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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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결성
오귀스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셨군요.”
그러자 제랄딘이 바로 고개를 젓는다.
“그건 아니에요. 이번 모임은 어디까지나 오귀스트님의 동료들에게서 경험담을 듣고, 정보를 얻기 위한 자리였어요. 저희들에게 저희들의 생활이 있는 것처럼, 오귀스트님에게도 오귀스트님의 생활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단순히 오귀스트님의 경험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보다, 아예 한 팀으로 움직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네요. 최소한 여기 모인 이들이라면 그 실력은 물론이고 신뢰라는 측면에서도 부족함이 없으니까요.”
“흠…”
오귀스트는 입술을 깨문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다만 형진이 데리고 온 메이드 두 명만이 어리둥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 모인 이들이라면… 저도 포함인가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유아가 슬며시 형진의 귀에 그렇게 속삭인다.
“물론.”
형진의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유아는 잠시 어버버거리더니 품위 있는 모습으로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는 제랄딘을 슬쩍 보고는 다시 묻는다.
“제랄딘님도요?”
“당연하지. 너는 잘 모르겠지만, 제랄딘님은 굉장히 강해. 그냥 평범한 귀족 영애가 아니라고.”
유아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진다. 하기야 믿기 어려울 거다. 처음 제랄딘 영애가 집행자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형진도 같은 반응을 보였으니까.
“정말요?”
“그래. 솔직히 나도 이길 수 있다고는 장담 못할 정도지.”
“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것은 유아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헌신의 일격을 몸에 두르고 있던 하마란 또한 새삼스러운 눈으로 방 안의 인물들을 살펴 보았다.
유아는 신녀다. 어떤 신을 모시는 신녀인지 하마란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무려 기적의 성광을 발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 신녀다. 그녀의 앞에서 눈빛을 반짝이고 있는 동물귀의 소녀는 또한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마법사. 자신과 진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면 제랄딘이라는 이름의 귀족 영애의 실력만이 미지수로 남는다. 만약 진의 말을 반만 믿는다 해도, 제랄딘은 상당한 강자라고 봐야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그런 느낌이 전해지지 않는데. 혹시 이 귀족 영애 역시 집행자인건가.
하마란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공연히 투지를 일으키자, 옆에 앉아 있던 형진이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를 나무란다.
“이 안에서는 괜찮으니까 그 칙칙한 기운 좀 꺼.”
“…”
칙칙한 기운이라니. 감히 신뢰와 헌신으로부터 전해 받은 헌신의 일격에 대고 어찌 그런 망발을.
하마란은 속으로 발끈 했지만, 결국 입술을 깨문 채 꾹 눌러 참고 헌신의 일격을 거둬들였다.
오귀스트 역시 가만히 주위의 이들을 살펴보았다. 다른 이들은 집행자들이니 딱히 문제가 없다. 걱정이 되는 건 진이 데리고 온 두 명의 메이드. 하지만 장신의 미녀 쪽은 딱 봐도 신성 폭력배이니 누구보다도 강력한 전위로 활용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역시 유아. 그녀가 희망과 생명의 사제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평생 싸움이란 것 근처에도 가본 적 없을 것 같은 이런 아가씨를 험악한 던전에 데리고 가는 건 역시 망설여지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조심스럽게 형진에게 말을 건넸다.
“다른 분들은 그렇다 쳐도 유아님은 조금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반승낙이나 다름없는 말이라 제안자인 미엘은 씩 웃음을 지었고, 유아를 데리고 온 당사자인 형진은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오귀스트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유아야 말로 이 파티의 핵심 전력이죠.”
“네? 제가요?”
갑작스런 형진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유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끙… 네가 놀라면 어떻게 해?”
“하지만… 전 누구와 싸워 본 적조차 없는 걸요.”
“괜찮아. 네 가치는 싸움과는 관련이 없으니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오귀스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맹한 아가씨가 핵심 전력이라니 누가 들어도 납득하기 어려운 얘기다.
“정확히 그녀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 저에게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형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우선, 그녀는 신녀입니다. 그것도 기적의 성광을 발할 수 있을 정도의.”
“허…”
기적의 성광. 그것은 범위 안에 들어오는 모든 인원의 어떠한 심각한 부상과 질병도 단숨에 치유해 버리는 강력한 이적이다. 신녀라는 존재 자체가 드물게 나타날뿐더러, 신녀라고 무조건 쓸 수 있는 능력도 아니다. 그런 능력을 이 맹해 보이는 아가씨가 쓸 수 있다니.
오귀스트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이미 모두 알고 있던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형진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최근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에게 한 가지 능력이 더 생겼습니다.”
“네? 정말요?”
이건 제랄딘이나 미엘도 모르는 일이다. 자신이 희망과 생명의 대리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아직 교단 내에서도 최고 사제급만 알고 있는 대외비였고, 집행자들 중에서도 그리칸 지부장인 기젤에게만 밝혀진 사안이다.
“그들에게 생긴 새로운 능력은 바로 타운 포탈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곳에 있더라도 사전에 등록한 신전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열어 바로 귀환할 수 있는 능력이죠. 유아가 함께 있는 한,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안전하게 복귀가 가능합니다. 어떻게 보면 던전 탐색에 있어 가장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능력일 수도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허… 그런 놀라운 일이.”
그렇다. 사실 형진이 타운 포탈을 굳이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에게 부여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도 있었다. 제랄딘도 그렇고, 형진도 그렇고 이렇게 급히 그리칸으로 돌아온 것에는 단순히 대미궁의 발견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가까운 곳에서 구경하고자 하는 의도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제랄딘은 애초에 가만히 집 안에 앉아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고, 형진 역시 그리칸에 처음 왔던 이유 자체가 던전 탐색이었다. 요리나 가공 등에 매진하느라 길을 좀 돌아오기는 했어도, 그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형진의 말을 들은 오귀스트는 밝아진 표정으로 유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미처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신녀님께 인사드립니다.”
