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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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비경
여왕의 외침과 함께 막대기로부터 기이한 힘이 퍼져 나와 주위 공간을 뒤덮는다.
주정뱅이가 남긴 책에 따르면, 허세와 망상은 단순한 헛된 망상에서 벗어나 지성이 있는 생명체가 상상하는 모든 것을 담당하는 신이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이 신의 주특기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일을 현실 속에 환상으로 구현해 내는 것으로서, 신들간에 일어난 분쟁의 해결을 위해 추종자들이 대리전을 펼치는 토너먼트 역시 이 허세와 망상의 힘에 의해 구현된 공간에서 치러지게 된다.
토너먼트의 성립으로 인해 허세와 망상은 한때 그 이름을 널리 알리며 위대한 신 가운데 하나로 칭송 받았다. 하지만 허세와 망상이 몰락하게 된 계기 또한 바로 이 토너먼트에 의해서였다.
초창기 토너먼트에서 허세와 망상의 추종자인 몽상가들은 망상구현의 힘으로 다른 신들의 추종자들을 압도하며 거의 모든 토너먼트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모든 경기가 사실상 홈경기나 다름없는 상황임을 고려하더라도 뭔가 이상하다 싶은 느낌이 들었던 다른 신들은 즉각 실태를 확인하기 위한 조사에 들어갔고, 결국 허세와 망상에 의해 몽상가들의 힘이 터무니없이 과대포장 되었음이 밝혀지게 된다.
부정행위가 발각되자, 허세와 망상의 몽상가들은 즉각 토너먼트에서 퇴출되었다. 신들간의 분쟁에서 사실상 거의 유일한 의사결정 수단인 토너먼트에서 퇴출되면서, 허세와 망상의 몽상가들은 급격하게 그 세를 잃게 되었고, 이때문에 현재는 그 신의 이름조차 거의 잊혀지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사실상 잊혀진 신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허세와 망상의 자취를 여기저기에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 우선 토너먼트부터가 그렇고, 따지고 보면 형진이 구현한 회합장이나 공포와 죽음이 신도들에게 제공하는 인터페이스도 결국은 허세와 망상의 힘을 빌려와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잊혀졌다 생각되었던 허세와 망상의 몽상가들이 요정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리석고 어리석도다. 추방당한 네가 과연 무엇을 믿고 다시 이곳에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부끄러움조차 모르고 다시 돌아온 그 어리석음을 오늘 다시 깨우치도록 내 친히 번거로움을 자청하겠노라! 이 땅은 내 아버지의 살이며, 저 강물은 내 어머니의 피. 결국 나는 이 모든 것의 결실이니, 이 모든 것이 또한 나의 힘이다! 경배하라, 대지여! 울부짖어라, 바다여! 일어나 저 무지몽매한 바보 림을 깨우쳐 주어라!
곧바로 굉음과 함께 지진이 일어나고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 주위를 휩쓴다. 진은 물론이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갑자기 이상하게 돌변한 림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 이들은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그 현상에 당황해 허우적거려야만 했다.
-꺄하하하하하하! 나왔다! 여왕님의 지진 해일 콤보!
-과연 세계 제일의 몽상가! 위력 하나는 역대급이야!
-또 온다!
-저 파도는 내가 정복하겠어!
하지만 그렇게 당황해 하는 일행들과는 달리, 주위에서 지켜보던 요정들은 여왕이 일으킨 지진과 해일을 즐기며 파도타기와 번지점프를 즐기고 있었다.
-놀라지 말아요! 이건 그냥 허상일 뿐이에요! 그냥 감각을 혼란시키는 것이 전부입니다!
“노, 놀라지 말라고 해도 이건!”
미엘의 충고가 들려왔지만, 역시나 신의 힘을 빌린 현상이다 보니 허상이란 걸 알고 있어도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집행자들이 비록 정신 공격에 대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토너먼트나 회합장의 실체를 꿰뚫어 볼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이 망상 구현의 파도를 감당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빠. 제 손 잡아요.”
