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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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결성
그것은 명백히 희롱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이미 하마란의 귀에는 그런 말 따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털썩.
그대로 주저앉았다. 전신에 닥쳐오는 무력감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배교자가 되었을 때는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에 치여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문득 그런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자신은 패배한 것이 아니라고. 그저 운이 조금 없었을 뿐이라고. 아주 작은 실수를 했을 뿐이라고. 그래서 이런 처지가 된 것 뿐이라고.
그래서 다시 대결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하마란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배교자가 된 것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이 남자가 자신을 깔보거나 하지는 못하도록 만들 자신이 있었다. 정정당당하게 싸운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린다면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마저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져버렸다. 토너먼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주 말끔하게 져버렸다.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이 남자는 자신의 목숨을 아주 쉽게 거두어 갈 수 있었으나 희롱하듯 옷만 찢어버리고 말았다. 피부에 상처 하나도 내지 않은 채 입고 있는 옷만 말끔히.
어떤 수단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것이 단순히 목숨을 취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것 정도는 하마란도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기 때문에 더욱 굴욕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정당당하게 싸우면 지지 않는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어리석어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이 남자가 강했을 뿐이다. 지금도, 이전에도.
“어이. 괜찮아?”
유아 가슴이 딱 저만큼만 되면 소원이 없겠는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드러난 가슴을 감상하고 있던 형진은 하마란이 또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자 얼굴을 찌푸렸다.
“또냐.”
얘는 뭐 일만 생기면 이렇게 펑펑 우나 몰라. 하기야 진 것도 모자라서 남자 앞에서 허연 살덩이를 유감없이 드러냈으니 분통이 터지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뭐 으뜸가리개까지 모조리 벗겨진 것 아니잖은가. 혹시 생각보다 감수성이 예민한 건가.
그런 잡생각을 떠올리던 형진은 입맛을 쩍 하고 다시고는 주저앉아 있는 하마란에게 말했다.
“그만 울고 일어나.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야.”
“…”
형진의 말에 하마란은 입술을 깨문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까 말한 대로 내일 모임에는 두건을 쓰고 가라. 네가 할 일은 단 하나, 유아를 지키는 것 뿐이다. 싫으면 다시 덤벼보던가.”
“…”
하마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형진은 다시 말을 이었다.
“림에게 옷을 가져다주라고 할 테니 입고 올라와. 괜히 그 꼴로 돌아다니다가 애들 기겁하게 만들지 말고.”
“네.”
형진은 속으로 혀를 차고는 수련장에서 나오다가 문가에서 안절부절하고 있는 유아의 모습에 피식 웃어버렸다.
“왜 그러고 있어?”
“그, 그게…”
“내가 지기라도 할 까봐?”
“…”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유아의 모습에 형진은 피식 웃다가 이내 그녀의 가슴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내가 노력하는 수밖에 없겠지.”
“네?”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싶어 어리둥절해 하던 유아는 갑자기 형진이 자신을 번쩍 안아 올리자 화들짝 놀랐다.
“가, 갑자기… 왜…”
“왜긴. 네 조막만한 가슴을 크게 키우려고 그러지. 자, 가자.”
“지금요? 아직 해도 안 졌는데…”
“상관없어.”
형진은 유아를 안고 올라가다가 림을 불러 하마란에게 옷을 가져다주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침실로 들어가 가슴 키우기에 열중했다.
그리고 다음날, 유아와 함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정장을 차려입고 내려온 형진은 눈앞에 드러난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냐 그건.”
-그게… 아하하하하…
림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자기가 보기에도 어색한 느낌인데 다른 사람이야 오죽할까.
원인은 바로 하마란의 차림새 때문이었다. 일명 섹시한 그리칸풍 메이드복을 입고, 그 위에 눈만 드러나는 두건을 착용하고 있으니 누가 봐도 기괴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두건 자체도 본래 착용하고 있던 수호자의 두건이 아니라, 모양만 대충 비슷하게 만든 물건이다. 손재주 없는 하마란이 밤새도록 끙끙대며 만든 것 치고는 나름 대단한 성과일지는 몰라도, 저래서야 누가 봐도 가짜란 걸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다.
아니, 차라리 수호자의 두건 모조품이라고 알아볼 수나 있으면 다행이다. 형진이야 수호자의 두건을 쓰고 나오라 지시를 내린 당사자라서 그것을 연상할 수 있는 것이고, 단순히 외형만 놓고 보자면 이건 사형수에게 씌우는 두건에 가깝다. 저래서야 종이 상자 뒤집어쓰고 로봇 코스프레라고 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확실히 어제 그렇게 말하기는 했다. 두건을 쓰고 가라고. 수호자의 두건을 콕 짚어서 명확하게 다시 지시를 내리지 않은 것은 형진의 실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대놓고 어설픈 두건을 만들어 쓰고 나올 줄이야. 저 정도면 최소한 수호자들이 자신들을 사칭했다고 따지지도 않을 테니 그 점에서는 오히려 다행인가. 혹시 노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래서 광신도란.
형진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하마란에게 말했다.
“야.”
“…”
“반항이냐?”
“아닙니다.”
“반항 맞는 거 같은데.”
“…”
이대로 놔뒀다가는 또 한 판 붙어버릴 듯한 기세라 중간에서 유아가 안절부절 못하자, 멀찍이서 뚱한 눈으로 지켜보던 크루그가 한 마디 툭 던진다.
“하마란님은 배교자가 두건을 쓰고 있는 건 옳지 못하다 싶은 거고, 아저씨는 유아 누나한테 다른 사람이 얼씬 못하게 하고 싶은 거 맞나요?”
