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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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요정 익스프레스
요정들이 치밀어 오르는 식욕에의 망상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한 무리로 뭉치자 림은 당황했다.
-헛! 잠…
하지만 이미 통제 불가능의 영역으로 치달아 버린 요정들은 검은 모기떼처럼 앵앵거리며 림의 외침을 묻어버리고 그대로 주방으로 진군했다.
그것은 흡사 눈에 보이는 모든 식물을 먹어치우며 전진하는 성난 메뚜기떼와 같았다. 과연 누가 있어 이 굶주린 요정 무리를 막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줄 서.”
주방 입구에 떡하니 막아선 누군가를 발견하는 순간 요정 무리들은 마치 찬물을 끼얹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우뚝 멈춰서야만 했다.
그것은 바로 헌신의 일격을 몸에 두른 채 신장처럼 버티고 선 커다란 체구의 메이드. 바로 하마란이었다.
아무리 식욕에 눈이 먼 모기떼라도 몸 전체에서 파괴력 짙은 기운을 풀풀 풍기며 위압적인 시선으로 내려 보는 이 장신의 메이드 앞에서는 기가 팍 죽을 수밖에 없었다. 얼핏 봐서는 기세등등하지만, 애초에 그 기세 자체가 허세와 망상의 결과물인 이상 이렇게 강대하고 실체적인 위압감을 뿜어내는 인물 앞에서는 찍 소리도 못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딱 봐도 무려 신뢰와 헌신의 수호자. 말로 뭘 어떻게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족속이다.
-하, 하하…
기겁을 하고 쫓아왔던 림은 하마란 앞에서 찍 소리도 못하고 가만히 줄을 서고 있는 요정들의 모습에 허탈해 지고 말았다. 하기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긴 하다만.
-윽. 밀지마.
-거기 새치기 하지 말라고! 줄 서 있는 거 안 보여?
-새치기 아니거든? 화장실 다녀왔거든?
-어디서 거짓말을. 내가 다 봤는데!
물론 그런 와중에도 서로 말소리를 줄여가며 투닥 거리는데 여념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물론 그렇게 소란스러워질 기색이 보일 때마다 하마란이 스윽 훑어보면 다시 조용해지지만.
하마란은 그렇게 정신 사나운 요정들을 통제 하다가 메이드복 차림의 림을 알아보고는 말을 건넸다.
“림. 거기서 그러지 말고 가서 도우십시오.”
-그래도 될까요.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림은 손님이 아니라 이 집의 메이드입니다.”
-아, 내 정신 좀 봐.
림이 다른 요정들을 지나쳐 후다닥 주방으로 달려가자 새치기 하지 말라고 외치려던 요정들은 눈을 부릅뜬 하마란의 모습에 다시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또한 몇몇 요정들은 이렇게 정신 없는 와중에도 하마란이 림의 존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메이드복 때문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어쨌거나, 그렇게 하마란에 의해 강제로 줄이 세워진 채 마침내 주방으로 입장한 요정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다 요리야?
-우리 여기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언제 이 많은 걸?
-그러게?
당황한 건 오늘 처음 이 집에 온 요정들만이 아니었다.
-스승님,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에요?
림 역시 테이블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고 크게 놀란 표정을 짓는 건 마찬가지였다.
“뭐긴. 예전에 해서 가지고 있었던 거지. 손님이 많아서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겠더라고.”
-아하.
“그나저나, 크루그랑 카트린은?”
-카트린님은 피곤한지 벌써 잠이 든 모양이에요. 크루그님은 아무래도 옆을 지킬 모양이구요.
“그래? 그럼… 유아, 둘이 먹을 음식 좀 적당히 담아주고, 림은 그것 좀 크루그한테 가져다 줘. 나중에라도 먹으라고.”
“네.”
-알겠습니다. 스승님.
저녁은 뷔페식으로 하기로 결정했어도, 막상 여러 가지 음식을 대량으로 하려고 보니 귀찮았던 모양이다. 사실 모처럼 야외에서 열심히 놀았던 탓에 형진을 포함한 다른 이들도 좀 피곤하던 상황이라 후딱 먹고 후딱 쉴 생각으로 이런 방법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요정들이 보기에 이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눈앞에 펼쳐진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의 향연이라니! 아직 먹기는커녕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는 것 뿐인데도 벌써부터 정신이 몽롱해지는 기분마저 느낄 정도다.
