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72
172====================
37. 비경
다음날 아침.
“언능 못 일어나!”
“꺅!”
“크하하하하. 그래! 이거야! 이거!”
“으으… 이럴 수가. 또 당하다니.”
오늘도 어김없이 시트 뒤집기를 당한 제랄딘은 떨어지면서 부딪힌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주방으로 내려갔다.
“응? 오늘은 음식이 많네요?”
“가는 김에 소풍이나 갈까 하고요. 요즘 바깥바람을 별로 못 쐬었잖아요.”
“하긴.”
미엘과의 일 때문에 형진이 집에 틀어박히게 되면서 다른 가족들까지 상대적으로 외부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카트린까지 포함해서 이 집의 식구들이 총출동하는 날. 본래는 대미궁의 탐색을 하러 나갈 생각이었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결국 하루 동안 바깥나들이를 하는 식으로 예정이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자, 그럼 가볼까요.”
“네!”
도시락 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서자 지나던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처다본다.
하기야 구성이 참 특이하긴 하다. 저마다 개성적인 매력을 지닌 네 명의 메이드에 크고 작은 남자 세 명. 여기에 휠체어에 탄 귀여운 소녀까지. 게다가 형진의 목덜미에 웅크리고 있는 미엘의 풍성한 꼬리 속에는 림이 조심스럽게 존재감을 감춘 채로 숨어있기까지 하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유아를 데리고 그리칸을 방문한 것이 바로 어제의 일 같은데, 벌써 이렇게 대가족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형진은 어쩐지 자신을 따르는 식구들의 모습에 마음 한켠이 뿌듯해지는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거리를 지나 성문을 나선 그들은 근처의 산으로 들어섰고, 어느 정도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인적 드문 곳에 도달하자 마침내 본격적으로 발디프스 대산맥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카트린. 놀라지 말아요.”
“네?”
이 근처에 요정의 나라가 있나 싶어 눈빛을 빛내고 있던 카트린은 문득 미엘이 다가와 그렇게 말을 걸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갑자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거대한 흑요호의 모습으로 변하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와아아아아아아…”
모두가 등에 올라타도 충분할 정도의 거대한 체구를 지닌, 새카맣게 윤기가 흐르는 털로 뒤덮인 그 아름다운 생명체의 모습을 보는 순간 카트린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엘님. 그럼 부탁드려요.”
-얼마든지.
곧바로 사람들이 미엘의 등에 올라타기 시작한다. 카트린 역시 휠체어채로 형진과 오귀스트의 손에 들려 훌쩍 미엘의 널찍한 등 위에 자리를 잡았으며, 곧바로 미엘이 올라탄 이들을 보호하는 마법 결계를 펼친다.
“오, 이거 좋은데. 바람도 막아주고, 떨어지는 것도 막아주고.”
-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미처 생각을 못했어요. 누군가를 태워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랬군.”
카트린은 휠체어에 앉아 있다가 문득 크루그에게 부탁했다.
“오빠. 나 좀 내려줘.”
“그럴래?”
크루그는 별 말없이 휠체어에서 내려주었고, 카트린은 흑요호의 부드럽고 따뜻한 털 속에 파묻히듯 자리를 잡았다.
“미엘님. 너무 멋져요!”
-고마워요. 카트린.
예상외로 거대화한 흑요호의 모습에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예쁘고 멋지다고 연신 칭찬하는 카트린의 모습에 모두는 웃음을 지었다.
“그럼 출발할까.”
-네.
마침내 모두 자리를 잡자, 거대한 흑요호가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더니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우, 우와아아아!”
크루그나 림을 제외하면 모두들 던전 안에서 흑요호를 타본 경험이 있었지만, 밀폐된 지하 공간에서의 비행과 막힘없이 뻥 뚫려 있는 창공을 가로지르는 건 완전히 다른 경험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크흠… 이거 의외로 꽤…”
처음에는 별 문제 없었던 것 같았던 유아였지만 까마득하게 높은 장소로 올라가자 이내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고소공포증이 생긴 모양이다.
