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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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새해
해가 바뀌면서 가장 먼저 찾아온 변화는, 요정들을 통한 우편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연말의 이벤트를 통해 신전을 통한 우편 서비스가 대대적으로 세상에 선을 보였고, 해가 바뀌자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사는 친척이나 지인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의 이용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요정들은 한층 바쁘게 세상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아직 각 지역에 자생하는 운송업자들과의 본격적인 협업이 이루어지기 전이라 대규모 물류 사업보다는 우편 서비스에 초점을 맞춘 상황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복잡하고 바쁠 수 밖에 없다.
이런 우편 서비스의 시작으로 요정들이 세상 곳곳을 누비게 되자, 가장 먼저 찾아온 변화는 우선 먹거리의 다양성이었다. 연말 이벤트 때는 정신이 없어서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으나 점차 안면을 익혀가면서 사제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신전에 찾아온 작은 손님들에게 각 지역의 먹거리들을 대접하고는 했는데, 그렇게 모인 음식물들이 요정의 나라에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실질적으로 사제들이 대접한 음식물이나 식재료들의 양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세계 규모라는 점. 게다가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지역이나 계절의 제한에서도 벗어난다는 뜻이 되어 버린다.
“포도? 겨울인데 포도가 나?”
형진은 아침 식사 준비를 하러 나왔다가 유아가 손질하고 있는 적포도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금방 밭에서 딴 것 같은 잘 익은 적포도도 그렇게 요정들이 가져온 먹거리 중에 하나였다.
“요정님이 가져 왔어요. 맛있겠죠.”
“지금 시기가… 그렇군. 남반구 쪽은 지금이 딱 포도 수확을 시작할 시기인가.”
“네? 남반… 뭐요?”
“남쪽으로 쭈욱 가다보면 여기랑 계절이 정 반대인 곳이 나와. 그렇군. 세계 규모로 일이 확대되니 이런 장점도 있네.”
뭔 소리인가 싶었지만, 가끔 이런 식으로 알다가도 모를 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는 남자인지라 그런가보다 하고 설렁설렁 넘어간다. 그러고 보면 유아도 이제는 형진이라는 남자에게 꽤 익숙해진 모양이다.
잘 손질된 포도송이를 하나 따먹었다. 그러자 달콤하고 새콤한, 정말 밭에서 막 따서 가지고 나온 듯한 향기로운 맛이 입 안에서 톡 하고 터져 나온다. 유아의 손질 솜씨도 이제는 정말 눈에 띌 정도로 좋아져서, 어지간한 식재료는 그녀의 손을 한 번 거쳐가는 것만으로도 금방 밭에서 따온 것 같은 모습으로 돌변한다. 아니, 쏟아붓는 신성력의 효과를 생각하면 오히려 산지에서보다 더 신선하고 맛있게 변모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좋은데. 와인 만들면 딱 좋을 것 같은 최고급 포도로군.”
“와인이요? 와인도 만들 줄 알아요?”
“물론. 말 나온 김에 한번 만들어 볼까?”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말은 쉽게 했지만, 와인을 만든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갖춰야 할 것이 상당히 많은 탓이다. 술도 발효 식품이고, 대부분의 발효 식품이 그러하듯 세심한 준비와 관리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형진은 우선 물자 조달 의뢰를 통해 여러 종의 참나무 목재를 사들인 다음, 그 중에서 통을 만드는 데 적합한 수종을 골라내 와인을 담을 통과 사람이 들어가서 누워도 좋을 정도의 커다란 대야를 만들었다.
다음은 와인을 숙성시킬 장소의 물색. 직사광선이 들지 않고 가급적 일정하게 상온이 유지되는 공간이 필요한데, 마침 형진에게는 딱 어울리는 장소가 있었다. 바로 요정의 나라다.
이렇게 준비가 갖춰지자, 형진은 요정들에게 명을 내렸다.
“포도 사와. 이거랑 같은 걸로. 많이.”
-넵! 요정왕의 명을 받듭니다!
-왕을 위하여!
-왕을 위하여!
요정들은 형진의 명이 떨어지자 절도 있는 동작으로 가슴에 손을 척 하고 올리면서 입을 모아 외쳤다. 이 중2병 요정들이 아무래도 배달 다니다가 이상한 걸 보고 온 모양이다. 일만 잘하면 상관은 없지만.
요정들은 마치 꽃에서 꿀을 나르는 벌떼처럼 토실토실하게 잘 익은 포도송이들을 사다가 대야에 가득 채웠다. 그렇게 몇 개의 대야에 포도가 가득 채워지자, 형진은 식구들을 불러 모았다.
