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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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결성
잠시 응접실에서 기다리자 급히 몸을 씻고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은 형진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들어온다.
“죄송합니다. 흉한 모습을 보여드린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네요.”
“별 말씀을요. 열심히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어찌 흉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라도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있자니 유아가 마실 것을 가지고 나온다. 흔히 마시는 차 같은 것이겠거니 하던 미엘은 자신의 앞에 놓여지는 생소한 무언가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이건 뭐죠?”
“빙수라는 겁니다. 깨끗한 얼음을 갈아서 눈처럼 만들고, 거기에 과일이나 시럽, 우유, 과자 같은 것을 곁들였습니다. 원래는 여름에 주로 먹는 디저트인데, 얼마 전에 눈이 내렸을 때 만들어 줬더니 미엘님도 맛을 보시라고 만들어 온 모양입니다.”
“아, 그랬군요. 고마워요. 유아님.”
“그런 말씀 마세요. 미엘님은 식구나 다름없는 걸요.”
“감사합니다.”
가만히 티스푼으로 한 입 떠서 입에 넣자 사그락거리는 눈처럼 잔 얼음 조각이 우유를 머금은 채 입 속에서 사르르 녹는다. 안에는 단팥과 작게 썬 과일 조각이 놓여져 있었는데, 함께 떠서 입안에 넣으니 이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대단해요. 어떻게 이런 걸 다 생각하셨어요?”
“제가 생각한 건 아니고, 전에 살던 곳에서 먹던 음식입니다.”
“아… 그렇군요.”
“다만 너무 먹으면 배탈이 날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찬 음식이 다 그렇긴 하지만요.”
엉뚱하게 새로운 디저트에 마음을 빼앗겨 열심히 스푼을 움직이고 있던 미엘은 자신을 바라보며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는 형진과 유아의 모습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빙수에 홀려서 음식 때문에 이곳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방심했다. 형진이 만든 음식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만 방심하고 말았다. 서로 맺어지더니만 이제는 유아도 닮아가는 모양이다. 무서운 커플 같으니.
“크흠. 유아님. 아주 맛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맛있게 먹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엘은 손수건으로 품위 있게 입을 닦고 난 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시치미를 뚝 떼고 본론을 꺼냈다.
“제가 오늘 이렇게 방문한 것은 오귀스트님이 던전 탐색에서 돌아오셨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까. 별 탈은 없으시던가요.”
“네. 그렇지 않아도 형진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전에 나누어 주셨던 요리가 아니었으면 큰 곤욕을 치를 뻔 했다고 말이죠.”
“감사는요. 어차피 공짜로 드린 것도 아닌데.”
말은 그래도 자신의 요리가 큰 도움이 되었다니 기분이 나쁘진 않다. 아니, 뿌듯하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현재 오귀스트님께서는 동료들과 정비를 하며 휴식 중이십니다. 조만간 저희 저택으로 방문하여 이번 탐색에 대한 설명을 하실 예정입니다. 진님께서도 혹시 이번에 발견된 대미궁에 관심이 있다면 함께 참석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야 그렇게 자리를 마련해 주신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언제 가면 되겠습니까.”
“오늘은 오귀스트님이 정비와 휴식을 하셔야 하니 힘들고, 내일 정오쯤에 모여 식사를 함께 하며 얘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실은 진님의 저택에서 모이는 것이 어떨까 싶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도시락 용기 때문에 정신이 없으신 데다 다른 모험가들도 함께 방문할 예정이란 점을 감안해서 제랄딘 님의 저택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형진이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지만 굳이 제랄딘의 저택으로 장소를 정한 것은 아마도 카트린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가뜩이나 낯을 심하게 가리는데, 낯선 사람들이 갑자기 우글거리기 시작하면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스트레스가 될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찾아뵙도록 하죠. 이렇게 직접 알려주러 오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미엘이 그렇게 소식을 전한 뒤 마차를 타고 돌아가자, 그녀를 배웅한 형진이 크게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끄으응!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쉴까. 아, 맞다. 너랑 하마란도 내일 함께 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해.”