“기분이 안 좋으면 잠시 눈을 감고 있어.”
“네에…”
유아는 형진의 말을 듣자 얼른 눈을 질끈 감은 채 그의 팔을 꽉 끌어안았다. 아닌 척 하고 있었어도 역시 이런 높이로 갑자기 올라오니 덜컥 두려움이 생기는 모양이다. 그에 반해 다른 이들이나 카트린은 무섭지도 않은지 아래쪽으로 흘러가는 구름이나 지형들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이다.
집행자들이야 낙인 덕분에 공포 자체에 어느 정도 면역이 있고, 하마란이야 허공에 던져져도 신뢰와 헌신을 부르짖을 녀석이니 그렇다쳐도, 그런 것조차 없는 카트린은 좀 의외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어지간한 마차나 말 따위는 비교가 되지 않는, 차라리 비행기 중에서도 제트기 정도나 되어야 비교가 될 법한 흑요호의 속도 덕분에 까마득히 멀리 보이던 발디프스 대산맥이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미엘의 꼬리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림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하늘 위로 높이 솟은 하얀 봉우리 두 개가 서로 교차하는 지점의 골짜기를 가리켰다.
-미엘님! 저기 저 골짜기로 가시면 돼요!
-과연. 저런 골짜기라면 쉽게 접근하긴 어렵겠네요.
말이 골짜기지 거의 그랜드 캐니언 급이다. 특히나 양 옆으로 엄청나게 높은 두 개의 산봉우리가 자리 잡고 있다 보니 그렇지 않아도 깊은 협곡이 더 깊어 보인다. 이쯤 되면 정말 자연 유산이라 불려도 충분할 듯한 느낌이다.
협곡 아래쪽에는 만년설이 녹은 것으로 보이는 강이 지나고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솟아난 수증기로 인해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뿌연 물안개와 함께 무지개가 생겨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단순히 만년설 녹은 물만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라 근처의 지하에서 온천 역시 같이 솟아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흑요호가 빠르게 협곡 사이를 지나치자 뿌옇게 피어오르던 물안개가 결계의 영향으로 확 흩어진다. 일부러 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꽤 장관이어서 카트린 뿐만 아니라 눈을 뜨고 지켜보던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려야만 했다.
“뭐에요? 뭔가 있어요?”
형진의 팔을 꽉 껴안은 채 와들와들 떨고 있던 유아는 모두가 탄성을 터뜨리자 불안했던 모양인지 그렇게 물었다.
“글쎄. 궁금하면 직접 보면 좋을 것 같은데. 꽤 멋지거든.”
“으으으…”
호기심과 두려움이라는 상반된 두 감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유아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얘는 좀 어른스러워지는가 싶더니 요즘은 또다시 아이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 같다. 하긴 여자의 심리를 이해하려고 드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르겠다만.
아무튼 그런 식으로 협곡을 좀 더 지나자, 중간이 한층 더 물안개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오는 장소가 눈에 들어 왔다.
-저곳이에요. 천천히 내려가세요. 가끔 땅속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니까 조심하시고요.
-알았어요.
림의 지시에 따라 흑요호는 물안개가 뿜어져 나오는 곳으로 향했다. 가끔 물이 뿜어져 나오는 장소라면 혹시 간헐천인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지면이 진동하는 듯한 소음이 들려오더니 사방에서 일시에 물기둥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한다.
“헉!”
“이, 이건…”
혹시 몰라 방어막에 결계까지 한 겹 더 치고 천천히 하강하고 있던 미엘마저 갑작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이 자연 현상에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이쯤 되면 간헐천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분수대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다.
다행히 미리 방어막을 친 탓에 솟구쳐 나오는 뜨거운 물로 인한 피해는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지형이라면 어지간한 수단으로는 근처에 다가가는 것조차 쉽지 않을 듯 하다. 간헐천은 끓는 물이 솟구쳐 나오는 것이고, 순수한 물도 아니다보니 실제 온도만도 섭씨 100도를 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방어막이나 결계의 도움이 없이 이곳을 그냥 돌파하는 건 그야말로 끓는 물 속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될 것이다.
