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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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비경
“호오.”
제랄딘의 말에 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제랄딘의 사고나 발상이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장부를 살펴보라는 것은 단순히 그 안의 숫자를 살펴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아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그 장부들은 다시 말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신전들의 회계정보. 바꿔 말하자면 그런 형식으로 다른 정보들 역시 얼마든지 가공되어 장서관에 기록될 수 있다는 뜻이다.
제랄딘이 제안한 우편 사업은 바로 그 정보를 다루는 사업인 셈이다. 우편이라고는 하지만, 정확히는 일종의 전보와 비슷한 형식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지역의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정보가 있다면, 신전에 들러 그것을 적어 사제에게 내보인다. 그러면 사제는 그렇게 모인 서신의 내용을 회합장을 통해 장서관에 모아서 취합한 다음, 지역별로 분류해 해당 지역의 담당 사제에게 넘기면 된다. 따로 자금이 더 필요하지도 않고, 현재의 인원과 체계만으로도 충분히 구체화할 수 있는 사업인 셈이다.
또한 이것은 본격적인 물류 사업 전에 체계를 잡는 예행연습으로도 매우 적절하다. 물건을 보내는 것은 타운 포탈을 이용해야 하니 조금 더 복잡한 경로를 거치게 되겠지만, 결국 서신을 모아 각 지역으로 발송하는 것과 체계 자체는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체국이 자신들의 시스템을 이용해 택배 사업을 병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것은 또한 각 지역의 정보를 당당하게 합법적으로 취합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단단히 봉해진 편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 자체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취합하는 과정에서 고스란히 장서관에 정보로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별도의 방법이 필요하겠지만, 굳이 정보를 모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알아서 모이도록 만드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 역시 충분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제법이군.”
고작 하루 만에 회합장과 장서관이 지닌 장점을 확인하고, 물류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기본적인 체계를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사업까지 제안하다니. 솔직히 이 정도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던 터라 형진으로서는 매우 만족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훌륭해. 좋은 생각이야.”
“감사합니다.”
“돌아가면 구체적인 기획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도록.”
“알겠습니다.”
완전히 허락한 것은 아니지만, 반승낙이나 다름없는 형진의 대답에 제랄딘은 밝게 웃었다. 단순히 그의 칭찬을 들었다는 것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기쁜 탓이다.
“기분이다. 기젤 님의 옷가게나 가자. 새 식구들이 들어왔으니 인사도 할 겸.”
“와아아! 주인님 최고!”
온종일 김밥 마느라 시달렸던 사실조차 잊었는지 유아는 기쁨의 탄성을 터뜨렸다. 귀금속이나 다른 사치품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는 그녀였지만, 새 옷만큼은 얘기가 다르다. 어떻게 보면 유아가 물욕을 드러내는 유일한 품목인 셈이다. 물론 식탐과는 별개로 말이다.
세 명의 메이드를 거느리고 방문하자 어지간한 일로는 놀라는 기색이 없던 기젤도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이건 또… 놀랄 일이로군요.”
“반갑습니다. 그동안 바빠서 왕래가 별로 없었죠. 죄송합니다.”
“별 말씀을요.”
“보시다시피 오늘은 이 세 명을 부탁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맡겨 주십시오.”
기젤이 손뼉을 치자 곧바로 여급들이 몰려나와 셋을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우르르 몰려나와 자신들을 끌고 들어가는 여급들의 행동에 제랄딘과 미엘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유아가 괜찮다며 다독인다.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더니 딱 그짝이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미엘님은 그렇다 쳐도 제랄딘님까지. 솔직히 당황스럽군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하하.”
어제 있었던 일이라 아직 기젤의 귀에 정보가 들어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기야 공작가에서도 이번 일은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일이다. 형진이 희망과 생명의 대리자라는 것을 드러내 놓고 밝힐 수 없는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물론 벨크라드진인지 뭔지 하는 이름의 왕자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고.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형진은 간단하게 라야바르트가 엘 파르드를 도모하려는 정황을 기젤에게 전했다. 물론 어제 있었던 일이나 크루그에 관한 것은 쏙 빼놓고.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저희가 뭔가 관여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런 국가간의 정황을 알아두면 각자가 활동 방향을 정하는데 있어서는 도움이 되게 마련이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잠시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기다리자, 셋이서 옷을 하나 가득 안고 나왔다. 유아는 새 옷을 하나 가득 사서 매우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지만, 제랄딘은 혹시라도 자신의 신분이 드러났을까봐 조마조마한 모습이다.
“이만 가볼까?”
“네!”
그렇게 옷가게까지 들렀다가 느즈막하게 집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엄청난 양의 짐들이었다.
“이건?”
“제랄딘님의 짐이라면서 기사들이 가져왔어요. 미리 정리를 할까 했지만, 함부로 남의 짐을 뜯어보면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한쪽으로 치워만 놨어요.”
“그랬군. 잘했다.”
무슨 꿍꿍이일까. 단순히 딸이 쓰던 물건을 챙겨 보낸 것만은 아닐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문득 오귀스트와 함께 그랙커스가 나타났다.
그랙커스는 메이드복 차림의 제랄딘을 보고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따로 언질을 받았는지 이내 모르는 척 형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름 변장을 한다고 하긴 했는데,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 그랙커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주인이 없을 때 찾아와 죄송합니다. 못 뵙고 가나 했는데 다행이군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반갑습니다. 오귀스트님과 한잔 하러 오신건가요?”
“그것도 있습니다만, 던전 탐색에 관해 묻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그랙커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친구의 말로는 진님께서 대단한 실력의 트래커라더군요.”
“대충 흉내는 낼 줄 압니다.”
“대단합니다. 요리만이 아니라 그런 분야도 능통하시다니.”
