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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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어서와!
어쨌든, 미엘의 말대로 잠시 지나자 공작의 전령이 와서 방문의사를 전했고, 조금 시간이 지나 오후의 티타임 시간에 맞춰 다시 한 번 공작가문의 화려한 마차가 형진의 저택을 방문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급작스러운 방문에도 환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별 말씀을. 안으로 들어가시죠. 날이 춥습니다.”
“그러지요.”
현관에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그들은 곧바로 응접실로 향했고, 자리를 나누어 앉자 미엘이 차를 내왔다. 그리고 차를 가져온 미엘이 밖으로 나가자, 응접실 안에는 형진과 공작, 그리고 제랄딘 만이 남았다. 물론 미엘의 본신은 목도리를 가장하고 모른 척 형진의 목을 휘감고 있었다.
공작은 잠시 차를 음미하며 뜸을 들였다. 막상 오기는 했는데, 이렇게 마주 앉으니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하다. 대놓고 정체가 뭐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그 부분을 따지지도 않은 채 약혼 얘기를 꺼내자니 뭔가 찜찜하고.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하지만 그런 공작과는 달리, 제랄딘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형진에게 메시지를 던졌다.
[진님.] [네, 제랄딘님.] [저한테 숨기는 거 있으시죠?]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형진의 모습에 제랄딘은 속에서 뭔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 느껴졌지만, 일단 꾹 눌러 참았다.
[시치미 떼지 말아요. 미엘 언니한테 다 들었어요.] [무엇을 들었는지 한 번 말씀해 보시지요. 저도 궁금하니.]쳇.
역시 이 정도의 가벼운 낚시에는 걸리지 않는 건가. 제랄딘은 속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뭔가 거대한 집단을 이끌고 있다면서요. 순둥이 호구라고 했던가요?] [아아, 그 얘기였군요. 뭐…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게 뭐죠?] [비밀입니다.]담담한 형진의 반응에 제랄딘은 어째서인지 다시 한 번 울컥 하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가족이라는 말로 선을 긋는 형진의 태도에 제랄딘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비로소 공작이 입을 열었다.
“실은 어제 일을 겪고 나서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해합니다. 저도 좀 당황스러운 하루였으니까요.”
“그러셨군요. 그런데, 실은 오늘 좀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얘기 말씀이신지.”
“왕족보다도 고귀한 직분을 맡고 계시다지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미엘에게 대략의 자초지종을 들은 바 있는 형진은 공작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것은 가족 외에는 함부로 말하기 어려우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
제랄딘과 마찬가지로 공작 역시 가족이라는 말로 선을 긋는 형진의 태도에 난감해지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형진의 말은 에둘러 거부의 의사를 보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제 이미 제랄딘과의 정략결혼에 대한 내용이 거론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공작이나 제랄딘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의사를 확실히 정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한 말이기도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내 가족이 되어라. 그리 하면 내 진정한 신분은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되리라.
가족이 되라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크루그가 말해던 것처럼 형진의 신분을 벨크라드진 왕자로 인정하고, 제랄딘과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확정하자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건 공작으로서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애초에 형진의 신분을 알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딸을 맡길 수는 없으니 그것을 먼저 확인하고자 하는 것 아닌가.
공작과 제랄딘은 처음부터 일이 단단히 꼬여버린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감탄했다. 고작 가족이라는 한 마디 말로 자신들을 이렇게 궁지로 몰아버릴 수 있는 남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차라리 집행자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공작을 압박했다면 그런가보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형진은 자신이 감추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확실하게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가 버렸다. 이런 감각은 익히고자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작은 고작 몇 마디 말로 자신을 이렇게 궁지로 몰아넣은 형진의 당당한 태도에 크게 감탄했다. 크루그도 평범한 소년은 아니지만, 눈앞의 청년 역시 욕심나는 인재임을 이제는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반드시 가족이어야만 하는 겁니까.”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공작의 말에 형진은 씩 웃으며 제랄딘을 흘깃 바라보고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공작님은 온전히 남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 다른 이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신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신다면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
신의 이름에 걸고 하는 맹세라는 부분은 차라리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남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말이 공작과 제랄딘에게는 더 크게 다가왔다.
“남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세한 내용은 제랄딘님의 명예와도 관련이 있는지라 감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
유들유들한 형진의 대답에 공작은 대뜸 제랄딘을 돌아보았고,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얼른 형진에게 메시지를 던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미쳤어요?] [제가 뭘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아버지가 오해하시잖아요.] [오해라뇨. 엄연한 사실인데.] [무슨…] [이미 서로 볼 거 다 본 사이 아닙니까. 맨살을 만져보기도 했고.]그러긴 했다. 성소에서 온천을 훔쳐보다 걸렸을 때, 그런 식의 일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형진의 메시지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형진이 느믈거리는 미소마저 지은 채 그렇게 말하자 제랄딘은 분노하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아마 옆에 아버지가 없었다면 단박에 힘을 개방하며 덤벼들었을지도 모른다.
