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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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결성
집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형진은 유아에게 말했다.
“너 예전에 입었던 가죽 갑옷 아직 가지고 있어?”
“네, 일단은.”
“가져와봐. 쓸 수 있나 보게.”
“…”
그 말을 들으니 유아는 자신이 던전 탐색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비로소 피부에 와닿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드레스룸으로 쓰라고 한 방에서 가죽 갑옷을 가져 오면서도 불안한 표정을 짓는다.
“저…”
“왜?”
“정말 제가 도움이 될까요?”
“물론. 왜? 겁이라도 나?”
“조금요.”
형진은 피식 웃더니 그녀의 이마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고는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마. 나 못 믿어?”
유아는 대답 대신 얼굴을 살짝 붉혔다. 어째 다른 상황이 연상되어 버린 탓이다. 형진은 그런 유아의 모습에 다시 웃다가, 이내 그녀가 가져온 가죽 갑옷을 보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건 아무래도 안 되겠다. 용케도 이런 쓰레기를 입고 용병인 척 했구나.”
“그것도 간신히 구한 거에요. 돈이 부족해서…”
“나가자. 나중에 더 좋은 걸로 구해주겠지만, 그때까지 쓸 갑옷 정도는 새로 구해야겠다.”
던전 안에서 괴물들을 잡다보면 유아가 쓸 갑옷 정도야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내심은 만렙 토끼를 잡고 바니걸 슈트를 얻는 것이 어떨까 싶지만, 그건 아쉽게도 사제는 입을 수 없는 방어구다.
바니걸 슈트라…
문득 또다시 예전 일 하나가 떠올라 씁쓸한 표정을 짓던 형진은 유아가 외출 준비를 할 동안 슬쩍 크루그를 찾아갔다.
“있냐.”
“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크루그가 조심스럽게 나온다. 카트린은 낮잠을 자는 모양이다.
“실은 오늘…”
간단하게 제랄딘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크루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무래도 힘들겠네요. 그냥 집이나 지키고 있을게요.”
“역시, 그렇겠지.”
도시 근처에서 잠깐 움직이는 거라면 몰라도, 몇날 며칠을 나가 있는 건 크루그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몸이 불편한 동생을 돌봐야 하는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림도 있으니 단순히 보살피는 것만이라면 그가 아니더라도 상관이 없지만, 카트린의 장애는 신체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서 장시간 크루그와 떨어져 있는 것이 어떤 악영향을 초래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라이언하트라는 사기성 짙은 스킬을 지니고 있음에도 현재 형진의 주위 인물 가운데 가장 성장 속도가 떨어지는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경지까지는 지닌 바 재능과 라이언하트의 도움으로 빠르게 올라설 수 있어도, 다양한 실전을 겪을 수가 없으니 정체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도에서 있었던 수호자와의 대결에서 패배했던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알았어. 그럼 이곳의 일을 부탁한다.”
“네.”
선선히 대답하면서도 아쉬운 표정이 역력하다. 어떻게 보면 카트린이 발목을 잡는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상황. 그러나 애초에 크루그가 강해지고자 했던 이유 또한 세상에 오직 하나 남은 혈육인 그녀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동생을 지키고자 강해지려 하는데, 그 동생을 지키느라 더 강해지지 못하고 있으니, 크루그로서는 참으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단순히 신체의 장애라면 유아가 기적의 성광 한 번 써주면 되는 일이지만 그렇지가 못하니 문제다. 형진은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이번에 열릴 최고 사제 회합에서 한 번 다른 최고 사제들에게 문의를 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오랜 세월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을 해왔고,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뭔가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유아가 메이드복을 입고 나왔다.
“다른 옷도 많은데 왜 그 옷이야?”
“그냥 이게 편해요.”
“뭐… 상관은 없다만.”
메이드로서의 자각을 조금이나마 가지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예전이라면 몰라도 엄연히 자기 여자가 된 상황에서도 메이드복을 고집하는 것을 보니 조금 기분이 묘하다. 하기야 이브닝 드레스 같은 걸 차려입고 갑옷 맞추러 가는 것도 웃기는 일이긴 하다만.
“하마란. 너도 갑옷 하나 맞추는 것이 좋지 않겠어?”
장작으로 쓸 나무를 하러 갈 채비를 하는 하마란을 향해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불쾌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갑옷 따위, 저에게는 필요 없습니다.”
“쯧. 하여튼 고집하곤.”
재생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칼에 베이면 아픈 건 마찬가지일 텐데. 역시 광신도란 이해 못할 인종들이다.