“과찬이십니다.”
형진이 담담하게 대답하자, 그랙커스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속내를 밝히지 못한 채 돌아갔다.
“아무래도 트래커를 찾는 문제가 만만치 않은 모양이네요.”
“그럴 만도 하지.”
다른 인원이야 기사들이나 병사들로 어떻게 자리를 채운다 쳐도 트래커만큼은 쉽게 구하기 힘들다. 물론 병사들 중에도 수색이나 정찰에 능통한 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본격적인 던전 탐색에 바로 투입하기엔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그랙커스가 돌아가자 다른 이들은 모두 제랄딘의 짐을 정리하는 일 때문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진은 주방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목도리처럼 자신의 목을 휘감고 있는 미엘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뭘요?”
“대미궁 말이야.”
“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미엘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공작님도 뭔가 생각이 있으니 이런 식으로 일을 추진하는 거겠지만, 역시 쉽지 않을 거에요.”
“그렇겠지. 그냥 병력을 밀어 넣는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니까.”
형진이 그렇게 답하자 미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대미궁을 장악할 생각이에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형진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왜? 불안해?”
“그야…”
불안한 건 사실이지만, 이 집에 머물고 있는 식구들이 힘을 합치면 사실 대미궁 전체를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미엘이 거대 흑요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다른 어떤 운송수단보다도 빠른 이동이 가능하고, 여기에 형진의 트래커 능력이 접목되면 어떤 위협이 있더라도 사전에 확인하여 분쇄할 수 있다. 더구나 그들은 성소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은밀하게 던전에 진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문제는 대미궁의 중심에 위치한 코어가 과연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느냐는 정도. 하지만 지금의 자신들이라면 어지간한 상대는 모두 쉽게 제압할 수 있을 테니 이것도 큰 문제는 아니다.
“괜찮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이것저것 할 일이 많은데.”
“할 일이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집안에 쳐박혀 있기만 할 필요도 없잖아.”
“그건 그래요.”
신전의 일만 하더라도 유아와 미엘, 그리고 제랄딘에게 새로운 등급이 부여되면 굳이 신전을 들락거리며 일을 처리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언제든 그리칸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설령 반드시 신전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생기더라도 큰 문제는 아니다.
“그래도 혹시 다른 의견이 있을지 모르니 식사 시간에 물어보는 편이 좋겠어요.”
“그야 당연하지.”
미엘의 의견대로 식사 시간에 대미궁 탐사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크루그는 카트린과 함께 집에 남기로 했고, 다른 이들도 슬슬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라 흔쾌히 허락했지만, 모두가 예상치 못했던 인물 하나가 느닷없이 참가를 선언했다.
-저… 괜찮으시면 저도 같이 가보고 싶어요.
“네가?”
바로 가사의 요정인 림이 대미궁 원정에 대한 참여 의사를 밝힌 것이다.
“대미궁에는 뭐하러?”
-그게… 사실은 대미궁이 아니라 대산맥 쪽에 용무가 있어서요.
“대산맥?”
-네. 사실 이건 비밀인데요. 대산맥 안에 요정들의 나라가 있어요. 오랫동안 세상에 나와 있다보니 그동안 기별을 못 하기도 했고, 혼자서 찾아가기엔 여러 가지로 위험한 것도 많아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괜찮다면 가는 길에 잠시 들러 보시는 게 어떨까요?
요정의 나라라니.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이들로서는 금시초문이다.
“우리들을 데리고 들어가도 괜찮아?”
유아의 물음에 림은 크게 문제될 것 없다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요정의 안내가 없으면 다른 존재들이 임의로 찾아갈 수 있는 곳도 아니니까요.
“아하.”
모두들 흥미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 요정의 나라라니, 이제껏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신비로운 비경을 탐험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이 되는 모양이다.
-스승님. 괜찮을까요?
불안한 표정으로 그렇게 한 번 더 묻는 림의 모습에 형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어차피 대미궁이 하루 이틀에 탐색을 끝낼 수 있는 장소도 아니고, 그런 곳이 있다니 나로서도 흥미가 생기는 걸.”
-감사합니다! 정말 고마워요!
림은 폴짝폴짝 뛰며 기쁨을 표시했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저기… 저도 가볼 수 있을까요?”
요정의 나라라는 말에 흥미를 느낀 건 어른들만이 아니었다. 사실 이런 쪽은 아이들이 더 신나할 만한 내용이다.
카트린의 말에 크루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안 된다며 말리고 나서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던전 탐색이라면 몸이 불편한 아이를 동행시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겠지만, 그 정도는 여기 모인 이들 모두가 알고 있다.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 정도를 구분 못할 이들이 아니니 판단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던전 안이 아니라면 미엘의 도움을 받으면 금방 갈 수 있지 않을까?”
형진의 말에 오귀스트가 바로 수긍했다.
“그렇군요. 대산맥이 험하다고는 해도 미엘님이라면 그런 지형의 영향 따위 큰 문제가 되지 않을테니. 문제라면 요정의 나라로 향하는 경로겠군요.”
그러자 림이 얼른 말을 받는다.
-대산맥의 험한 지형만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다면 요정의 나라로 통하는 입구부터는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단지 찾기가 어려울 뿐이죠.
림의 말을 들은 형진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좋아. 그럼 카트린도 함께 가는 걸로 결정.”
혹시라도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해서 조마조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트린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운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려야만 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다른 모든 일과가 끝난 뒤 림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그대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작게 웃음을 흘리기 시작한다.
“큭큭큭… 큭큭큭큭큭… 드디어 이 날이 왔다. 기다려라, 여왕! 그리고 기억하라. 이제야 말로 복수의 시간이 찾아오고 있음을! 크크크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