“일단은.”
“그럼 굳이 두건을 꼭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헌신의 일격만 두르고 있어도 충분할 거 같은데.”
“…”
순간 형진은 물론이고 듣고 있던 모두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럴 듯 한데?”
두건을 쓰고 있으면 누구라도 신성 폭력배라는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으니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헌신의 일격 자체도 수호자를 상징하는 힘인 것은 마찬가지. 비록 배교자가 되어서 회색빛이 되었다 한들 교단의 관계자가 아닌 이상 그런 차이까지 알아볼 수는 없을 것이고, 그렇게 강맹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으면 제 아무리 날고기는 모험가라도 감히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적절한 타협안이 나오자 형진은 혀를 차며 결정을 내렸다.
“쳇. 할 수 없지. 그렇게 해.”
“감사합니다.”
그제서야 하마란은 공손하게 형진에게 인사를 한 다음 조잡하게 만들어진 가짜 두건을 비로소 벗었다.
“두건은 양보했지만, 유아를 지키는 문제는 양보할 수 없다. 무슨 얘긴지 알겠지?”
“네.”
“좋아. 그럼 가자.”
형진과 유아, 그리고 하마란은 제랄딘이 보내준 마차를 타고 그녀의 저택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보니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대미궁에 대한 얘기를 듣기 위해 그리칸에 머물고 있던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 지역 유지 등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는 어지간해서는 이런 모임 자체를 열지 않는 제랄딘의 초청에 얼씨구나 호응한 것 뿐인지도 모른다.
형진과 유아, 그리고 하마란이 마차에서 내리자 사람들의 시선은 일시에 하마란에게로 모아졌다. 원근감을 망가뜨리는 장신의 아리따운 여자가 고혹적인 스타일의 메이드복을 등장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선이 집중될 만한 일. 하지만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놀란 것은 옷차림이나 몸매, 외모 같은 것 보다 마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발동한 헌신의 일격 때문이다.
“서, 설마… 신성 폭…”
“쉿. 죽고 싶어?”
“크흠. 미안.”
하마란의 존재감이 너무나 엄청난 탓에 형진과 유아는 거의 배경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유아가 매료나 후광 같은 효과를 발동했다면 얘기는 달라졌겠지만, 처음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았던 그녀이기에 조용히 하마란의 존재감 뒤에 모습을 감추는 것으로 만족했다.
오찬장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귀여운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미엘이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사람들이 많아 놀라셨죠?”
“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게… 어쩌다 보니 일이 좀 커지고 말았어요. 따라오세요. 별실로 안내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미엘의 안내를 받아 별실로 들어서자, 곧바로 허름하지만 중후한 느낌의 정장을 차려입은 오귀스트와 살짝 미간을 찌푸린 표정의 제랄딘이 안으로 들어왔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정도에 불과하지만, 하마란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은 그녀의 저 표정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눌러 참고 있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동료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탓에 일이 이렇게 커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원래는 알고 계셨던 것처럼 제랄딘님이 저희들의 탐사 결과를 듣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조촐한 오찬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만, 왕국 최고 가문의 영애에게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에 흥분한 몇몇 녀석들이 그것을 떠벌이고 다녔고, 그 소문을 들은 지역 유지나 귀족들이 한발 걸쳐서 이렇게 밀고 들어온 것입니다. 정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본래 정식으로 초대장을 발부한 모임이라면 이런 식으로 밀고 들어오는 일이 가능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번 오찬은 그렇게 격식을 갖춘 것이 아니었고, 때문에 그 틈을 노려 제랄딘과 면식을 트고자 하는 이들이 밀고 들어온 것이다.
만약 예정보다 한두 명 정도 더 참석한 정도라면, 제랄딘도 아량을 베풀어 그냥 인정했을 것이다. 지금 모인 사람들도 그런 것을 예상한 것이겠지만, 결과는 이렇게 떼거지로 참석해 버린 모양새가 되었다. 이쯤 되면 완전히 민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늘 밀고 들어온 사람들은 이제 제랄딘에게 완전히 찍혀 버렸다. 앞으로 그리칸에서 그녀가 무슨 일을 벌이든, 오늘 밀고 들어온 이들에게 그 떡고물이 떨어질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하긴 그 정도로 끝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최소한 황자처럼 자고 있을 때 찾아가 목을 따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물론 여기서 더 짜증스럽게 하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정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오귀스트는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하고는 머리 숙여 깊이 사과했다. 제랄딘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이 없다가,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대답했다.
“할 수 없는 일이죠.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만 고개를 드세요. 오귀스트님.”
“감사합니다.”
“다만… 지금의 동료들과 앞으로도 함께 하는 것은 좀 생각해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최소한의 비밀 유지도 안 되는 이들에게 등을 맡기긴 어렵지 않겠어요?”
“…”
오귀스트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말이야 제랄딘의 의견이 백번 옳지만, 지금 데리고 있는 파티원들도 힘들게 모은 이들이다. 애초에 생면부지의 모험가들이 모여 서로를 의지한 채 던전을 돌파하는 일이 어디 그리 쉽겠는가. 그가 아무리 강해도 던전은 혼자 힘으로 돌파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니,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감내하고 이끌어 갈 수 밖에 없다.
그 때, 문득 옆에서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미엘이 씩 웃는다.
“오귀스트님. 혹시 새로운 파티원 필요하지 않으세요?”
“무슨…”
“여기 모인 인원들이라면, 꽤 훌륭한 파티원들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