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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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어서와!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던 제랄딘은 저택으로 돌아가는 공작을 배웅하고 돌아온 형진이 맞은 편에 다시 앉은 뒤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날… 어쩔 셈이죠?”
바짝 독이 오른 고양이, 아니 암표범 같은 느낌이다. 말 한 마디 잘못하면 곧바로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싸움이 붙을 듯한 분위기랄까. 마침 미엘이 다시 차를 타오자, 형진은 일단 제랄딘에게 찻잔을 건넸다.
“그거야 저보다는 당신에게 달린 일이겠죠.”
“그건 또 무슨 소린가요.”
“간단한 얘깁니다. 지금의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엄연히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얘깁니다. 솔직히 말해 당신이 절 거부하고 이 방을 박차고 나간다면 제가 어찌 그걸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요?”
“…”
막는 것 자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형진이 제랄딘을 강제로 뭘 어떻게 하려고 든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엘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미엘은 형진을 배우자로 정한 상태지만, 그녀에게 있어 제랄딘은 딸이며 동생이기도 하고 또한 제자와도 같은 이다. 형진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제랄딘이 몸을 피할 시간을 벌어주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얘기다. 형진은 이미 던전에서 제랄딘과 맞붙어 싸워 이긴 전적이 있긴 하지만, 전력을 전개한 미엘이 제랄딘 편을 든다면 그 싸움은 이미 해보나 마나다. 단순히 승패의 문제를 넘어서, 그런 식으로 미엘의 마음까지 잃을 일을 형진이 할 이유도 없고.
하지만 이런 식의 말을 듣고 보니 제랄딘으로서는 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강제로 자신을 어떻게 해볼 생각이 아니라면,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단순히 날 어떻게 해 볼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건 아니라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솔직히 여자라면 더 이상은 감당 못해요. 미엘만 해도 10인분입니다. 제가 미엘과 첫날밤 치렀다가 거의 일주일 넘게 골골 거렸던 거 기억 안 납니까? 켁!”
“그런 얘기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크흠. 미안.”
가만히 목도리 행세를 하고 있던 미엘이 참지 못하고 형진의 목을 조른다. 제랄딘은 지금 누구 놀리나 싶어 다시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깊게 심호흡하며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렇다면 다른 필요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로군요.”
“맞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필요성 때문이었다면 좀 더 온건한 방법도 있었겠죠.”
“그건 또 무슨 말인가요.”
“요컨대 이런 얘깁니다. 이번 일을 통해, 당신이 언제든 필요에 따라 엉뚱한 곳으로 팔려갈 수 있는 위치임을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기왕 그렇다면, 괜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먼저 선점을 해두는 편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
제랄딘은 입술을 깨문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화가 나는 대상은 물론 눈앞에 앉아 있는 형진이었지만, 자신의 말 한 마디 제대로 들어보지 않고 이런 결정을 내려 버린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분노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상황 자체가 형진이 쳐놓은 덫에 의해 교묘하게 흘러가 버린 면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단숨에 결정을 내렸어야만 하는가라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제랄딘의 모습을 보며 형진은 속으로 씩 웃었다. 괜히 자신에 대한 분노를 어설프게 다독이려고 해봐야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역효과만 나게 마련. 하지만 그 분노의 방향을 살짝 비틀어 다른 사람에게 향하도록 만들면 어떨까. 자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언제까지나 자신의 편일거라 생각했던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뒤통수를 후려갈긴 상황이라면 이건 꽤 효과적인 방법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제부터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그건 온전히 당신의 자유입니다. 이참에 귀족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온전히 집행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요. 당신에게는 이미 그러고도 남을 정도의 충분한 힘이 있으니까.”
“괜히 말 돌리지 말고 본심을 말해요. 날 이런 식으로 끌어들인 진짜 이유를.”
으르렁거리는 듯한 느낌으로 제랄딘이 그렇게 말하자 형진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역시 제랄딘님.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실은 제가 얼마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사업이 하나 있습니다.”
제랄딘의 얼굴은 다시 와락 일그러졌다. 고작 사업 하나 때문에 자신을 이 지경으로 내몰았는가 싶어서.
“사업이라고 해서 작은 구멍가게 같은 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요?”
“이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한 물류 사업입니다.”
“…”
제랄딘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곧바로 눈이 크게 떠지는 그녀의 반응에 형진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희망과 생명의 대리자입니다. 이 역할을 맡게 되면서 제가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이 바로 타운 포탈의 능력을 사제들에게 부여하는 것과, 집행자들에게 주어지던 물자 조달 의뢰를 그들에게도 공유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아!”
최근 들어 물자 조달 의뢰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해결 속도를 보이는 것 정도는 제랄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형진이 취한 조치 때문이었다니.
과연. 이런 이유 때문에 공포와 죽음께서 이 일을 허락하신 것인가.
물자 조달 의뢰만 제대로 활성화되어도 집행자들이 의뢰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된다. 물이나 식량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에서는 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자재 등을 의뢰라는 수단을 통해 조달할 수 있게 되면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들 그런 필요성은 인정을 하고 있었어도 막상 그런 귀찮은 일을 자신이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희망과 생명을 사실상 공포와 죽음의 하부 조직으로 끌어들임으로서 사실상 유명무실할 정도로 적체되어 있던 물자 조달 의뢰의 숨통을 확 틔워 놓고 말았다.
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그것 하나만으로도 공포와 죽음께서 그가 희망과 생명의 대리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인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미 눈치 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두 가지 기능은 잘만 사용하면 놀라울 정도의 일을 벌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의 꼼수를 동원해야만 합니다.”
“서로 다른 신전에 속한 두 명이 짝을 지어 타운 포탈을 사용한다든지.”