[전에 그러셨죠? 집행자가 된 이유가 정략결혼 따위로 옭아매려고 드는 자의 목을 따기 위해서라고.] [그랬죠.] [그렇다면 당신이 화를 내야 할 대상은 제가 아니라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당신의 아버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하지만 제랄딘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형진이 얼씨구나 하고 자신의 메시지를 받아주며 계속 대화를 이어가는 진정한 목적을.
“허…”
문득 공작이 작게 탄식하며 이마를 짚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만약 형진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제랄딘의 성격상 단숨에 발끈하며 따지고 들었어야 옳다. 그래서 공작은 기다렸다. 딸의 입에서 뭔가 말이 나오기를. 하지만 자신의 딸은 크게 화가 난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끝내 한 마디 반박도 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만을 가지고 형진이 한 말의 구체적인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두 남녀 사이에 뭔가 일이 있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제랄딘의 반응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공작이 고뇌에 잠긴 동안에도 형진과 제랄딘은 칼만 안 빼들었을 뿐이지 메시지로 엄청난 설전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그의 판단은 다른 방향으로 결정되었겠지만, 아쉽게도 공작은 그들의 메시지를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결국 공작은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이미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더 망설일 필요가 없겠지요.”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가족이 됩시다. 그거면 되겠습니까?”
“아버지!”
제랄딘은 기겁을 하며 외쳤지만, 공작이 다시 뭐라고 하기 전에 형진이 말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저로선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요. 그럼 가족이 되셨으니 제 신분 가운데 하나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잠깐만요. 아버지! 그렇게 간단하게…”
“조용.”
“…”
공작의 한 마디에 제랄딘이 반사적으로 입을 다문 그 틈을 노려서 형진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저는 희망과 생명의 여신을 대신해 교단을 관리하는 대리자입니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공작은 물론이거니와 제랄딘 역시 크게 놀라고 말았다.
[지금 뭐라고…] [희망과 생명의 대리자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공포와 죽음의 집행자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희망과 생명의 대리자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공포와 죽음께서도 인정하신 일이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하지만 공작의 놀라움은 제랄딘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비록 희망과 생명이 호구신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그 신도 수에 있어서는 다른 어떤 교단보다도 많다. 귀족들 가운데도 은근히 신도가 많은 편이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포션 생산을 독점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거대한 교단 전체를 관리하는 대리자라니!
공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은 엘 파르드와의 전쟁을 눈앞에 둔 상황. 전쟁에 필요한 물자 가운데 중요한 것은 우선 식량과 무기를 들 수 있지만, 그것과 동등 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물자가 바로 포션이다. 방금 전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남자는 전투식량 외에도 포션이라는 엄청난 가치의 물자를 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엄청난 권력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공작은 미엘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절실하게 이해했다. 이것은 실로 그 어떤 왕도 누리지 못한 엄청난 권력. 신을 대리하는 존재라니. 그런 자를 이렇게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다니!
혹시 거짓말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호구신이라 불린다 해도 신은 신. 아무리 대담한 사기꾼이라 해도 감히 신의 이름을 팔아먹진 못한다. 신들은 그토록 무서운 존재다.
“그럼… 신녀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공작의 말에 형진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유아는 여신께서 맺어주신 저의 소중한 반려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공작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미 반려가 있는 상대라고는 해도, 상대는 무려 신의 대리자다. 이미 반려가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여신의 대리자에게 여신이 직접 정해준 반려를 저버리라고 할 수도 없는 일. 게다가 이미 쌀이 익어 밥까지 된 상황이라면, 지금껏 고이 기른 딸이 아깝기는 해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니 제랄딘의 태도도 의심스럽다. 정략결혼이라면 질색팔색을 하던 아이가 뜬금없이 약혼을 하겠다고 나선 것부터 시작해서, 그것이 감쪽같이 사라져서 외박을 했다가 돌아와 한 얘기라는 점도 마음에 걸린다. 그러고 보면 토너먼트 때도 굳이 이 집 식구들을 수도로 불러들여 별채에 머물게 했었다. 그때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도 의심스럽다.
그런 식으로 심증들이 하나둘 합쳐지자, 결국 공작은 무겁게 탄식하며 이렇게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군요. 곱게 기른 아이라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고 고집이 셉니다.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신다니 부디 잘 부탁드릴 뿐입니다.”
“컥!”
제랄딘은 청천벽력 같은 아버지의 말에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