“응? 어, 어라?”
하지만 그런 형진에게 손을 내미는 인물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카트린이었다. 다른 이들이 당황과 혼란으로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카트린만은 지진과 해일의 폭풍 속에서도 별다른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너…”
설마 이 망상 구현의 파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일까. 형진은 놀란 와중에도 일단 라이언하트를 발동시켰다.
콰우우우!
그의 몸으로부터 회오리와도 같은 힘의 파동이 퍼져 나가며 실시간 공략집이나 다름없는 라이언하트가 발동되었다. 그렇게 스킬이 발동된 상태로 바라보자, 형진은 어렵지 않게 카트린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요컨대, 요정들이 지진과 해일을 즐기며 파도타기와 번지점프를 즐기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무심결에 방어기제가 발동해서 자신을 덮쳐오는 망상 구현의 힘에 저항하게 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카트린은 요정들과 마찬가지로 느껴지는 현상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굵은 나무가 폭풍에 휘말려 꺾여나가는 중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는 쓰러지지 않는 모습과도 같은 원리였다.
“허…”
하지만 말이 쉽지. 이게 어디 그리 간단하게 되는 일인가. 아무리 라이언하트를 통해 해답을 찾아냈다 할지라도 이걸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 형진은 카트린의 손을 잡은 채 어서 이 말도 안 되는 싸움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후. 후. 후.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네 녀석은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구나. 고작 그 정도로 날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뭣이!
-인간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나는 수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꼈다. 그런 와중에 지금의 스승님을 만나 진정한 망상구현의 힘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지!
-허튼 소리 마라! 인간 따위가 감히 허세와 망상께서 베푸신 망상구현의 힘을 알 리가 없지 않은가!
-글쎄. 그것은 두고 보면 알게 될 일이지. 큭큭큭. 자아! 간다! 나의 살과 피는 모두 온전히 내 스승님의 요리로 채워졌으니!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맛! 가라! 익스트림 테이스트!
-커헉!
여왕이 지진과 해일을 일으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림의 역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현상을 망상구현으로 재현한 여왕의 힘과는 그 본질 자체가 달랐다.
“저, 저것은!”
“설마! 지금까지 진님이 만들어낸 모든 요리들이란 말인가!”
그렇다! 지진은 지진이되 땅의 울림이 아니며, 해일은 해일이되 물의 파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형진이 만들어낸 모든 요리들과 그 요리들이 지닌 맛의 향연이었다.
-헉! 이, 이 맛은!
-말도 안 돼! 이런 요리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스, 승천한닷!
-안 돼! 이 맛에 홀려버려!
방금 전까지 지진 속에서 번지점프를 하고 해일 속에서 파도타기를 하던 요정들은 각양각색의 요리들이 만들어내는 맛의 향연에 농락당하며 순식간에 휘말려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실로 익스트림 테이스트라는 기술명에 어울릴 법한 엄청난 위력!
-크흑! 이럴수가! 이것이 진정 인간의 힘으로 구현된 맛이란 말이냐!
-놀랍지 않은가! 네가 이 작은 골짜기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동안, 나는 스승님을 찾아내 이 놀라운 맛의 비경을 찾아내었다! 큭큭큭. 정체된 망상은 이미 존재 가치를 상실한 것! 진정한 망상구현은 오직 탐구하는 자에게 내려진 은혜일지니!
-으아아아악!
여왕은 결국 계속해서 입에 처넣어지는 요리들을 견뎌내지 못하고 배가 뽈록해진 채 맛의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침내 림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오오오! 망상구현의 단장이!
-여왕 람의 통치가 이렇게 끝을 맺게 되는 것인가!
-새로운 여왕 림의 탄생이다! 경배하라!
