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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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요정 익스프레스
요정의 문을 통과하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지하 수련장의 광경이었다. 형진은 일단 주위의 불을 밝혔고, 뒤이어 다른 식구들도 도착했다.
-저, 스승님.
“왜?”
돌아보니 림이 쭈뼛거리고 있다.
-제 친구들이 집 구경 좀 하고 싶다는데… 괜찮을까요?
“정신 사납지 않을까?”
원래는 스승님 스승님 하면서 애교도 잘 부리고 하던 녀석이었지만, 형진이 덜컥 요정왕의 자리에 올라앉자 이제는 얼핏 두려움마저 느끼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다른 요정들과 마찬가지로 신과 뭔가 연관성이 있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는 듯하다.
그냥 예전처럼 편하게 대하라고 할까 하다가, 진짜 목적을 숨긴 채 자신들을 요정의 나라로 끌어들인 것이 괘씸해서 당분간은 이대로 놔둘 생각이다. 그래봐야 시간이 지나면 또 까불거리겠지만.
-제가 잘 단속할게요. 어떻게… 안 될까요?
안 된다고 그러면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좀 더 놀려줄까 하다가 조막만한 애 데리고 뭐하는 건가 싶어서 그냥 허락해 주었다. 오랫동안 바깥에서 떠돌았는데도 여전히 친구로 지내고 있다면 정말 친한 사이일 테니 이 정도는 허락해 줘야겠지.
“마음대로 해. 단, 소란스럽게 굴지 않는다는 조건이다.”
-감사합니다!
림은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며 몇 번이나 인사를 하더니 이내 친구들을 불러오기 위해 요정의 문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이 문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열어두는 편이 나을까. 아니면 필요할 때만 그때 그때 열어두는 편이 나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문득 요정의 문으로부터 무언가 벌떼 같은 것이 웅웅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화들짝 놀라 뭔가 싶어 바라보니, 다름 아닌 요정들이었다.
세상에. 도대체 이게 몇이야? 세어 보기도 난감할 지경이다.
“림! 친구들 몇 명만 부르는 거 아니었어?”
너무 많다보니 림이 어디 있는지 찾는 것조차 쉽지 않을 지경이다. 느닷없이 월… 아니 림을 찾아라 실사판을 하게 생겼다.
-그, 그게…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림을 찾아라 실사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스스로도 미처 예상치 못했는지 진땀을 흘리며 형진 앞에 스스로 림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입고 있는 메이드복이 아니었으면 림인지 알아보지도 못할 뻔 했다.
“끙…”
이 요정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앓는 소리를 내고 있자, 금방이라도 쫓겨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인지 요정들 모두가 눈물을 글썽이며 형진을 향해 애원 섞인 시선을 보내기 시작한다.
어디의 호구들과는 달리, 이 녀석들은 자신의 외모가 인간에게 어떻게 보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몇인지 세는 것조차 난감할 정도의 수많은 눈동자들이 울먹거리며 반짝이는 눈으로 응시하는 걸 마주 보고 있자니, 귀엽다기 보다는 오히려 괴기스러운 느낌마저 전해질 정도다.
기가 약한 사람이 밤길에서 갑자기 이런 광경과 마주친다면 아마도 바로 심장마비에 걸리지 않을까.
“후… 아까 말한 대로 소란스럽게 굴지 마라. 시끄러우면 다 쫓아낼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았나!”
-넵! 요정왕님!
“좋아. 가급적 집 밖으로는 나가지 말고. 괜히 사람들 놀라니까.”
-그럴게요!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일행들은 요정들이 오기 전에 전부 위층으로 올라간 상태. 형진은 문을 열고 올라가면서 마치 자신을 호위하듯 양 옆으로 자리를 잡은 림과 람에게 물었다.
“그런데, 전부 림 너 같은 브라우니들이냐?”
-아뇨.
“그럼?”
-요정들도 전공이 꽤 많아요. 농작물 돌보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그루아 같은 애들도 있고, 옷 만드는 걸 좋아하는 실키스 같은 애들도 있어요. 요정 근위대 같은 애들은 리건이라고도 부르죠. 아무튼 여러 가지에요.
