안은 것이죠.”
다시금 최고 사제 몇이 움찔하며 고개를 수그린다.
“하지만 막상 백만 개라고는 해도 그 실제 가격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은화 열 몇 개 밖에 안 되는 푼돈이니까요. 아, 은화 열 몇 개가 어떻게 푼돈이냐고 하실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만한 인원을 들여 그만한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그 정도 밖에 벌지 못했습니다. 각자에게 과연 얼마나 이익이 돌아갔겠습니까? 그러니 푼돈 맞습니다.”
형진은 도시락 용기의 형상을 지웠다.
“문제는 그런 하잘 것 없는 일조차 미친 듯이 덤벼들어야 할 정도로 신전들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더구나 수매되지도 못한 도시락 용기들까지 떠안게 되면서 오히려 손해를 본 곳도 적지 않지요. 문제는 이런 식의 잘못된 운영이 비단 이번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가 앞서 그랬지요? 그렇게 베풀고 그렇게 노력하는데 어째서 호구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느냐고. 바로 이래섭니다.”
형진은 다시 손가락 위에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흔히 바이겔 기념 금화라고 불리는 현존하는 최고 가치의 화폐였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돈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돈이 있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훨씬 안락하고 윤택해지기 마련이죠. 제가 이번에 희망과 생명의 대리자가 된 것은 바로 이 돈 때문입니다. 베푸는 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얘깁니다. 여신의 뜻은 너무나 먼 곳에 있지만, 돈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장 배고프고 추운 마당에 무작정 여신의 뜻을 받아들이라고 하면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죠. 그렇지 않습니까?”
“…”
“그래서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방만한 신전의 경영을 혁신하고, 그렇게 윤택해진 재정으로 더 많은 베풂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지금처럼 쪼들리는 살림에서 한푼 두푼 나누어 몇 안 되는 이들을 돕는 것과, 풍족한 재정을 바탕으로 돈 걱정 없이 세상의 힘없고 굶주린 이들을 돌보는 것, 과연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이겠습니까. 어떤 것이 더욱 여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일이겠습니까.”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최고 사제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개중에는 입술을 깨물고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도 있었고, 또 몇몇은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떠올렸는지 한숨을 쉬고 있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울분이 치솟는지 하늘을 보며 탄식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모든 이들을 향해, 형진은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제가 관심이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지금처럼 은화 몇 개에 벌벌 떨면서 돌보는 아이들조차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상황으로부터 모든 신전이 벗어나게끔 만드는 일입니다. 여신께서 자신의 신도조차 아닌 저를 이 자리에 앉히는 결단을 내리신 뜻 또한 여기에 있으니, 여러분의 많은 협조를 바랍니다.”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 번 경건하게 최고 사제들에게 인사를 했다. 찍 소리도 못하고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이들 가운데 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치자 이내 다른 최고 사제들도 하나둘씩 거기에 호응해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형진은 대부분의 최고 사제들이 자신의 뜻에 호응해 박수를 치자 속으로 씨익 웃고는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그들을 향해 말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무엇부터 뜯어고쳐야 할지 논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