난데없는 포도 더미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크루그가 묻는다.
“한 겨울에 이 많은 포도가 어디서 난 거에요?”
“이곳은 겨울이지만, 세상 반대쪽에서는 여름이 아직 끝나지 않은 곳도 있거든. 자, 모두 이걸 신도록 해.”
형진은 깨끗하게 닦여진 장화를 꺼내 놓은 다음, 자신은 카트린에게 다가가 신발과 양말을 벗기고 장화를 신겨 주었다.
“장화는 왜요?”
“지금부터 재미있는 걸 하려고. 자아, 아가씨. 저에게 당신과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춤이요? 지금요?”
“그래, 지금.”
카트린은 또다시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려 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너무 열심히 끄덕이는 바람에 어지러워질 정도로.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식구들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것을 바라보며, 형진은 카트린을 번쩍 안아올린 다음, 포도가 가득 담긴 대야 속으로 들어갔다.
“앗! 포도!”
형진이 신은 장화가 포도를 밟아 으깨자 카트린은 놀라 비명을 질렀다.
“괜찮아. 이제부터 이 포도들을 으깨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거든.”
그렇게 대답하고는 한쪽에서 어느새 자리를 잡고 있는 요정들을 향해 외쳤다.
“자, 풍악을 울려라!”
-예입!
미리 교육시킨 명령이 흘러나오자 요정들은 흥겨운 춤곡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형진은 안고 있던 카트린을 포도가 가득 담긴 대야에 내려놓고는 두 손을 잡아 부축하며 말했다.
“자, 귀엽고 아름다운 아가씨. 한 곡 추실까요?”
“네!”
형진이 카트린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서로를 돌아보더니 이내 서로 짝을 맞춰 대야 안에 들어가 춤을 빙자한 포도 밟기를 시작했다. 제랄딘은 미엘과, 유아는 크루그와, 오귀스트는 하마란과 그렇게 서로 손을 잡고 춤을 추며 열심히 포도를 밟는다. 곧바로 주방 안은 식구들의 웃음 소리와 요정들이 연주하는 음악 소리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좋아! 기왕 쓰는 거 팍팍 쓴다. 열려라, 망상 필드!”
형진의 손에 작은 피리와도 같은 모양의 단장이 들려지자, 주방 안의 풍경이 햇살 가득한 포도밭의 풍경으로 바뀌고, 그들만이 아니라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함께 웃고 떠들며 포도를 밟는 모습이 펼쳐진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조금 어정쩡한 자세로 손을 맞잡고 춤을 추던 오귀스트와 하마란도 조금씩 그런 분위기에 녹아들기 시작하더니 조금 지나자 어느새 모든 일을 잊고 열심히 춤을 추었다.
어느 정도 포도를 으깨는 과정이 끝나자, 형진은 망상 필드를 거두어 들였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볼을 발그레하니 붉힌 채 숨을 할딱거리는 채로 카트린이 질문했다.
“근데 왜 포도를 이렇게 으깨는 거에요?”
형진이 하는 일이니 뭔가 이유가 있겠다 싶어 따라 하긴 했지만, 그냥 먹어도 맛있는 포도를 왜 이렇게 으깨는지 영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카트린도 포도주 알지?”
“네.”
“그걸 만들기 위해서야.”
“포도주를 이렇게 만들어요?”
“응. 이렇게 으깨서 통에 담아 보관해두기만 하면 돼.”
“와아!”
포도 껍질에는 천연 효모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렇게 껍질째로 으깨면 곧바로 발효가 시작된다. 물론 포도의 품종이나 어떤 술을 만들 것인가에 따라 이후의 공정에 차이가 나게 마련이지만, 어차피 전문적으로 포도주를 만들 것도 아니고 재미 삼아 만드는 정도이니 큰 문제는 아니다.
형진은 으깨진 포도를 1차 발효시키기 위해 통으로 옮겼다. 이후로도 많은 잔여 공정이 있지만, 일단 오늘은 통에 옮겨 요정의 나라로 옮기는 것까지가 할 일의 전부다.
그렇게 일이 모두 끝난 뒤 점심에는 미리 만들어둔 가래떡으로 떡국을 끓여 먹었다. 밑간한 동굴곰 고기를 달달 볶은 다음 고기가 익어 갈색으로 변할 즈음 물을 넣는다. 그렇게 팔팔 끓은 고기 국물에 직접 만든 수제 떡을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고명으로 지단과 송송 썬 대파를 얹어 내면 한 끼 식사가 완성된다.
