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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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비경
바닥에 굴러 떨어지며 비명을 지르는 제랄딘을 보며 감격에 몸을 떠는 형진의 모습에 목도리 상태의 미엘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캬하. 바로 이거야. 역시 아침에는 이게 있어야 아 새로운 날이 밝았구나 하는 느낌이 팍 하고 꽂힌다니까.”
“못 살아.”
미엘은 얼른 꼬리 가운데 하나를 불러낸 다음, 이불과 시트에 휘말린 채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제랄딘을 부축해 일으켰다.
“이, 이, 이게 무슨 짓이죠?”
난생 처음 이런 꼴을 당해보는 제랄딘이 잔뜩 화가 치밀어 오른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형진은 유들유들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무슨 짓이라뇨.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고 있는 겁니까? 세상천지 어디에 주인보다 늦게 일어나는 메이드가 있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다. 분명히 맞는 말이긴 한데 저렇게 건들대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맞다고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맞건 틀리건 간에 일단 한 대 쥐어박고 싶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제서야 확실히 깨달았다. 어제 유아와 미엘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왜 불쌍하다는 듯이 자신을 보았는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감싸 쥐자, 미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괜찮아요? 어디 부딪히거나 간 거 아니에요?”
“아니야, 언니. 그리고 나 이제는 아가씨 아니니까 그냥 말 편히 해도 돼.”
“그건…”
어느새 형진은 건들거리며 방을 나간 뒤다. 미엘은 이불과 시트를 정리하려고 하는 제랄딘을 도우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정말로 괜찮겠어요?”
“뭐가?”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대로 저 사람 밑에서 일하는 거 말이에요.”
“이미 결정 난 일이잖아. 다 봐놓고.”
“그거야 그렇지만.”
침대의 정리가 끝나자, 제랄딘은 일단 문단속부터 한 다음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는 않다. 지금껏 그녀는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옷을 갈아입은 것이 손에 꼽을 정도다. 제랄딘의 주위에는 언제나 시녀들이 있었고, 그녀들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모두 수발을 들어주는 존재였다.
보다 못한 미엘이 도우려 했지만, 제랄딘은 고개를 저었다.
“옷조차 혼자 못 갈아입는 메이드라니, 웃기지 않아?”
“하지만…”
“그나저나 말 편하게 하라니까. 자꾸 그러면 나도 말 높일 거야. 끙… 이거 왜 이렇게 안 되지.”
“훗. 이렇게 하는 거야.”
코르셋 비슷한 느낌으로 허리를 졸라매기 위한 끈을 당기느라 끙끙대는 제랄딘의 모습에 미엘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하기야 그녀가 얼마나 고집쟁이인지는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고마워. 그런데 언니.”
“응?”
“메이드는 아침에 뭘 해야 하지?”
“글쎄?”
사실 형진은 뭘 하라고 딱히 정해주거나 하는 타입이 아니다. 당장 림이나 하마란을 봐도 자기가 할 일은 알아서 찾아 하는 쪽이다. 물론 자신이나 유아는 말할 것도 없는 일이고.
“그냥 어제 하던 일을 마저 하면 되지 않을까. 진이 제라를 데리고 온 건 시시한 청소나 허드렛일에 쓰려고 그런 것이 아니니까.”
“그럼 다행이지만.”
제랄딘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젯밤에 잠을 설친 이유 중에 하나는 혹시라도 형진이 밤에 자신을 찾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제 제랄딘의 그에게 속한 신세가 되었고, 그건 다시 말해 형진이 그럴 마음이 있다면 언제든 손을 뻗을 수 있다는 얘기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제랄딘이 순순히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전제 하에서의 얘기이고, 항상 형진에게 붙어있는 미엘이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거란 믿음이 있긴 해도, 무작정 마음을 놓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어쨌든 옷을 챙겨 입는 일이 끝나자 씻고 간단하게 단장을 마친 뒤 주방으로 내려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형진이 불쇼를 보여주고 있긴 한데, 어쩐지 분위기가 좀 흥분된 느낌이다.