그대로 유아를 데리고 상점가로 나가서 갑옷을 살펴보았다. 마침 대미궁의 소문을 들은 모험가들이 떼로 몰려온 상황이라 방어구나 무기를 파는 상점들은 큰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혹시 좋은 물건이 있나 싶어 살펴봤으나 아쉽게도 특별한 성능을 지닌 갑옷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역시 이런 데서 희귀급 아이템을 찾는 건 무린가.”
“희귀급이요?”
“응. 우리 집 메이드라면 최소 그 정도 방어구는 입어 줘야지 않겠어?”
“킥.”
아쉬운 대로 무난한 갑옷 몇 세트를 고른 후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특별하지 않다면 특별하게 만들면 되는 일. 마침 형진에게는 그런 기술이 갖춰져 있으니 쓰지 않으면 손해다.
“기본은 가죽 갑옷이 좋겠지.”
여러 가지 종류의 갑옷을 다양하게 구입한 것은 이것들을 분해해서 조합하기 위해서이다. 안쪽에 따로 옷을 받쳐 입겠지만, 날씨가 추워지니 방한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뉘집 메이드인지 몰라도 이렇게 주인이 갑옷까지 손수 만들어 주다니, 정말 복이 터졌다.
기본은 가죽 갑옷, 여기에 가슴을 보호하기 위한 흉갑을 달고 추가적으로 방어력이 필요한 부위는 징을 박아 보강한다. 옷깃과 장갑, 신발 부위에는 털가죽을 달아서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지 않도록 만든다. 문제는 이것을 입고 다닐 녀석의 힘이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무게도 감안을 해야 한다.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충 형태를 잡는 일이 끝나자 결합부를 보강한 다음 본격적인 세공에 들어간다. 흉갑이 지닌 곡선을 수정하고, 결을 만들어 공격을 받더라도 미끄러질 수 있도록 처리한다. 또한 치명적인 부위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공격을 막기 위한 방지턱 역시 부착한다.
어느 정도 작업이 완료되자 장식을 조금 넣었다. 끌로 살짝 홈을 파고 은으로 상감하니 제법 그럴 듯 하다.
“됐다.”
한나절을 꼬박 들여 마침내 갑옷 한 벌의 개조와 세공이 끝났다.
아이템정보
명칭 : 고급스러운 여성용 브레스트 아머
등급 : 고급
착용제한 : 여성
설명 : 정성을 담아 만든 복합 갑옷. 따뜻하다.
효과 : 방어력 증가.
강화시 효과 : 방어력 강화.
(세공 효과: 회피 소폭 증가, 힘 소폭 증가, 냉기 저항 소폭 증가)
“지금은 이 정도가 고작인가.”
완전한 자체 제작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 정도 성능이라도 뽑아낸 것이 어딘가. 어차피 잠깐 쓰다 말 아이템인데.
유아를 불러다 입혀 놓자 제법 그럴 듯 하다.
“가슴이…”
갑옷을 입는 것 자체가 어색한 모양인지 잠시 머뭇거리던 유아는, 자신이 느끼는 기이한 느낌의 실체가 가슴 부위에 여유 공간이 너무 많이 남기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형진은 그런 유아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최대한 커졌을 때를 기준으로 만들었어. 그것도 시험해 볼까?”
“지, 지금요? 입은 상태로?”
“왜? 뭔가 문제라도?”
“꺅! 자, 잠깐… 하응!”
시험해 보니 딱히 문제는 없는 것 같다. 입은 상태에서도 제법 발버둥을 치는 걸 보니 움직이는 데도 지장이 없는 것 같고. 다만 무게 때문에 금방 지치는 문제가 있기는 한데, 이 부분은 도핑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상관없을 것 같다.
“벼, 변태.”
헐떡거리며 유아가 그렇게 힐난했지만, 형진은 뻔뻔하게 대꾸했다.
“무슨 소리야. 이런 장비 테스트는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뭐라 해도 목숨을 지켜줄 물건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내구성 테스트도 해보자.”
“꺄앙!”
어쨌든 그렇게 투닥거리며 유아의 새로운 갑옷을 테스트 하는 일이 끝나고, 다음날이 되자 본격적인 던전 탐색의 일정을 잡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것이 이번에 제가 다녀온 곳의 개략적인 지도입니다.”
오귀스트가 가져온 지도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리칸으로부터 대미궁의 입구가 대략 어느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는지를 표시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자신들이 탐사한 미궁 내부의 지형을 표시한 지도였다. 어느 쪽도 정밀한 축척 따위를 기대할 수 없는, 다소 조잡한 느낌의 지도였지만 당장은 이 정도라도 감지덕지일 수밖에 없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저희가 다녀온 곳을 제외하고도 두세 군데 정도의 입구가 그리칸 인근에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입구의 지형이 완만하고 접근에 용이한 곳은 바로 이곳이죠. 또한 근처에 작은 화전민촌이 있는데, 베이스캠프로 삼기에 용이합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겁을 먹고 원래의 주민들은 도망가고 눈치 빠른 상인들이 자리를 잡은 상태지만요.”