“아, 아니에요. 저야 말로.”
화들짝 놀라 오귀스트에게 마주 인사하는 유아의 모습에 모두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지금까지 이루어지던 던전 탐색의 패러다임 자체를 뒤바꿀 수도 있는 사안이다. 모험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던전에 도전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일은 강대한 적도 위험한 함정도 아닌, 바로 던전 그 자체에 갇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뛰어난 트래커가 그 어떤 강자보다도 우대 받고, 수많은 마법사들이 안전한 귀환을 위한 여러 가지 수단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제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귀환 수단이 생겨났다. 무려 신의 힘을 빌린 수단이.
형진의 말처럼 유아의 가치는 탐색이나 전투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녀가 파티에 참가하는 순간, 그 파티의 인원들은 여벌의 목숨을 얻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또한 안전한 귀환을 보장받는다. 이것만으로도 그녀는 그 어떤 강자보다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단 하나 뿐이기 때문에.
“먼저… 던전이 일반적인 유적이나 동굴 같은 지형과 다른 점을 설명하겠습니다.”
새로운 파티의 결성이 확정되자 오귀스트는 자신이 가진 지식들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던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리스폰 현상에 있습니다.”
“리스폰이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어떤 한 지역에 존재하는 몬스터나 위협적인 수단들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본래대로 되돌아 가는 현상입니다.”
게임이라면 모를까, 사실상 또 다른 현실이나 다름없는 이 세계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형진은 속으로 크게 놀라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코어라고 불리는 던전의 심장에 있습니다. 이것이 제거되면 던전은 리스폰 기능을 잃게 되어 그저 평범한 지형지물로 바뀌게 됩니다. 모험가들 중에는 소규모 던전을 발견한 뒤 코어를 제거하지 않고 계속해서 리스폰 되는 괴물들을 사냥하는 식으로 돈벌이를 하기도 하지요.”
“허… 그런.”
“이번에 발견된 대미궁은, 미처 발견되지 않은 코어가 오랜 시간에 걸쳐 스스로 진화하여 생성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 정도 규모의 던전이라면 코어의 힘도 그만큼 막강할 터. 모험가들이 혈안이 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오귀스트의 설명을 듣고 있던 형진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파괴가 아니라 제거입니까?”
“그렇습니다. 코어는 그 자체로 막강한 힘을 지닌 아티팩트인 경우도 있고, 때로는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던 존재가 사멸하면서 남긴 힘의 잔재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강력한 힘을 지닌 무언가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던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을 겁니다.”
세상에. 그럼 던전 하나를 완전히 정복하면 그 순간 강력한 아티팩트 하나를 획득할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게다가 대미궁 정도의 규모라면 코어 역할을 하는 아티팩트의 위력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그럼 아티팩트라면 어떤 것이든 던전의 코어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실질적으로는 최소 희귀급 이상의 아티팩트가 오랜 세월에 걸쳐 사용되어 다듬어지고 강화되어 영성을 얻을 경우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단, 코어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는 순간 이러한 영성 또한 파괴되어 본래의 평범한 아티팩트로 돌아가게 되죠.”
“아하.”
과연. 제랄딘 정도 되는 귀족 영애가 이렇게 허겁지겁 그리칸으로 온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모르긴 해도 대미궁 정도의 규모라면 희귀는커녕 최소 전설급을 넘어 에픽급 이상일 수도 있다. 그 정도면 거의 국가간의 파워 밸런스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전략 무기에 가까운 수준일 터.
“그렇다면 다른 나라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겠군요.”
이 질문에는 제랄딘이 대답했다.
“현재 확인된 바로는 발디프스 대산맥에 인접한 다섯 개의 나라가 관심을 보이고 있고, 다른 나라들에서도 은밀히 움직이고 있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우리 라야바르트 왕국에서도 토너먼트가 끝나는 대로 대규모 탐사단이 결성될 것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흠…”
이렇게 되면 단순히 모험가 집단 몇 정도가 참가하는 수준으로 끝날 얘기가 아니다. 사실상의 국가 대항전이 개막된 거라고 봐도 틀림이 없다.
공교롭게 되었다. 만약 지금 상황에서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에게 타운 포탈 능력이 생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든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공작이 들어갈 터. 물론 그들의 참가가 탐사단의 무사 귀환에 큰 도움이 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지만, 평생 싸움이라는 것을 해본 적도 없는 호구신의 사제들이 공연히 입에 발린 말에 솔깃해서 던전 탐험 같은데 참가했다가는 보나마나 큰 피해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금족령을 내려야 할 것 같군.”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단 다음 최고 사제 회합에 안건을 상정해야겠지만, 그 이전까지는 대리자 직권으로 던전 탐색 파티에 대한 참가 금지 명령을 내려야 할 것 같다.
형진이 급히 공지를 작성해서 관리자 메뉴를 통해 발송하는 동안, 오귀스트와 제랄딘은 일정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일단, 오늘은 주변이 소란스러우니 내일 다른 곳에서 모여 준비를 갖추는 편이 좋겠습니다. 오늘은 저도 지도 같은 것을 지니고 오지 않은 상태라 더 이상의 구체적인 설명을 드리기가 어렵군요. 좋은 장소가 있겠습니까?”
“진님의 저택이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진님, 어떠세요.”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집안이 좀 어질러져 있는 상태라 어떨지 모르겠군요.”
“파티를 여는 것도 아닌 걸요. 모여서 간단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들은 내일 다시 모여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기로 하고 일단 그렇게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