“자, 여기 이 접시에 먹을 만큼만 담아서 드시면 돼요. 알겠죠?”
-네!
워낙 요정들의 인원이 많다보니 티세트의 잔 받침부터 시작해서 접시 비슷한 식기는 모조리 총출동해야 했다. 요정들은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있는 하마란의 옆을 슬금슬금 지나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유아의 인도 하에 각자의 접시에 요리를 담아 식사를 시작했다.
-우으으으으읏!
-이, 이건!
-크아아아아! 나의 심장이 외치고 있다!
-허세와 망상이시여,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마시쩌! 마이쩌!
-큭! 안 돼. 이러면 나의 몸 안에 잠들어 있는…
호들갑스러운 요정들의 반응에 식구들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어쩐지 처음 형진의 요리를 접했을 때 자신들이 보였던 반응이 떠오른 탓이다.
-말도 안 돼. 림은 매일 이런 요리를 먹고 있었던 거야?
-그 망상필드에서 맛보았던 것들이 전부 현실이었다고? 이런 터무니없는!
-사기다! 순수한 망상이 아닌 현실을 대결에 끌어들이다니! 이단이다! 신성모독이다!
-그렇긴 해도, 이것보다 더 한 맛은 솔직히 상상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건 그래. 인정.
하지만 모두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의 뜻에 따라 중2병스러운 반응을 보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몇몇 요정들은 진지하게 열띤 토론을 이어가고 결국 몇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결론이라고 해봐야 별 거 아니다.
-부럽다.
-나도 침대 가지고 싶어.
-나도 매일 이런 요리를 먹고 싶어.
-방법이 없을까.
-있어!
-그게 뭔데?
-우리도… 저 옷을 입으면 돼!
-저건!
그렇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카트린을 제외한 이 집의 여자들이 입고 있는 메이드복이었다. 저마다 디자인이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그녀들은 모두 림과 마찬가지로 메이드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생각해 보면 하마란도 수많은 요정들 사이에서 메이드복을 통해 림을 한눈에 알아봤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자신들 역시 메이드복을 입으면 림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뜻!
-이 집의 메이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 그건…
-물어보자.
-그래, 물어보자.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 결국 요정들은 식사를 하다 말고 형진에게 우르르 몰려가 자신들도 메이드가 될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메이드? 글쎄.”
형진은 자신을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요정들을 한 번 쓰윽 훑어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 메이드는 되고 싶다고 해서 막 되고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말이지.”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다만 스스로 메이드가 되고 싶다고 제 발로 찾아온 사람이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을 뿐. 따지고 보면 유아부터도 반강제로 메이드 일을 시작하지 않았던가. 굳이 비슷한 경우를 찾자면 림 정도가 있겠지만, 그녀는 사람이 아니니 일단 제외.
형진의 말을 들은 여자들은 또 시작인가 싶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스스로 이 악마의 입 안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불쌍한 요정들을 향해 연민의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들이 던지는 시선의 의미를 알 리 없는 요정들은 애가 닳아서 형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시켜만 주신다면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메이드가 되면 침대 만들어 주시는 건가요?
-메이드가 되면 이런 식사를 매일 먹을 수 있는 건가요?
대충 요정들이 원하는 바를 알아챈 형진은 씩 웃으며 답했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이 요리들은 물론이고 침대 역시 세상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명품들이다.”
그건 확실히 틀린 말이 아니다. 형진과 인연이 없다면 돈이 있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니까.
“림에게 그런 것들을 제공한 것은, 녀석이 오래 전부터 나를 열심히 도왔고, 또한 제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완곡한 거절이라고 볼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요정들은 그 대답을 통해 어떻게 하면 자신들도 림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지 깨달았다.
-그럼 저희도 열심히 도울게요!
-저희도 제자가 될게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부디 받아주세요!
하지만 형진은 덜컥 받아들이지 않고 한 번 더 튕겼다.
“그래? 흠… 하지만 단순히 요리를 먹는 것 정도라면 앞으로 물건을 나르는 일을 한 건 할 때마다 수플레 하나 정도는 제공을 하기로 했는데.”