“무슨 일 있어요?”
제랄딘이 자리에 앉으며 묻자, 유아가 흥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카트린이 걸었어요!”
“네?”
혹시 자신이 식구가 된 것 때문에 그런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던 제랄딘은 이내 휘둥그레진 눈으로 살짝 상기된 표정의 카트린을 바라보았다.
“대단한 건 아니에요. 아직… 한두 걸음 정도 밖에는. 꺅!”
“대단하지 않기는! 대단해요! 카트린은 정말 대단해요!”
수줍은 듯 그렇게 대답하는 카트린의 모습이 너무 귀여운 나머지, 유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트린을 와락 껴안았다.
“어떻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걷지 못하는 이유조차 모르고 있지 않았던가. 단순히 신체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라 신녀인 유아조차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무엇이 이 소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그런 식의 의문 섞인 시선을 던지고 있자니, 크루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형진에게 고개를 숙인다.
“모두 형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됐다. 흰 소리 말고 자리에 앉아. 자식이 쑥스럽게스리. 크흠.”
“킥킥.”
“쑥스러워 하는 모습이 은근 귀엽죠?”
“네, 유아 언니. 오빠는 귀여워요.”
설마 이것도 형진의 솜씨란 말인가.
“자아! 카트린에게 일어난 기적을 축하하는 의미로 축하 케이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으랏차차차차차!”
“와아아아!”
결국 그날 아침 식사는 삼단 홀케이크로 해야만 했다. 특히 카트린의 모습을 귀엽게 데포르메한 모습으로 밀가루와 설탕을 이용해 만들어낸 인형은 지켜보는 이들 모두의 감탄을 자아내도록 만들 정도였다.
그렇게 떠들썩한 아침 식사가 끝나자, 형진은 유아와 미엘, 그리고 제랄딘을 대동한 채 신전으로 향했다.
다만 제랄딘의 경우엔 약간의 변장을 해야만 했다. 브라드로슈 가문의 금지옥엽이 메이드복을 입은 채 남자 뒤를 따라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가는 난리가 날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단… 조만간 셋을 위한 별도의 등급을 만들 생각이야. 그렇게 되면 굳이 신전까지 갈 필요없이 집에서도 회합장을 이용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일단 제랄딘에게 신전의 분위기도 보여줄 겸 가는 것이니 그렇게 알아.”
“네.”
유아는 신전에 가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쾌활하게 대답했지만, 미엘은 다소 걱정스러운 분위기로 물었다.
“저… 혹시 오늘도 김밥 말아야 하나요?”
“당연하지. 복습은 기본 아니야.”
“휴…”
김밥은 또 뭔지. 제랄딘으로서는 계속 해서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다.
신전에 도착하자 사제의 안내를 받아 신전에서 돌보는 아이들의 모습을 잠시 훑어본 다음 최고 사제의 방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숙제는 다 끝내셨습니까?”
“처음엔 좀 힘들었습니다만, 익숙해지니 이쪽이 훨씬 편하더군요. 덕분에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군요. 자, 그럼 모두 기도합시다.”
기도합시다라니. 형진이 대리자라는 사실은 이제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그런 말과 가장 거리가 먼 이의 입에서 기도합시다라는 말이 나오자, 제랄딘은 문득 전해지는 괴리감에 소름이 돋을 것만 같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호구신으로부터 ‘손님’ 자격이 부여되었습니다.]“쿱!”
다른 사람들을 따라 눈을 감고 기도하는 흉내를 내려하던 제랄딘은 문득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에 자신도 모르게 뿜어 버리고 말았다. 호구신이라니. 희망과 생명의 신전에서, 희망과 생명에게 기도를 드리는 시늉을 하고 있는데 대놓고 호구신이라니.
어쨌든 회합장이라는 명령을 찾아서 실행하자 제랄딘의 눈앞에 아름다운 꽃동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와아…”
현실은 한창 추위가 심해지기 시작한 한겨울이건만, 이곳은 사방에 따뜻한 기운이 가득하다. 가상의 공간이라는 말을 얼핏 듣기는 했지만, 눈으로 보이고 피부로 느껴지는 모든 감각에 아무런 위화감을 느낄 수가 없다.