“오호.”
이쪽의 요정들은 종 자체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문 분야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모양이다. 하기야 얘들도 국가라는 형태로 사회를 이루고 사는 존재들이니 이렇게 요정들이 직무별로 구분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나저나 전공이라니. 꽤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군.
그렇게 요정들을 떼거지로 몰고 올라가자 가지고 갔던 도시락통이라든가, 소풍의 뒷정리로 바쁘게 움직이던 식구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헉!”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왜 이렇게 많이…”
“림이 집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하니까 다들 몰려와 버렸어. 림, 일단 데리고 가. 괜히 다른 사람들 방 뒤지거나 하지는 말고.”
-넵!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림은 그렇게 부동자세로 마치 기사처럼 가슴을 손을 얹으며 경례를 해보인 후, 요정들을 몰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모든 요정들이 죄다 림을 따라 나선 것은 아니었다.
“넌… 람이었던가? 왜 안 따라가고 있어?”
솔직히 형진으로서는 메이드복을 입은 림 외의 다른 요정들은 다 거기서 거기 같아 보였지만, 전대 여왕이었던 람은 나름 화려한 드레스 차림을 하고 있는지라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람은 형진을 물음을 듣자 몸을 배배 꼬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여왕이었던 저는 당연히 요정왕을 모셔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얘가 뭐래는 거야.
“쿡쿡. 좋으시겠어요. 요정왕 전하.”
목도리 행세를 하고 있던 미엘이 대번에 그를 놀려대기 시작한다. 에효. 종족을 불문하는 이놈의 인기는 정말.
“됐으니까 림이랑 가서 놀아.”
-하지만…
“언능 못가!”
-가, 갈게요!
정확히는 형진이랑 뭘 어떻게 해보자는 것 보다는 나름 친밀한 사제 관계를 맺고 있는 림에게 대항하기 위해 왕과 여왕이라는 관계를 대입해 접근해 보려 했던 모양이다. 저런 걸 보면 나름 전대 여왕이라고 권력에 아직 미련이 남은 건가 싶기도 하고.
주방으로 내려가자 유아가 제랄딘과 함께 도시락을 담았던 통들을 설거지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정확히는 유아가 그릇을 씻고 제랄딘이 마른 헝겊으로 물기를 닦는 식이지만, 그 유아가 저렇게 유능해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형진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하긴 형진 밑에서 그렇게 일을 많이 했는데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본 금지옥엽인 제랄딘보다 일을 못하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심각한 문제다.
“어쩐다. 그래도 모처럼의 손님을 밥 한 끼 안 먹이고 돌려보낼 수도 없고.”
“네? 누구 왔어요?”
“림 녀석이 요정들을 하나 가득 불러들였어.”
“아… 그럼 어쩌죠?”
“글쎄. 어떻게 할까.”
그때 화덕에 쓸 숯과 장작을 가지고 들어오던 오귀스트가 그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제가 왔을 때처럼 각자 덜어 먹는 방식이면 어떨까요.”
형진의 사정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오귀스트는 종종 이런 식으로 평소에 하마란이 하는 힘쓰는 일들을 돕곤 한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고 해도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냐며 이런다.
“그거 괜찮군요. 워낙 수가 많아서 어떻게 해야 할까 싶던 참인데.”
사람이라면 차라리 양이라도 계산하기가 쉽지, 몇인지도 모르는 요정들이 상대면 그것도 쉽지 않다. 요리 자체보다도 그 부분 때문에 난감해 하는 형진의 심정을 바로 알아차리고 적절한 조언을 하다니, 역시 연륜이란 건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다.
형진이 주방에서 그렇게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림의 방을 찾아갔던 요정들은 난리가 났다.
-이, 이, 이건!
-이런 놀라운 예술작품이!
-이건 침대가 아니야. 예술이야!
-침대 그 자체도 놀랍지만, 이 섬세한 음악 소리는 도대체!
-도대체 어디서 난 거야, 이 침대!
-알려줘!
-어디야! 누구의 솜씨야! 제발 알려줘!