유아는 형진이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먹은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갑자기 함께 가자는 얘기가 나오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네? 저도요?”
“물론. 뭔가 문제라도?”
“그건 아니지만… 혹시 던전 탐험을 해볼 생각이세요?”
“맞아. 왜? 모험가들이랑 만나려니 겁이라도 나는 거야?”
“그거야…”
사실 그런 면이 좀 있다. 신녀로서의 힘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거친 모험가들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두려움이 앞서는 탓이다. 물론 형진의 조치 덕분에 매료나 후광 같은 능력을 스스로 끄고 켤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희망과 생명의 사제라는 것이 발각되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걱정 마. 그래서 하마란도 데리고 가는 거니까. 일도 제대로 못하는 녀석을 내가 왜 굳이 메이드로 삼아서 데리고 있겠어. 그 녀석이 두건 쓰고 네 옆에 딱 버티고 있으면 모험가 백 명이 있다한들 너한테 말이라도 걸어볼 수 있을 것 같아?”
“풉!”
유아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신성 폭력배가 옆에 딱 버티고 있는데 누가 과연 집적거릴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게다가 다른 장소도 아니고 제랄딘의 저택인데.
“그러니 걱정 말고 내일 입고 갈 옷이나 골라놔. 하마란에게도 말해 두고.”
“네!”
유아로부터 내일의 일을 전해들은 하마란은 대번에 얼굴이 구겨졌다.
“저보고… 파티에 참석하라는 말씀이십니까?”
“파티는 아닐 거에요. 모험가들이 참석하는 오찬 정도로 보시면 되겠죠.”
오찬이든 파티든 남녀가 모여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라는 건 변함이 없다. 하지만 형진이 그렇게 하라고 지시를 내린 이상 불행히도 그녀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아, 참고로. 내일은 두건을 착용해도 좋다고 하셨어요.”
“…”
유아는 하마란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반응은 정 반대였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배교자. 감히 그 분의 상징을 몸에 걸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데. 딱 봐도 신뢰와 헌신의 수호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 옆에 세워 놓는 의미가 없는데.
“괜찮아요. 진님이 허락하셨다니까요.”
“진님이 저의 감독 권한이 가지고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것은 그의 권한으로 결정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드레스를 입으면 입었지, 두건을 착용할 수는 없습니다.”
“어어… 이러면 안 되는데.”
절대로 타협은 없다는 듯한 완강한 하마란의 태도에 유아는 잠시 버벅거리다가 일단 물러나 형진에게 그 말을 전했다.
“훗. 대충 무슨 생각인지 알겠군. 가서 녀석에게 지하의 수련장으로 내려오라고 전해.”
“네? 수련장이요? 어쩌시려고요?”
당황한 유아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형진은 씩 웃었다.
“말이 안 통하면 두들겨 패서라도 듣게 만들어야지. 요즘 좀 오냐오냐 해줬더니 슬슬 기어오르려는 모양이야. 자신이 왜 그런 처지가 되었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만들어 줘야지.”
“괜찮… 으시겠어요?”
“괜찮아. 그러니 가서 전해. 난 미리 내려가 있을 테니.”
“…”
유아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형진이 먼저 수련장으로 내려가자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하마란에게 전했다.
“바라던 바입니다.”
하마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에서 불길 같은 기운을 뿜어내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지하 수련장으로 내려갔다.
“어서와.”
“…”
형진은 어느 틈엔가 장비를 모두 착용한 채 하마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 시작해 보자고. 어딘가의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좋은 주먹 내버려두고 말로 할 필요는 없는 일이니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마란의 몸에서 불길과도 같은 거대한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바로 헌신의 일격이다.
비록 온전한 수호자였을 때와는 달리 다소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쌓인 울분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외부로 드러나는 힘의 크기는 이전보다 훨씬 강렬하게 느껴질 정도다.
