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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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새해
형진과 미엘이 그렇게 데이트 준비를 할 즈음, 저택을 빠져 나온 오귀스트는 두건과 망토로 자신의 외모를 감추고는 어디론가 향했다. 모습만 봐서는 오랜만에 암살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가 형진에게 밝힌 이유 자체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움직이는 진짜 이유는 사실,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엘 파르드의 밀정들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 기사들의 모임에는 좀 더 복잡한 사정 또한 있었다.
제랄딘을 맡고 크루그에 의해 가짜 왕자 노릇을 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진은 그 일에 그다지 큰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명분을 만들어 주고 침공 경로인 대미궁을 선점하는 일을 시작하기는 했어도 엘 파르드라는 국가 자체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지금으로서도 사는데 부족함이 없고, 희망과 생명의 대리자가 되면서 브라드로슈 공작 같은 대귀족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위치에 올랐으니 굳이 번거롭게 혼란스러운 나라의 사정에 개입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뭐하러 그 아수라장에 스스로 들어가 사서 고생을 하겠는가. 왕이 된다고 누가 떡 하나 더 주는 것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얻을 떡이라면 그냥 스스로 만들어 먹으면 된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충분히 갖춰져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형진의 생각과는 달리 그리칸 주변의 상황은 꽤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브라드로슈 공작이 그리칸에 자신의 가문에 속한 병력들을 집결시키고, 모험가들을 고용하여 대대적으로 대미궁의 탐사를 시작하자 그 정보를 접한 주변국들 역시 덩달아서 급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바로 엘 파르드였다.
왕족들이 참살된 그 날의 사건 이후 엘 파르드라는 나라는 갈기갈기 찢겨진 상태로 내전에 빠져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가 최근에 들어서야 겨우 몇 개의 세력으로 재편되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나라 하나가 거의 풍비박산이 난 상황에서도 외세의 위협을 받지 않은 것에는 발디프스 대산맥이라는 천혜의 험지가 다른 나라들의 침공을 막아내는 방패 구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미궁이 발견되자, 지금까지 혼란에 빠진 엘 파르드를 보면서도 감히 손을 뻗지 못하고 있던 나라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아직 본격적인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겨울이라는 계절 때문일 뿐, 날이 풀리고 녹은 눈이 말라 행군에 지장이 없는 시기가 되면 그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불안하기는 해도 안정으로 향해 가고 있는 것에 잠시나마 안도하고 있던 엘 파르드의 각 세력들은 브라드로슈가 대놓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나라는 그렇다 쳐도, 라야바르트에는 도망친 왕자와 공주가 망명중이라는 소문이 전부터 돌고 있었고, 브라드로슈는 이전부터 이제는 사라진 엘 파르드의 왕실과 혼담이 오고가던 가문이었다. 누가 봐도 그들이 갑작스럽게 움직이는 이유는 엘 파르드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였다.
이렇게 되자 엘 파르드의 세력들은 브라드로슈의 진의를 탐색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자신들의 정통성에 위협이 되는 왕자와 공주의 위치를 탐색하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부족한 정통성을 왕자와 공주를 통해 보충하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파견된 사람들의 시선의 종착지는 결국 그리칸에 머물고 있는 브라드로슈 공작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방문 이후 공작이 형진의 저택과 왕래를 하지 않고 있는 것도 결국 그렇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형진의 저택에는 강자들이 우글우글대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요정이나 토끼들까지 거기에 가세해 어지간한 자들은 담을 넘는 것조차 불가능한 철옹성으로 변모하고 있었으나, 공작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불안한 것이 사실이라 스스로 접촉을 삼가는 것으로 정보의 유출을 최소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오게.”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군.”
“그런 소리 말게. 번거롭게 만드는 건 따지고 보면 우리 쪽이기도 하니”
“그런가.”
저택 뒷문에 미리 나와 기다리던 그랙커스가 오귀스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건물들을 몇 개 지나자, 기사단이 훈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뒤뜰이 모습을 드러낸다.
평소에는 저택에 머무는 기사들이 바쁘게 훈련에 매진하고 있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훈련하는 사람들 대신 무장한 기사들이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경계에 몰두하고 있다.
“살벌하군.”
“어쩔 수 없어. 세상엔 제 정신 가진 놈들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하긴.”
세상은 넓고 미친놈들은 많다. 지금의 엘 파르드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미친놈들 중에는 지금 상황에서 공작을 암살하기만 하면 라야바르트에 의한 엘 파르드 침공 의도는 그대로 좌초될 거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꽤 많았다. 언제 탐사가 끝날지 알 수 없는 대미궁의 일을 해결하기 보다는 후계 문제를 마무리 짓는 일을 우선시하게 될 테니 적어도 그만큼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식의 단세포적인 발상인 셈이다.
어차피 브라드로슈가 선봉이 되어 침공이 실행될 것이 확실한 상황이라면 그렇게라도 시간을 벌어보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는 식이랄까. 물론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양날의 칼인지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은 그렇게 사려 깊은 사람들만의 생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엘 파르드처럼 혼란스러운 곳에서 사는 자들이라면 더더욱.
저택 안으로 들어가 접견실로 향한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오귀스트에게로 향한다.
“누구입니까.”
두건과 망토로 외모를 감춘 오귀스트가 그랙커스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공작과 접견중이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그렇게 질문을 던진다.
“나를 돕고 있는 지인 가운데 한 분이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오.”