“엄청나군. 이래서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건가?”
-요정 들이 다니는 길이 있긴 한데, 멀리 빙빙 돌아가야 해서 시간이 꽤 오래 걸려요. 물론 인간이 이용하기엔 너무 좁고요.
“그렇군.”
아래쪽으로 좀 더 내려가다가 미엘이 특이한 힘의 흐름이 느껴지는 곳을 발견했다. 마치 태풍의 눈처럼 간헐천의 영향이 느껴지지 않는 조용한 장소 한복판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었다.
“저곳인가?”
-네. 저곳이 바로 요정의 나라로 통하는 입구랍니다.
흑요호는 곧바로 나무 아래로 향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빛가루를 흩뿌리는 요정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마치 이쑤시개 같은 창을 들이대며 위협을 가한다.
-누구냐! 정체를 밝… 히익!
-이곳은 요정의 나라에 속한 곳이다! 순순히 저항을… 히익!
-쫄지마! 우리들은 위대한 요정 근위대다! 아무리 강대한 적이라도… 히익!
제법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경고를 하던 요정들이었지만 흑요호 모습의 미엘과 시선이 마주치자 기겁을 하며 무서워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마침내 림이 나섰다.
-두려워 말라, 동포들이여! 큭큭큭. 나 나도아와타다자가서어와부어, 줄여서 림이 마침내 위대한 동료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헉! 리이누구아머느거아, 줄여서 림님이란 말입니까?“
-설마 여왕님이랑 대판 싸우고 패배해서 추방당했다고 전해지는 그러그대조라처마아다느, 줄여서 림님이 바로 저 분이란 말인가!
림의 이름을 연호하는 요정 근위대의 모습이 뭔가 호들갑스럽게 느껴진다. 게다가 그냥 느낌만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줄여서 림이라는 부분을 제외하면 각자가 말하는 림의 본명이 뭔가 다 제각각이라는 느낌이다.
-그렇다! 나 아우앙마이처조라마이퍼무거, 줄여서 림이 마침내 다시 여왕에게 도전하기 위해 돌아왔다! 큭큭큭. 어서 나와 내 위대한 동료들을 여왕에게로 안내하라!
-크흑! 알겠습니다. 호자퍼무으머마이나대지아, 줄여서 림님. 그리고 함께하신 위대한 동료 여러분, 요정의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뭐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환영하기는 하는 모양이다. 흑요호 모습의 미엘은 일단 땅에 내려설까 했지만, 요정 근위대들이 몰려가 나무에 어딘가로 통하는 푸른 빛의 입구를 열자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앞서와는 다른 풍경이 드러난다.
마치 회합장에 들어선 것처럼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한 기이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어쩐지 3차원이라기 보다는 2차원적인 느낌이 가득한 공간이라고 해야 하나.
요정의 나라라고 불리는 기이한 장소의 모습에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문득 림이 흑요호의 등으로부터 훌쩍 뛰어 내리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나와라! 여왕! 큭큭큭. 나 오느이아마로겨파으내우마, 줄여서 림이 너에게 다시 도전하고자 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2차원적인 공간의 한쪽이 열리며 여러 요정들에 의해 호위를 받는 화려한 옷차림의 요정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쩐지 림과 많이 닮은 모습. 물론 멀리 있는데다 사이즈마저 작아서 형진의 시력으로는 그 외모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대충 분위기나 느낌만으로도 어쩐지 비슷하다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훗. 패배자 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잘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구나. 좋다. 모든 요정들의 여왕인 나 어이가어네저마어디어가히지지라너이나리아, 줄여서 람이 네 도전을 수락한다.
그렇게 선언한 여왕은 들고 있던 작은 막대기를 머리 위로 치켜들더니 이렇게 외쳤다.
-허세와 망상의 이름으로 선언하노니, 열려라, 망상 필드!
허세와 망상? 설마 요정들은 바로 그 중2병 신을 모시는 신도들이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