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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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금은 노오오력이 필요할 때.
젠장.
지축을 울리며 달린다는 관용어구를 써야 하는 경우가 정말로 생길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일부러 사냥을 나온 것도 아니고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야산에서 버섯 캐다가 그런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형진은 이미 예전에 족제비한테 허무하게 맞아 죽던 그 때의 형진이 아니다. 그 이후로 여우와 늑대와 피 터지는 싸움을 했고, 캐릭터가 삭제된 이후 이 세계에 넘어와서도 영문도 모른 채 전직 퀘스트 비스무리한 시험을 거쳐 각인의 집행자라는 대충 들어도 뭔가 있는 것 같은 그럴 듯한 신분이 되었다. 물론 그래봐야 당장 하는 거라고는 뒷산에서 나무 캐고 버섯 캐는 것이 전부지만.
그런 지금의 자신이라면, 이런 멧돼지쯤 정정당당하게 정면에서 승부를…
쿠어어어어억!
… 겨루는 건 역시 아직 무리일 것 같다.
“이크!”
급히 몸을 날려 미친 듯이 달려드는 멧돼지의 돌격을 일단 피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성도가 되면서 얻은 각인의 효과 덕분에 패닉 같은 것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어째 좀 정도가 지나쳐서 급박한 순간에 이런 저런 잡념마저 떠올리는 것 같기는 하지만, 적어도 달려드는 덤프트럭을 보고 그대로 몸이 굳어서 충분히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떡이 되어 버리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일이다.
콰아앙!
“…”
미친.
단순히 기세만 그런 게 아니라, 위력도 거의 덤프트럭 수준인 것 같다. 단 일격만으로 눈앞을 가로막는 떡갈나무를 단번에 부러뜨리다니, 혹시 필드보스인데 아닌 척 하고 달려드는 거 아닐까.
쿠룩! 쿠룩!
어쩐지 귀로 들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쳇, 쓸데없는 것을 박살내고 말았군.’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근데… 이제야 얘기지만 보통 멧돼지랑은 역시 뭔가 다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금니. 멧돼지라고 하면 보통 두 개의 어금니가 툭 튀어 나온 이미지를 연상하기 마련인데, 이 놈은 무슨 어금니가 몇 개씩이나 솟아 있다. 게다가 거칠게 숨을 쉴 때마다 드러나는 다른 이빨 역시 마치 상어처럼 겹니로 되어 있다.
혹시 이 놈은 앞서 발견했던 변사체의 원인은 아닐까.
모르긴 해도 이런 놈에게 받히면 그 순간 칼날 같은 어금니에 몸이 꿰뚫리는 건 기본이고 상어 이빨 같은 날카로운 이빨에 금새 오체분시 되어 버릴 것만 같다. 혹시 지나던 성도가 자신처럼 송로버섯을 캐려고 하다가 들켜서 이 멧돼지에게 당했다든지?
아니, 아니다. 아무래도 그건 좀 너무 어거지로 끼워 맞춘 느낌이 강하다.
게다가 시체가 이미 부패되기 시작해서 사인을 제대로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적어도 이 놈의 어금니에 꿰뚫린 것 같은 상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단순히 들이받힌 충격으로 내장이 터져 나가 사망했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쿠워어어억!
다시 시작된 이차 돌격. 하지만 이번엔 앞서의 직선적인 공격과는 또 다르다. 머리를 마구 내저으며 달려드는 그 모습은, 신월도를 마구 휘두르며 달려드는 거한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인스턴트 킬을 써서 공격을 무효화시킬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찰나의 순간 떠올려 봤지만, 역시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공격이 중구난방이라 타점을 잡기가 너무 힘들고, 무엇보다도 어디를 찔러야 할지 도대체 보이지를 않는다.
“큭!”
급히 바위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굴렸다. 아무리 괴물 같은 놈이라도 바위는 차마 부술 수 없었던 모양인지, 곧바로 날카로운 어금니가 바위를 긁어대는 파찰음이 이어진다.
