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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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인교습
뎅뎅뎅뎅뎅뎅!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린다. 화창한 햇살 속에서 결혼식을 울리는 남녀의 행복을 기원하는 축복의 종소리가 아니라, 불이나 폭격이나 기타 등등의 재앙에 대비해 긴급한 대피나 피난을 권고하는 경고의 종소리가 마구마구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지부장이라고? 스킬마스터라고? 눈웃음을 살살 흘리며 옆집 총각의 애간장을 녹이던 저 아줌마가, 사실은 각인의 집행자 중에서도 손꼽히는 숙련된 암살자였다고?
뭔가 뒤통수를 거하게 두들겨 맞은 느낌이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느닷없이 풀 스윙으로 휘두른 손바닥에 머리를 얻어맞고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아 버린 그런 느낌이다.
“지부장… 이라고요?”
얼빠진 형진의 말에 아줌마는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설마 전혀 눈치 못 챘어요?”
“전혀…”
“어머. 그랬군요. 전 이미 눈치 채고 있는 줄 알았는데.”
눈웃음을 살살 흘리며 말하는 저 모습. 아무리 봐도 진실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뭐랄까. 이 순진하고 귀여운 어린 양을 어떻게 삶아 먹어야 살코기 한 점 남김없이 홀라당 벗겨 먹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숙련된 요리사의 표정 같다고나 할까.
꾸으으으으…
그 때,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신음소리를 흘리며 멧돼지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정도로 두들겨 맞고도 아직 명이 끊기지 않은 걸 보면, 역시 이 놈도 보통 돼지는 아닌 게 확실하다.
“조심…”
형진은 화들짝 놀라며 일단 경고를 하려 했다. 하지만 단어 하나가 채 입에서 흘러나오기도 전에, 아줌마는 번개 같은 뒤돌려 차기로 막 일어서려던 멧돼지를 다시 땅바닥에 눕혀 버렸다.
육중한 멧돼지의 몸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자, 지부장이며 스킬마스터인 아란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진씨. 어서 마무리를.”
무섭다. 솔직히 바로 코앞이었는데도 아줌마의 발길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뭔가 휙 하고 희끄무레한 것이 휘둘러지는가 싶더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멧돼지의 몸이 쿵 하고 쓰러졌을 뿐이다.
등 뒤에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린다. 이런 분인 줄 모르고 함부로 까불었다면, 토끼나 멧돼지가 아니라 이 아줌마의 발 아래 숨을 거두고 말았으리라.
“그, 그냥… 아줌마가 직접 마무리를 지으시는 편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자 아줌마는 살짝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아줌마가 아니라 아란. 이름을 가르쳐 줄 때는 불러달라는 의미가 있는 거라고요.”
“…”
“자, 어서요.”
이름을 불러달라는 건지 멧돼지를 끝장내라는 건지 헷갈리지만, 일단 형진은 후자를 우선하기로 했다.
단검을 손에 든 채 바닥에 누워 숨을 헐떡거리는 멧돼지를 바라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에서 핏빛 불똥을 튀기며 달려들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일견 처량하게까지 생각될 정도다. 그리고, 어쩐지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이 처하게 될 상황을 미리 보는 것 같은 느낌에 동병상련의 정마저 느껴진다.
돼지여. 비록 우리가 악연으로 만났지만, 부디 속세의 고통에서 벗어나 무서운 아줌마들이 없는 돼지들의 천국에서 극락왕생하기를.
간단한 기도를 마친 형진은 단검을 들어 멧돼지의 숨통을 끊었다.
[인스턴트 킬! ‘광폭한 숲의 주인’이 죽었습니다.]그러자 역시나 룻이 툭하고 튀어나온다. 형진은 얼른 그것을 집어 들었다.
[‘광폭한 멧돼지의 귀걸이’를 획득했습니다.]아이템정보
명칭 : 광폭한 멧돼지의 귀걸이
등급 : 희귀
착용제한 : 없음
설명 : 숲의 주인이었던 멧돼지의 광폭한 기운이 담긴 어금니를 특별한 방법으로 가공한 귀걸이.