물론 이 식사 전이었다면 수플레 하나라도 우와 하며 달려들었겠지만, 이제 요정들은 고작 수플레 하나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는 림의 것과 같은 예쁜 침대를 구할 수가 없다!
-이미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어요!
-제발 메이드로 받아주세요! 엉엉!
-부탁드려요! 훌쩍.
애원하는 요정들의 모습에 형진인 씩 웃었고, 여자들은 역시나 이렇게 되는 건가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애초에 요정의 문을 건너온 시점에서 이들은 모두 형진이 펼쳐놓은 맛의 지옥이라는 거대한 함정에 빠져 있었던 셈이다.
“할 수 없군. 너무 수가 많아서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이렇게 애원하는데 받아주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디 보자. 그럼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한 번 볼까. 설거지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물론이죠!
곧바로 식사가 끝나고 남은 식기들에 요정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정리와 설거지를 시작한다. 혼자서 열 명 몫을 하는 림과 비슷한 수준의 요정들이 그렇게 엄청난 숫자로 덤벼들자, 그 많던 식기들이 채 몇 분이 지나기 전에 반짝 반짝 새것처럼 닦여져 차곡차곡 정리된다.
“우와아아…”
“압도적이군요.”
“그러게.”
요정들이 일을 잘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쯤 되고 보니 확실히 놀랄 정도다. 하지만 형진의 시험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제법이군. 하지만 이 집의 메이드라면 그 정도는 다들 한다.”
-큭! 역시… 만만치 않군요.
순간 유아는 물론이고 하마란이나 제랄딘마저 움찔한 표정을 짓는다. 제법 오랫동안 형진 밑에서 시달린 유아야 그렇다 쳐도 손재주 없기로는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하마란이나, 아직 메이드로서는 완전 초보나 다름없는 제랄딘으로서는 가슴을 쿡쿡 찔러대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너희들의 자격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는 아직 시험을 더 거쳐야 한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역시 메이드라면 바느질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그러니 이번엔 재봉 솜씨를 보겠다. 천을 내줄테니, 너희들이 입을 메이드복을 만들어 봐라. 예쁜 메이드복을 만드는 이에게는 특별한 보상을 지급하도록 하지.”
특별한 보상이라는 말에 요정들은 다시 눈이 돌아가 버렸다.
-맡겨 주세요!
곧바로 여러 가지 천을 가져다주자 요정들은 저마다 달려들어 자신이 입을 메이드복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몇 요정들은 이내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실키스나 브라우니 같은 요정들이야 이게 원래 전공이거나 전공에 가까운 일이니 문제가 없었지만, 농작물 재배가 전문인 그루아나 경비 업무를 주로 맡는 리건 같은 경우는 옷 한 벌 만드는 일조차 쉽지 않은 탓이다.
-크흑! 이렇게 물러나야 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바느질 좀 배워둘 걸!
하지만 형진은 그렇게 버벅거리는 이들을 따로 골라내어 하마란과 유아에게 맡겼다.
“각자 잘하는 분야가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너희들은 얘들에게 따로 시험을 받도록. 너희들은 얘들 것 까지 만들어! 많이 만드는 사람에겐 그만큼 가산점이 붙는다!”
-감사합니다!
-우오오오! 가산점!
-일등은 내거야!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요정들의 직업군에 대한 분류가 이루어지고 각자의 상관 또한 정해졌다.
단숨에 요정들의 관리 체계가 만들어지고, 각자의 개성이 담긴 메이드복을 입은 요정들이 하마란에 의해 자로 잰 듯 줄까지 서 있는 모습이 완성되었다.
“하… 하하…”
“이건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솔직히 중구난방인 요정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잘 훈련된 군대처럼 조직이 갖춰지자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식구들은 절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표창을 하겠다. 최우수상. 람!”
-쳇. 이길 수 있었는데.
-역시 전대 여왕. 그 와중에도 주인님의 취향을 간파하다니.
그렇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람이 최우수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형진이 펼친 망상 필드에서 여자들이 입고 있던 비키니 수영복의 모습을 참고해 그것을 메이드복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래봐야 조막만한 요정들이라 그냥 좀 살색이 많은 귀여운 옷이구나 할 뿐이지만, 식구들은 역시 못말릴 변태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