다행이다. 장애물을 이용하면 어떻게 피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 일단 피할 방법이 생겼으니 놈이 지칠 때를 기다려 약점을 찌르면 어떻게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꾸어어어억!
하지만 그런 판단은 채 몇 초 지나기도 전에 돼지 멱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나타난 메시지와 함께 단숨에 부서져 버렸다.
[엘리트 몬스터 ‘광폭한 숲의 주인’이 ‘블러드러스트’를 발동합니다!] [블러드러스트 효과로 인해 엘리트 몬스터 ‘광폭한 숲의 주인’의 체력이 20퍼센트 증가합니다!] [블러드러스트 효과로 인해 엘리트 몬스터 ‘광폭한 숲의 주인’의 이동속도가 25퍼센트 증가합니다!] [블러드러스트 효과로 인해 엘리트 몬스터 ‘광폭한 숲의 주인’의 공격속도가 40퍼센트 증가합니다!]“헐?”
이, 이런 미친!
보스 몹도 아닌 주제에 자체 버프라고? 그것도 체력, 이속, 공속의 삼단버프?
미친 거 아니야? 엘리트 몬스터라면 보통 몬스터는 아니라는 얘기겠지만, 그래도 이런 게 마을 뒷산에 아무렇게나 활보하고 있어도 되는 거냐고! 제 정신이냐고! 밸런스 붕괴도 정도가 있지! 이쪽은 이제 아직 토끼한테도 맞아서 기절하는 실력이라고!
쿠워어어어억!
블러드러스트 상태가 발동된 멧돼지는 단순히 이속과 공속만 커진 것이 아니라 덩치도 훨씬 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단순히 등에 난 갈기털이 곤두서서 더 커 보이는 건지, 정말로 버프 효과가 덩치까지 더 커보이도록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냥도 위협적으로 보이는 멧돼지가 눈에서 핏물 같은 섬광을 뚝뚝 떨구며 광분해서 달려드는 광경은, 아무리 정신 공격에 저항 능력이 있는 각인의 집행자라도 위기감에 간이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무리무리무리무리무리무리.
절대로 무리다. 이런 놈을 상대하라니. 아직 민첩이고 힘이고 뭐고 간에 수련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상태로 상대하는 건 절대로 무리다. 이쪽은 전직 퀘스트 이후로 토끼 한 마리 잡아본 게 고작이라고!
“히이익!”
꽝!
급히 바위를 이용해 몸을 피하려 했지만, 블러드러스트가 발동된 멧돼지는 그런 형진의 의도 따위는 우습다는 듯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 작은 바위 하나를 무슨 볼링 핀 날려 버리듯이 훌떡 뒤집어 날려버린다.
망할. 저런 놈을 무슨 수로 이기라고.
어차피 채집 경험치는 이미 획득했으니 송로버섯 따위 그냥 줘버릴까. 아무리 준영약에 가까운 고급 식재료라고는 해도 그만큼 난이도가 높은 식재료라 적어도 장인 이상은 되야 제대로 써먹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냥 줘버리고 도망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고급 식재료고 뭐고 간에 죽어서야 아무 소용없는 일 아닌가. 부활존이라도 있으면 또 모를 일이지만, 그렇지도 않은 이상은.
쾅!
아주 맛이 들었나보다. 다시 한 번 무지막지한 돌격에 바위 하나가 뿌리 채 뽑혀 날아가 버린다. 버프라면 지속시간이 있을 텐데, 도대체 저 블러드러스트 효과는 언제쯤이나 사라지는 건지. 버프가 떨어지고 나서 허탈감에 젖어들 때라면 몰라도, 지금처럼 공속과 이속이 뻥튀기된 상태로 미쳐 날뛰는 상황이라면 도저히 손 쓸 방도가 없다.