“…”
브라드로슈 공작이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답했지만, 그와 마주한 사람들은 마치 탐색하듯 오귀스트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오귀스트의 겉모습으로부터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들은 바로 엘 파르드에 할거하고 있는 자들 가운데 하나가 보낸 사절이다. 명목상으로는 브라드로슈와의 친선을 다지기 위한 사절. 정확히는 공작이 정말 왕자와 공주를 데리고 있는지, 그리고 엘 파르드에 대한 침공 의도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공공연한 첩자라 할 수 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어느 나라든 외교관이나 사절단은 크던 작든 첩보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기본이니까. 더구나 지금처럼 두 나라의 관계가 험악해진 상황에서는 더욱 더.
오귀스트는 자신을 살펴보는 자들의 면면을 하나씩 찬찬히 확인하다가, 문득 기사 차림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의 머리 위에 붉은 색 화살표가 콕콕 아래를 찌르듯이 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아주 오랜 만에 보는 표식이다. 특히나 이곳 그리칸에서는.
“호오.”
감탄이라기보다는 비웃음에 가까운 작은 소리가 오귀스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옆에 서 있던 그랙커스가 바로 반응한다.
“무슨 일인가.”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춰 물은 것이었지만, 오귀스트는 일부러 다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어쩐지 이 자리에 기사 차림으로 서 있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자가 하나 보여서.”
“뭐?”
방금 전 방 안으로 들어왔던 오귀스트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흘러나오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린다.
“그게 무슨 뜻인지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나.”
공작의 말에 오귀스트는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방금 말한 대로입니다. 기사 차림을 하고는 있으되, 그것이 어울리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바로 저들 가운데.”
“그게 무슨 망발인가! 그대는 우리들을 모욕하고자 하는 것인가!”
배석하고 있던 사절 가운데 하나가 그렇게 다그치듯 소리쳤다. 하지만 오귀스트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의 등 뒤에 자리 잡은 한 사람의 기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자. 이름이 무엇입니까.”
오귀스트가 대번에 자신을 가리키자 그 기사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캄란 라우로 가스크라고 합니다. 내가 당신이 말한 기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까?”
유창하게 라야바르트의 말을 구사하는 앞서의 사절과는 달리, 조금 특이하게 느껴지는 강한 억양이 스스로를 가스크라고 칭한 기사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제법 그럴 듯 하게 지은 이름이군. 하지만 당신의 본명은 그것이 아닐 텐데.”
“호오, 그럼 당신이 아는 제 이름은 무엇입니까.”
“가이그 라자트. 아니, 그보다는 사막의 핏빛 독수리라는 이명이 더 유명한가.”
오귀스트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기사는 한쪽 손을 치켜들었고 곧바로 그의 손으로부터 붉은 혈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암살자다! 공작님을 지켜라!”
그렇지 않아도 오귀스트가 상대를 지적한 뒤로 계속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그랙커스가 바로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가이그 라자트는 미처 다른 자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벼락처럼 뛰쳐나가 공작을 향해 혈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파창!
누군가 훅 하고 모습을 드러내며 가이그 라자트가 휘두른 혈검을 막아내었다. 이미 만전의 대비를 하고 있던 오귀스트였다.
“칫!”
최초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가이그 라자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창문을 향해 도주를 시도했다. 하지만 미처 창문으로 몸을 날리는 순간 오귀스트의 손으로부터 무언가가 뻗어나가 놈의 발목을 움켜잡는다.
“컥!”
가이그 라자트는 그대로 창가에 대롱거리며 매달리는 모습이 되었고, 이내 강한 완력으로 확 당겨지자 속절없이 다시 접견실로 끌어올려졌다.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 나는 공포와 죽음께서 내리신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는 집행자다!”
가이그 라자트는 자신이 도망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팔을 걷어붙이고는 환하게 빛을 발하는 마법 문양을 드러내 보이며 그렇게 외쳤다.
사람들은 흠칫하며 놀라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암살자라고 다 같은 암살자가 아니다. 집행자는 신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자들. 그들에 의해 치러지는 살인은 암살보다는 그들의 이름처럼 집행이나 처형에 더 걸맞은 행위다. 그리고 집행자가 공작을 암살하기 위해 나섰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신이 공작의 처형을 인정했다는 뜻도 된다.
하지만 오귀스트는 가이그 라자트의 말에 피식 웃으며 답했다.
“네 놈이 죽어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군.”
“뭐?”
“공포와 죽음에 의해 정해진 암살을 막아낸다는 것은 곧 면죄부를 받는다는 일이나 다름없다는 걸 설마 모르는 건가?”
“그, 그건…”
“하긴 너에겐 상관없는 일이겠지. 애초에 진짜 집행자도 아니니까.”
“…”
“어리석은 놈. 신의 이름을 사칭하지만 않았더라도 자비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자, 잠깐…”
가이그 라자트는 다시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다음 순간 오귀스트의 검이 휘둘러지며 놈의 몸을 단숨에 반으로 가르고 말았다.
“헉!”
가차 없이 상대를 죽여 없애는 오귀스트의 검에 사절들은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 버렸다.
“이게 무, 무슨 짓이오! 범인이라면 응당 붙잡아 배후를 물어야 할 것을!”
사절 중 하나가 그렇게 외쳤지만, 오귀스트는 공작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무례랄 것이 있겠소. 경 덕분에 암살자를 미연에 찾아낼 수 있었으니 오히려 내가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감사를 받을만 한 일은 아닙니다. 전 그저 밥값을 조금 했을 뿐이니까요.”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밥값이라는 말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오귀스트가 대화를 마치고 물러나자 기사단장인 유슬라 백작의 눈짓을 받은 그랙커스가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감히 공작님의 암살을 모의한 자들이다. 모두 잡아들여라!”
“네!”
“자, 잠깐만!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입니다!”
사절들은 기겁하며 그렇게 외쳤지만, 눈앞에서 암살 시도를 목격한 기사들은 가차 없이 그들을 두들겨 패며 끌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