망상구현의 단장이라 불리운 작은 막대기는 허공으로 떠올라 림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자 주위에 펼쳐져 있던 망상필드는 소리 없이 사라지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형진을 비롯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혼란에 빠져 있던 일행들도 허우적거리던 것을 멈추고 다시 본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림은 자신의 손에 들어온 망상구현의 단장을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들여 마침내 이것을 손에 넣었구나. 크큭. 하지만 막상 이루고 보니 복수란 것은 이토록 허망한 것이었던가.
림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망연자실한 채 바닥에 엎드려 있는 여왕 람을 바라보더니, 허세 가득한 동작으로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던 망상구현의 단장을 그녀에게 던져 주었다.
맞다. 이것은 분명한 허세였다. 대결에서 승리한 이상 망상구현의 단장의 새로운 주인은 림이 될 수밖에 없었고, 다시 건네준다 한들 여왕 람은 굴욕적인 모습으로 림에게 다시 단장을 되돌려 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켜보던 모든 요정들은 다음에 이어질 그런 모습을 연상했다. 그러나, 단장은 다시 여왕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중간에 무언가 휙 하고 날아들더니 마치 솔개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가져가 버린 탓이다.
-아앗!
-이게 무슨!
지켜보던 요정들은 물론이고 망상구현의 단장을 던졌던 림 역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흠, 이게 바로 망상구현의 단장이라는 건가.”
-스, 스승님?
그렇다. 갈고리 팔찌를 이용해 중간에서 망상구현의 단장을 가로챈 것은 바로 형진이었던 것이다!
망상구현의 단장은 형진의 손에 들어오자 인간 사이즈에 맞게 크기가 변화했다. 막상 손에 쥐고 보니, 막대기라기보다는 피리와 비슷한 느낌의 물건이다.
“림.”
-네?
“너 누가 내 요리 그렇게 막 가져다 써도 된다고 그랬냐.”
-그, 그건…
림은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어쩔 줄 몰라 하기 시작했다. 그런 림의 모습을 보며 형진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런 일 때문에 돌아오는 거라면 미리 말을 했어야 하지 않겠냐?”
-죄, 죄송합니다.
그러고 보면 처음 형진과 만났을 때 림은 문양이 새겨진 그의 손과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었다. 그때는 단순히 공포와 죽음에 서린 기운이 무서워서 그런 줄 알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자신의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있는 허세와 망상의 문양이 공포와 죽음의 문양과 반응해 정체가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감히 네가 하늘같은 스승을 속여?”
-그게… 딱히 속이려고 그런 건 아니고.
“허… 게다가 말대꾸까지?”
-죄송합니다.
형진에게 쩔쩔 매는 림의 모습을 본 다른 요정들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허세와 망상의 신물이나 다름없는 망상구현의 단장을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인간에게 빼앗겨 버린 탓이다.
-어, 어떻게 저걸 인간이 쥐고 있을 수 있는 거지?
-허세와 망상의 문양이 새겨진 존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일텐데?
그렇다. 신물이라고 불릴 정도면 스스로 주인을 선택하는 정도의 능력 정도는 가지고 있게 마련. 특히 망상구현의 단장은 허세와 망상의 문양을 지닌 자만이 소유하고 다룰 수 있다고 전해지는 신물이라 요정들로서는 지금의 이 사태가 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저 인간도 허세와 망상의 몽상가?
-그럴 리가. 이제 인간 중에는 허세와 망상을 섬기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럼 도대체 뭐지?
-혹시… 신인가?
-설마 아바타? 그런 건가?
요정들은 하마란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형진의 정체에 대해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정확히는 희망과 생명의 대리자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희망과 생명을 대신해 회합장이라는 다소 변형된 망상구현의 힘을 구사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의 신물을 문제없이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다음 여왕은 누가 되는 거지?
-설마 저 인간?
-하지만 저 인간은 남자잖아. 남자가 여왕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하지만, 아바타라면…
-어쩌지?
-그럼 어쩌지?
당황해 하는 요정들을 바라보며 형진은 씩 웃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요정들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어떤 알수 없는 예감에 사로 잡힌 채,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며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