효과 : 생명력 증가. 히든스킬 ‘블러드러스트’ lv.1 증가
강화시 효과 : 생명력 증가.
이번에도 역시나 대박이다. 방금 전 자신을 기겁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블러드러스트 스킬을 쓸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추가로 생명력 증가까지 부여한다. 레벨 1 수준의 버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앞서 멧돼지가 사용했을 때를 감안하면 수치가 낫더라도 체력, 이속, 공속의 삼단 버프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엄청난 가치가 있다.
“뭐해요? 얼른 피부터 뽑으세요.”
“아, 알겠습니다.”
귀걸이의 엄청난 성능에 입이 귀에 걸렸던 형진은 뒤에서 들려오는 나긋한 아란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얼른 멧돼지의 목을 찔러 피를 뽑기 시작했다.
“이 정도 크기면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벌여도 되겠어요. 후후후.”
“그렇… 겠죠.”
룻이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한 걸까. 따지고 보면 이 놈은 아란이 다 잡은 걸 형진이 막타만 친 셈이다. 따라서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 드랍된 귀걸이의 소유권 역시 아란에게 돌아가는 것이 맞다. 레어 아이템의 확정 드랍이 가해지는 인스턴트 킬이 아니었다면 과연 귀걸이가 나왔을 의문이기는 해도, 그녀가 아니었다면 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시고…”
피를 뽑으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아란은 눈웃음을 지은 채로 대답했다.
“처음 받은 신입이 어디 가서 비명횡사라도 당해서는 큰일이잖아요. 그래서 언제나 멀리서나마 지켜보고 있답니다.”
“언… 제나요?”
그럴 리가. 마을에서라면 몰라도 밖에서는 항상 코장식으로 주위를 살피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형진이 식겁한 표정을 짓자, 아란은 다시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등짐장수들이 진씨 얘기를 하길래 혹시나 해서 와봤죠. 보시다시피 이런 놈이 있는 장소라 위험하거든요.”
“아하…”
“왜요. 제가 항상 지켜보고 있다고 하니까 무서워요?”
“그, 그런 게 아니라… 하하…”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눈을 흘기는 아란의 모습에 당황한 형진은 다급하게 말을 돌렸다.
“크흠. 그런데 머리에 쓰신 그건…”
“아, 이거요?”
화제를 억지로 바꾸려는 형진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란은 선선히 그 의도에 넘어가 주었다.
“좀 그렇죠? 저 같은 아줌마가 이런 장신구를 쓰고 다니는 게.”
형진은 손을 얼른 내저으며 급히 말했다.
“설마요. 잘 어울립니다. 뭔가 귀여우면서도 반대로 농염한 분위기가…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말이 헛나오고 말았다. 아란은 자기가 말해 놓고도 어쩔 줄 몰라하는 형진의 모습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킥. 아니에요. 칭찬이었죠? 아니었어도 그냥 칭찬이라고 생각할게요.”
“칭찬… 맞습니다.”
아란은 얼굴이 벌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형진의 모습에 다시 킥킥거리며 웃다가 머리에서 토끼귀 머리띠를 벗어 손에 들었다. 그리고 조금 아련한 눈길로 머리띠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도 다 이 녀석 때문이에요. 아실지는 모르지만 이게 사실은 굉장히 귀한 물건이거든요. 하지만 제대로 이 물건이 지닌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물품이 갖춰져야만 해요. 그 물품이 이 근처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왔다가 남자랑 눈맞아서 아예 눌러앉아 버렸다… 뭐 그런 얘기죠.”
“아하…”
예상대로 아란이 착용한 토끼귀 머리띠는 형진이 익히 알고 있는 물건이 맞는 모양이다. 게다가 뒤이어 흘러나온 얘기 역시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사연인지 알 수 있었다.