“벌써요? 대단하군요.”
“그리칸과 가깝다고는 해도 편도로만 이틀은 걸리는 곳이니까요. 대신 물가는 아주 비쌉니다. 당연한 얘기겠습니다만.”
어찌 보면 이번에 대미궁이 발견되면서 가장 신이 난 것은 상인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제랄딘이 다른 질문을 던진다.
“가는 길은 어떻습니까.”
“말 한 마리가 끄는 수레 정도라면 어떻게든 화전민촌까지는 이동이 가능합니다만, 그 이후로는 노새 정도가 고작입니다. 베이스 캠프가 필요한 것도 사실 그래서입니다만, 우리들끼리 가는 거라면 딱히 물자 때문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겠죠.”
집행자들에게는 인벤토리가 있고, 고립된 상태라도 의뢰를 넣어 물자를 보급 받을 수가 있다. 과거에는 물자 조달 의뢰의 달성률이 낮아서 곤란한 부분이 있었지만, 호구신의 식솔들을 끌어들인 이후로는 아무리 늦어도 사흘 안에는 마무리가 되는 수준이다. 이래서 쪽수가 중요한 거다.
그들은 오귀스트가 제공한 지도를 토대로 구체적인 일정을 계획했다.
“공연히 시간 끌 이유도 없겠죠.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내일 당장 출발해도 문제는 없다고 보여집니다만.”
마음이 급한지 제랄딘이 그렇게 말했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미엘이 넌지시 한 마디 덧붙인다.
“오귀스트님은 다녀오신지 얼마 되지 않으니 좀 더 휴식을 취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장비 같은 것도 정비하고 하시려면.”
하지만 모처럼 미엘이 신경을 써주었음에도 오귀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정비라면 다녀온 즉시 거의 끝내 두었으니까요.”
정비라고는 하지만 오귀스트가 그 기간 동안 했던 일은 벌어들인 돈을 향락에 쏟아 붓느라 정신 못차리는 파티원들을 단속하고 잡으러 돌아다니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탐색을 거치고 돌아왔으니 그런 식으로라도 풀어야 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내가 왜 이딴 짓을 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오귀스트가 선뜻 미엘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는 더 이상 그런 귀찮은 일 때문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집행자들이 이런 식으로 떼로 몰려 던전 탐색에 참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페스타 같은 상황도 아닌데 오귀스트처럼 전문적으로 던전 탐색에 나서는 집행자가 오히려 보기 드문 경우다.
“오귀스트님.”
“네. 진님.”
“괜찮으시다면 오늘은 이곳에서 묵고 가시죠.”
“그래도 되겠습니까? 공연히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닐지.”
“괜찮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집에는 함께 술잔을 기울일 만한 녀석이 없어서 말이죠. 술친구가 되어 주신다면 저로서야 그저 감지덕지죠.”
“그런 거라면 거절할 수 없겠군요. 그럼 잠시 숙소에 가서 짐을 챙겨 오도록 하겠습니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오귀스트가 집을 나서자, 함께 배웅하러 나왔던 크루그가 슬쩍 한 마디 건넨다.
“오귀스트 아저씨도 이 집에 끌어들이려고요?”
“왜? 싫어?”
“아뇨. 다만 아저씨가 웬 일로 여자가 아닌 남자를 끌어들이나 싶어서요.”
“끙…”
도대체 이 녀석은 자신을 어떤 인간으로 보는 건가 싶은 생각에 잠시 앓는 소리를 내던 형진은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오면 대련이나 좀 해봐.”
“네?”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싶어 바라보는 크루그를 향해 형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오귀스트님이 원래는 꽤 유명한 기사였다며. 나는 물론이고 하마란도 그리 좋은 대련 상대는 아니지만, 저 아저씨라면 아마 즐겁게 대련에 임해 주겠지. 게다가 모험가를 하면서 인간뿐만 아니라 다양한 적을 상대해 봤을 테니 경험이라는 측면에 있어선 오늘 모인 사람들 중에 최강일거다. 대련 상대로서 그보다 더 훌륭한 사람은 찾기 힘들 걸.”
“…”
“조바심 낼 필요 없다. 사정이 여의치 않더라도 찾아보면 길은 있기 마련이니까. 알겠나. 소년.”
형진은 그렇게 말하며 씩 웃고는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크루그 역시 그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어 버렸다.
“고마워요. 형.”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물론 아쉽게도 형진은 그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