“바로 그렇습니다. 역시 똑똑하시군요.”
칭찬을 받자 조금 기분이 좋아졌던 제랄딘은 그런 자신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다시 눈에 힘을 주었다.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된다. 눈앞의 이 남자는 고작 몇 마디 말로 자신을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형진은 대번에 그녀의 표정 변화를 알아챘지만, 모르는 척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는 호구신의 사제들 가운데 한 명쯤은 이런 발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이용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식견과 능력을 가진 이가 나타날 줄 알았습니다. 설마 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제들 중에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실행을 할 만한 과감한 행동력을 지닌 이가 단 한 명도 없겠냐 싶었던 거죠.”
“하지만, 없었다.”
“그렇습니다. 이 착해 빠진 호구신의 사제들은 물자 조달 의뢰로 돈을 벌기 시작하자 다른 곳에는 일절 눈도 돌리지 않고 그것만 열심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성실함은 인정해야겠습니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런 애들 데리고 어떻게 대리자 역할을 수행해야 하나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더군요.”
“훗… 크흠.”
넋두리를 늘어놓는 형진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던 제랄딘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헛기침을 했다. 물론 그래봐야 이미 늦은 일이었지만 말이다.
형진은 그런 제랄딘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을 맺었다.
“이쯤 되면, 제가 당신에게 맡기려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짐작이 되실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 세계 전체를 상대로 한 거대한 사업. 온전히 당신에게 맡겨 보고 싶습니다. 생각이 있으십니까?”
“뭘 믿고 저에게 그런 일을 맡기겠다는 거죠?”
“그야 당연히 지금까지 제가 보고 느꼈던, 제랄딘이라는 이름의 고귀한 여성이 지닌 식견과 능력, 그리고 사람됨을 믿는 거죠.”
“…”
정말 말이나 못하면. 이럴 거라면 진작 말을 해줬으면 좋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제랄딘은 문득 아까 나눴던 대화 중 일부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별 일 아닐 수도 있지만, 의외로 파급력이 큰 일이라 가족이 아니면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던 형진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형진은 그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이건 그냥 좀 파급력이 크다고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 자체로 이 세계 전체의 경제를 손에 쥐고 흔들 수도 있는 엄청난 일이다.
가슴이 뛴다.
비록 왕국 최고 가문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나 다른 여자들은 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일을 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가 그녀의 한계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에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가 될 수밖에 없고, 아무리 능력을 키운다 한들 이번에 맡았던 전투 식량 수급과 같은 일 이상은 맡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여성으로 태어난 자신의 한계라고나 할까.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하나의 기회가 펼쳐졌다. 지금까지 그 어떤 인간도 해보지 못했던 일이 그녀의 눈앞에서 손짓하고 있다. 분명 힘들고 고될 것이 분명하지만, 세상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엄청난 일이다.
이런 일,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떻습니까. 저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은근한 표정으로 웃으며 묻는 형진의 모습에 제랄딘은 침을 꼴딱 삼키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얘기를 듣기 전이라면 몰라도, 이 얘기를 듣고서도 거부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은 그녀에겐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결국 그녀는 형진이 내민 달콤한 미끼에 손을 뻗고 말았다.
“맡겨 주신다면,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그러자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지시를 내렸다.
“그럼 가서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오십시오.”
“옷이요?”
“그런 드레스차림으로 일을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군요.”
“전에 입었던 메이드복이 그대로 있을 겁니다. 자, 어서 움직이십시오.”
“…”
메이드복? 그냥 간편한 평상복이 아니라?
제랄딘의 눈빛이 의구심으로 물들자, 형진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의 시선을 직시하며 다시 말했다.
“뭔가 문제라도?”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변태적인 취향에 맞추어 복장을 갖추는 것이 이 일에 반드시 필요한 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을 뿐입니다.”
과연 제랄딘. 이 상황이 되어서도 저 성격을 굽힐 생각은 조금도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즐거운 일이다. 제랄딘이 고분고분하면 오히려 그게 더 불안하지 않을까.
“물론 필요합니다.”
“어째서요?”
“보기 좋으니까. 기왕이면 일은 즐겁게 하자는 주의라서 말이죠.”
“…”
너무나도 당당한 말에, 제랄딘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가만히 이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던 미엘마저도 한숨을 푸욱 내쉬어야만 했다.
일단 그날은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집안의 식구들에게 다시 인사를 하고 대략의 구상을 하는 정도로만 일을 끝냈다.
유아는 제랄딘이 손님이 아닌 식구로서 이 집에 머물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의구심 어린 눈초리를 형진에게 보냈지만, 정작 그녀에게는 오히려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 왔다.
착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지금까지야 친하게 지내왔다 하더라도 자칫하면 라이벌이 될 수도 있는 자신에게 오히려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오다니. 하지만 그녀만이 아니었다. 미엘도 기왕 이렇게 된 거 서로 힘을 합쳐 잘 헤쳐 나가자며 격려를 한다.
하긴 저 진이라는 남자를 생각하면 이게 오히려 맞는 건가. 이쯤 되고 보면 제랄딘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 관념에 혼란이 올 정도다.
어쨌든,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제랄딘의 첫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꽤 여러 가지로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 많았던 데다, 바뀐 처지 때문에 잠을 설친 탓에 늦은 시간이 되어 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다.
제랄딘은 부드럽고 포근한 깃털 이불 속에 파묻힌 채 꿀맛 같은 단잠에 빠져 있다가, 느닷없이 누군가 시트를 확 뒤집어 버리는 바람에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며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녀는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언능 못 일어나!”
그것은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감격에 겨워하며 호통을 치고 있는 형진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