아란이 이곳으로 흘러든 계기가 된 물건. 그것은 바로 얼마 전 형진이 복서 토끼를 잡아서 얻었던 바니걸 슈트가 틀림없었다. 당시 확인한 아이템 정보에는 분명 특정한 물품과 함께 착용할 경우 세트 옵션이 발동한다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눈앞에서 머리띠를 손으로 매만지며 아련한 추억을 되새기는 듯한 아란의 모습이 바니걸 슈트와 토끼귀 머리띠를 착용한 모습으로 보인다.
크헉.
이런 파괴력이라니. 실제로 입은 것을 본 것도 아니고 단지 상상을 떠올렸을 뿐인데도 자칫하며 코피가 터져 나올 뻔 했다.
과연, 이런 것이었나.
형진은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공포와 죽음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처음 복서 토끼에게서 바니걸 슈트를 얻었을 때만 하더라도 자신을 농락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신의 뜻을 깨달은 것이다.
신님, 굳 잡!
“아란씨.”
“네?”
아란은 형진의 부름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랄까. 지금까지 멋쩍어 하던 태도와는 다른, 어쩐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울림을 가진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혹시… 그 물품을 얻게 된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하지만 뒤이어 나온 물음은 조금 예상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아란은 살짝 실망스러운 마음에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 헤맸는데도 아직 단서조차 찾지 못한 걸 보면, 그냥 인연이 아니었다 싶기도 해요. 그러니 이제 와서 그걸 찾는다 해도 뭔가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네요. 아이들도 있고, 모처럼 지부장이 되기도 했고, 돌봐야 할 신입도 이렇게 있으니까요.”
“…”
형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벤토리에서 잠자고 있던 용맹한 바니걸 슈트를 꺼내 아란의 손에 건네주었다.
“어?”
아란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자신의 손에 놓여진 물건과 형진을 번갈아 바라본다.
“얼마 전에 잡았던 토끼 기억 하시죠?”
“네.”
“그 놈을 잡으면서 얻은 물건입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제가 쓰기엔 뭔가 좀 난감한 물건이라 난처해 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주인이 따로 있는 물건이었던 모양이네요.”
“아…”
아란의 얼굴에서 눈웃음이 사라졌다. 망연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한 감정들이 연이어 스쳐지나가다가 이내 다시 형진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귀한 아이템이긴 해도, 어차피 형진은 쓸 수도 없는 물건이다. 더구나 이번에 얻은 귀걸이를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라도 퉁을 치는 것이 옳다.
“바, 받을 수 없어요.”
“어째서요?”
“이, 이런 귀한 물건… 함부로 받을 수는 없어요.”
“부담스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아무튼 받을 수 없어요.”
시종일관 여유 넘치는 모습을 보여 왔던 대상이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니 묘하게 정복심을 자극한다.
“그냥 주는 거 아닙니다.”
“그럼…”
“뇌물이라고 해두죠. 세상 물정 모르는 신입이 하늘같은 지부장님에게 제발 잘 봐달라고 건네는 뇌물.”
“그건…”
“아, 그리고 공짜라고 한 적 없습니다. 대가는 확실히 받을 테니까요.”
그제서야 아란은 그럼 그렇지 싶었는지 조금 안도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대가라면… 얼마나.”
“간단합니다. 이걸 입은 모습을 다른 누구보다 저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시면 됩니다. 어때요. 별 것 아니죠?”
“…”
아란은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형진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뭔가 아차 싶은 생각에 얼른 수습을 시도했다.
“하하… 방금 전의 그건 그냥 농담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제가 입기엔 뭔가 좀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마음 편하게 받으셔도…”
“좋아요.”
“네?”
지금… 뭐라고? 좋아요 라고 한 것 같은데?
하지만 아란은 형진이 다시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손을 돌려 입고 있던 앞치마의 매듭을 풀었다.
사라락.
하얀 앞치마가 그녀의 발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하지만 아란의 손은 멈추지 않았고, 앞섶을 채우고 있던 단추를 다시 풀기 시작했다.
“…”
형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조금 수줍은 모습으로 자신의 눈앞에서 옷을 벗기 시작한 아란의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