“잘 먹겠습니다!”
뜨거운 국물을 호호 불어가면서 쫄깃한 떡을 스푼으로 떠서 입에 넣는다. 열심히 몸을 움직인 다음이라 그런지 카트린도 두 그릇이나 뚝딱 해치워 버렸다. 생긴 것은 모두 서양 사람인데, 형진의 손맛에 길들여져서 그런지 음식 먹는 걸 보면 한국사람 저리가라다.
식사가 끝나자 각자 자신의 할 일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형진은 순식간에 자기 일을 찾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미엘에게 말했다.
“할 일 없는 사람들끼리 데이트나 갈래?”
“어디로요?”
“어디든.”
미엘은 이 남자가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은 표정이다.
이번에 포도주 만들기를 하면서 형진은 느낀 것이 있었다. 이 세계는 충분히 넓고 풍요로운데, 자신은 라야바르트라는 나라의 아주 작은 일부 밖에는 체험하지 못했다. 이곳에 온지도 꽤 시간이 많이 흘렀건만, 이 세계 특유의 식재료도 고작해야 동굴곰 고기와 거대 전복 정도 밖에는 찾아내지 못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세상은 넓고 먹거리는 많다. 게다가 던전 속에 존재하는 온천처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비경도 얼마든지 있게 마련. 예전에는 물리적인 이유로 인해 그런 것들을 찾아내고 밝혀내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미엘이라는 훌륭한 동반자도 있고 요정의 문이라는 사기에 가까운 이동 방법도 존재한다. 마치 게임에서 지도를 밝히는 과정처럼, 일단 한 번 가서 눈 안에 담아두면 굳이 바쁜 요정들을 동원할 것도 없이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형진이 미엘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꿍꿍이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협력할게요.”
미엘은 형진의 설명을 듣자 흔쾌히 허락했다. 사실 그녀로서도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오랜 시간 집을 비우는 것도 아니고, 또한 조금은 답답한 인간 모습에서 벗어나 거대한 흑요호 상태로 창공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것도 꽤 훌륭한 스트레스 발산법이니까.
모처럼이라 다른 사람에게도 의사를 물었다.
“음, 전 아이들과 약속이 있어서요.”
“아이들?”
“네, 신전 아이들이 절 얼마나 좋아한다고요. 에헴.”
“쿡.”
여기서 신전 아이들이란 그리칸 신전의 아이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회합장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면서 신전에서 기르는 아이들 역시 회합장을 교육 장소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유아는 특히 신전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천성이 아이처럼 순진무구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모든 사제들 가운데 가장 높은 위치라 할 수 있는 신녀이다 보니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에도 유아와 같은 천연 호구들이 세계 각지에서 양산되고 있다는 소리다. 나무아미타불.
유아에게 배우는 아이들이 좀 걱정되기는 하지만, 사제로서의 능력만을 따지고 본다면 그녀만한 선생님도 보기 드문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에 있어서도 그렇고. 모르긴 해도, 그녀는 아마 좋은 어머니가 될 것이다.
“전 우편 업무를 살펴야 해서요.”
“혼자서 다하려고 하지마. 말했지? 일은 적당히 나눠서 하는 것이 최고야.”
“알아요. 하지만 아직 막 시작 단계라 살펴야 할 일이 많아요. 시간이 좀 지나면 사제님들이나 요정들도 익숙해지겠죠.”
제랄딘도 신혼여행 겸해서 데이트를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 모양이지만, 막 일을 벌여놓은 시점에서 총괄 업무를 담당하는 그녀가 자리를 비우기는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하나둘 빠져 나가고 보니, 결국 남은 건 형진과 미엘 단 둘 뿐이다. 하다 못 해 별 다른 일이 없어 보이는 오귀스트조차도 브라드로슈 가문의 기사들과 약속이 있다면서 나가버렸을 정도다.
“크윽. 이 집에서 제일 할 일 없는 한량이 나였단 말인가.”
“풉.”
항상 정신없이 무언가에 몰두하느라 바쁜 주제에 그렇게 푸념을 늘어놓는 형진의 모습에 미엘은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이 집의 식구들이 모두 바쁘게 움직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부분 형진이 벌여놓은 일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그 주체라 할 수 있는 형진이 자신을 한량에 비유하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쳇, 할 수 없지. 단 둘이 실컷 데이트를 즐겨 보자고.”
“원하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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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4 : 세번째 문단의 내용을 사제들이 대접한 것으로 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