실용성에 예술성까지 겸비한 림의 침대는 요정들의 눈을 돌아가게 만들어 버렸다. 그냥 그 자체로도 흠 잡을 데 없는 걸작이지만, 그것이 남의 떡이라면 몇 배는 더 커 보이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의외로 세속적인 이 요정들에게 있어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의 불꽃을 지피게 만드는 기폭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침대를 만든 장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같으면?
-바로 나 림의 스승님이시자, 이 집의 주인이시며, 또한 새로이 요정왕의 자리에 오르신 바로 그분이시다!
-그, 그럴 수가!
요정들이 림을 따라 이 집에 몰려든 것은 앞서 림이 망상필드에서의 전투 중에 사용했던 맛의 파도에 쓰였던 음식들이 사실은 형진의 솜씨라는 소문이 요정들에게 퍼졌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난 맛의 향연이 한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악할 만한 일인데, 이런 놀라운 걸작마저 그의 솜씨라니, 나름 각 분야에서 한 가락씩 하는 요정들로서는 실로 뒤집어질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 믿을 수 없어!
-그래! 아무리 그분이 대단한 분이라도 고작 백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 그게… 그분이 만약 아바타라면 딱히 그렇게 단정할 수만도 없는 일 아닐까.
-헉!
그렇게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대는 요정들을 향해 림은 씩 웃으며 이렇게 제안했다.
-믿지 못하겠다면 이 집 안에 있는 그분의 다른 작품들을 보여주도록 하지.
-정말? 이런 게 또 있다고?
-물론. 자, 나를 따르라!
-오오!
림은 요정들을 데리고 곧바로 카트린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자 귀여운 소녀 카트린 대신 심기 불편한 표정의 크루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지?”
-그, 그게…
이러니저러니 해도 크루그 역시 한 사람의 집행자. 게다가 요즘은 오귀스트와의 대련을 거치며 한층 실력이 일취월장 하고 있다. 그런 사람이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며 얼굴을 찌푸린 채 맞이하자 요정들은 흠칫하며 놀랄 수밖에 없다.
“카트린은 잠들었다.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다음에 찾아오도록.”
-알겠습니다.
급 공손해진 림의 태도에 다른 요정들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카트린의 방에서 멀어졌다.
-그 꼬맹이 녀석이 뭐길래 그렇게 조심하는 거야?
궁금함을 견디지 못한 요정 가운데 하나가 그렇게 묻자, 림은 주위를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집행자.
-헉! 그 녀석이?
-그래. 이제야 말이지만, 이 집에 사는 식구들 대부분이 신과 관련이 있어. 유일하게 신과 관련이 없었던 게 카트린인데, 걔도 최근에는 신과 교감을 시작한 것 같으니까 조심해.
-헐…
그제서야 요정들은 카트린이 형진을 오빠라고 부르던 것이 기억났다. 그렇다면 혹시 카트린은 형진이 직접 키우고 있는 신녀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 집에서는 허투루 생각할 존재가 단 하나도 없는 셈이다.
-그나저나 큰일이네. 다른 분의 방은 마음대로 들어가기가 좀 그런데.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아래쪽에서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바로 식사 시간을 알리는 소리다.
-어라. 벌써?
형진이 주방으로 향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식사 준비가 끝났다니. 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자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 가만히 뒤를 따르고 있던 람이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혹시 적이 쳐들어 오기라도 한 거야?
어디서 그런 발상이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림은 그런 람의 말은 무시한 채 다른 요정들에게 말했다.
-저건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야.
그 말에 요정들은 다시 흥분했다. 자신들이 이렇게 떼거지로 몰려온 이유를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다.
림이 망상력으로 구현한 맛의 파도를 경험했던 요정들은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고이기 시작하는 침을 주체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을 지었고, 그것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요정들은 도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얘들이 이렇게 맛이 가는 건가 하며 궁금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요정들의 내면에서 식욕이라는 이름의 검은 욕망이 치밀어 올라 임계점에 도달한 순간, 녀석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한 무리가 되어 외쳤다.
-가자!
-드디어 때가 왔다! 욕망이여, 울부짖어라!
-크크크, 그 맛의 향연을 경험할 기회가 마침내 온 것인가! 전군 돌격!
-돌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