“일단 둘은 나를 따라오고. 마들렌.”
“네, 주인님.”
형진의 부름에 온화한 느낌의 귀부인 한 명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쪽은 마들렌.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어, 카트린도 있었어?”
“네, 오빠.”
마들렌이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카트린이 그 뒤를 따라 나타난다. 물론 이곳에서의 그녀는 아무런 장애없이 자유롭게 걸음을 옮길 수 있다.
현실에서 카트린이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정신적인 치유는 물론이고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이곳에서의 활동으로 걷는다는 행동의 감각을 익히게 되면서 현실에서도 그것을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제랄딘에게 형진이 말했다.
“잘 됐네. 제랄딘은 일단 마들렌과 카트린에게 이곳의 안내를 받아. 마들렌, 제랄딘을 장서관으로 안내해줘. 미리 지시한 것을 살펴보게 하면 돼.”
“알겠습니다. 주인님.”
마들렌은 형진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제랄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내하겠습니다. 손을 잡아 주십시오.”
“…”
머뭇거리며 제랄딘이 마들렌의 손을 맞잡는 순간, 그들은 어느 틈에 거대한 도서관과 같은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바로 장서관이다.
“이쪽입니다.”
여긴 또 뭔가 싶은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문득 책이 무질서하게 가득 쌓여 있는 장소로 마들렌이 그녀를 인도한다.
“여기 있는 이것들은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신전들의 회계 자료입니다. 본격적인 사업에 앞서, 각 신전들의 재정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니 이것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일을 우선 시작하라 하셨습니다.”
“…”
제랄딘은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물론 형진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지만 이 모든 자료들을 혼자 다 살펴보고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도 도와드릴게요!”
“고, 고마워.”
기특하게도 카트린이 돕겠다고 나섰지만, 제랄딘으로서는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역시 세상 일이란 건 만만한 게 하나도 없는 모양이다.
유아와 미엘은 역시나 이번에도 김밥을 말아야만 했다. 오늘은 그냥 김밥을 마는 것도 아니고 무려 응용편이다. 이전에 알려줬던 기본 재료 외에 다른 여러 가지 재료를 써서 맛있는 김밥을 만드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 과제였다.
“우… 이건 차별이에요.”
“뭐가?”
“제랄딘님은 왜 김밥 안 말아요?”
유아의 불만 섞인 말에 형진은 피식 웃었다.
“김밥 마는 것보다 그쪽이 더 힘들텐데?”
“정말요?”
“정 하고 싶으면 그쪽 일을 돕던가. 수백 권 분량의 장부를 확인하고 계산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하는 일이긴 하지만.”
“힉!”
유아는 곧바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장부라니. 그것도 수백 권 분량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느 정도냐면 숫자와 씨름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유아는 현기증을 느껴야만 했을 정도다.
“그냥 김밥 말게요.”
바로 꼬리를 마는 유아의 모습에 형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사제들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일을 끝내자 형진은 마들렌을 통해 다시 제랄딘을 불러왔다.
“어때?”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신전들의 자금 현황을 살펴보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업의 시작 전에 지점으로서 기능하게 될 신전들이 어느 정도의 자금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 다른 이라면 몰라도 그 모든 것을 총괄하게 될 제랄딘이라면 세세하게는 아니더라도 대략의 상황은 파악하고 있어야만 한다.
물론 하루 만에 다 파악할 수 있을 거라고는 형진도 기대하지 않았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하루 이틀 안에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랄딘은 형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인재였다.
“한 가지 건의해도 될까요.”
“건의? 뭔데?”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고 싶어요.”
물류 사업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텐데 새로운 사업이라니. 하지만 그것은 그 모든 일을 총괄해야 하는 제랄딘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터.
“새로운 사업이라… 어떤?”
흥미로운 시선과 함께 던져진 형진의 말에 제랄딘은 눈빛을 빛내며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제안하고 싶은 사업은 바로 우편 사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