“좋군. 와라!”
“탓!”
형진의 말이 떨어진 순간, 하마란은 거대한 파도처럼 형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주먹에 쏟아 부은 채 휘둘렀다.
오직 눈앞의 상대를 부숴버리겠다는 의지만으로 가득 찬 강맹한 일격.
“훗.”
하지만 형진은 마치 투우사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미끄러지듯 옆으로 몸을 움직여 그 일격을 피했다.
“!”
또 달라졌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매끄러운 형진의 움직임에 하마란은 눈을 크게 떴고, 다음 순간 팔꿈치 위로 올라오는 오페라 글러브가 길게 찢기며 붉은 선혈이 허공으로 터져 나온다.
“큭!”
하마란은 살가죽이 찢기는 고통에 작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몸을 뒤집듯 회전시키며 등주먹으로 형진을 노렸다.
팡!
하지만 그 일격은 애꿎은 대기를 찢어발길 뿐 형진을 맞추지 못했다. 어느 틈엔가 허깨비처럼 훅 하고 꺼지듯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마란은 형진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이내 감각의 끄트머리에 잡힌 묘한 존재감을 깨닫고는 그곳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거기냐!”
퍽!
그러자 주먹에 무언가 닿으며 부스러지는 느낌이 전해진다. 하지만 뭔가 다르다. 인간의 뼈와 살이 부서지는 감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통나무?”
그렇다. 하마란이 단숨에 박살내 버린 것은 바로 통나무였다. 하지만 어째서. 분명히 인간의 그것에 근접한 존재감을 느꼈었는데.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하마란의 감각이 잘못 된 것이 아니다. 방금 그녀가 부숴버린 통나무는 분명히 인간에 준하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해답은 바로 세공이었다. 형진은 환영의 반딧불을 통해 모습을 감추는 순간 인벤토리에서 통나무 조각 하나를 꺼내서 던져 놓았는데, 이 통나무에는 세공으로 인간의 형상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간단히 말해, 하마란은 찰나의 순간 미엘이 룬에 홀렸던 것처럼 세공된 형상의 존재감을 인간의 그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름 하여, 통나무 분신술!
아직 스킬로 확립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하마란 정도의 강자를 현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술인 셈이다.
산산이 부서지며 허공에 비산하는 통나무에 잔해를 바라보며 당황해 하는 사이, 어둠 속에서 형진의 모습이 환영처럼 스르르 나타난다. 하마란은 화들짝 놀라며 형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 일격은 완전히 뻗어지기도 전에 그것을 기다리던 형진의 인스턴트 킬에 의해 파훼되었다.
“큭!”
온전히 체중을 싣지 못한 상태에서 엉겁결에 휘두른 일격 따위, 형진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의 집중력은 거듭된 세공 수련으로 말미암아 거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고, 그런 상태에서라면 이런 어정쩡한 일격 따위 어떤 상황에서든 인스턴트 킬을 발동해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공격이 인스턴트 킬에 의해 파훼되고 찰나의 순간 신체가 경직 상태에 빠지자, 형진의 손에 들린 단검은 가차없이 하마란의 심장을 향해 뻗어 나왔다.
죽는 건가.
하마란은 자신의 심장을 향해 날아드는 차가운 빛의 단검을 바라보며 죽음을 예감했다. 그러나,
쫙!
뒤이어 들려온 것은 무언가가 찢겨지는 듯한 소음이었고, 다음 순간 하마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몸에 걸치고 있던 메이드복이 단숨에 갈기갈기 찢겨지며 자잘한 헝겊조각으로 변해 허공에 흩날리는 광경이었다.
[인스턴트 킬! ‘섹시한 그리칸풍 메이드복’이 파괴되었습니다!]형진은 눈앞에 여과 없이 드러난 채 사정없이 출렁이는 하마란의 커다란 가슴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사이즈가 맞는 속옷이 없어서 위쪽은 입지 않았었나 보군. 아주 바람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