“헉… 헉…”
이런 저질 체력 같으니.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멧돼지의 공격 몇 번 피하는 것만으로 벌써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하기야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한 것도 고작 하루 밖에 안 된 상황. 일반 몹도 아니고 다짜고짜 숲의 주인이라고 이름 붙은 엘리트몹 상대로는 도망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게 당연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요리를 부탁할 때 전투 계열 버프가 부여되는 요리도 몇 개 부탁해 볼 걸.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지금 이 자리에 옆집 아줌마가 달려와서 주문을 받을 것도 아닌데.
에이씨. 눈웃음 살살 치면서 슬며시 끌어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 그냥 못 이긴 척 넘어가 줄 걸. 기왕 죽을 거라면 멧돼지한테 들이받혀서 내장을 쏟아내고 죽느니, 아줌마한테 뼈골까지 쪽쪽 빨아 먹혀서 죽는 편이 훨씬 행복할 텐데!
“젠장! 살아남기만 해봐라! 당장 가서 아란씨 엉덩이부터 만질 테다!”
“어머, 그거 고백인가요? 진씨.”
“에?”
사람이 너무 예상외의 상황을 맞이하면 잠시 사고가 멎는 경우가 있다. 지금의 형진이 딱 그랬다. 망할 블러드러스트 효과는 도대체 끝날 생각을 안하고, 그렇게 광분하며 달려드는 멧돼지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형진의 귓가에 문득 훅 하는 뜨거운 입김과 함께 스며든 달짝지근하면서도 낯익은 목소리에 형진은 순간 넋이 나가고 만 것이다.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처리할 테니.”
“…”
처음엔 헛것을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토끼귀 머리띠를 머리에 착용한 옆집 아줌마가 나무 위에서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더니, 달려드는 멧돼지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롤링 소배트로 뺨따구를 날려버리는 장면에서는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뭐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거지. 간절함이 너무 지나쳐서 죽는 순간 환각이라도 보는 건가. 죽는 순간 뇌 내에 환각 물질이 수백 배 넘게 분비된다던데, 혹시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이 그런 건가.
멧돼지가 허우적거리며 허공을 훨훨 날고 있다.
눈웃음을 살살 치며 조금 수줍은 듯 순진한 총각을 홀리던 그 아줌마가 진정 맞는 것인가. 그 아줌마가 무려 롤링 소배트를 펼쳐서 반격은커녕 도망다니기에 급급했던 거대 멧돼지를 일격에 날려버린 것이 맞느냔 말이다!
꾸웨에에에엑!
하지만 눈웃음만 헤픈 줄 알았던 옆집 아줌마의 일격에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는 멧돼지의 모습과, 일격에 박살나 허공으로 떠오르는 희뿌연 어금니의 모습은 계속해서 형진의 눈앞에서 슬로우비디오처럼 흘러갔고, 뒤이어 번개처럼 날아든 아줌마의 크랙 슛이 나가떨어진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멧돼지의 정수리를 단숨에 내리 찍는다.
콰직!
명백하게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그 타격음에는 형진도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크랙슛이다. 스피닝 힐 킥도 아니고, 뷰티 샷도 아니고, 플라잉 닐 킥도 아니고 크랙슛이다. 게임 캐릭터도 아니고 실제 인물이 저걸 눈앞에서 쓰는 것을 보게 되다니!
아, 게임 캐릭터 맞나. 아닌가. 이 경우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거지?
꾸어어어어…
멧돼지는 마치 술 취한 것처럼 비틀비틀 거리다가 앞다리가 푹 꺾이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리고 뒤이어 부풀었던 몸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는가 싶더니 메시지 하나가 다시 눈앞에 나타난다.
[엘리트 몬스터 ‘광폭한 숲의 주인’의 ‘블러드러스트’ 상태가 해제됩니다.] [엘리트 몬스터 ‘광폭한 숲의 주인’의 버프 상태가 해제되고, 탈력 상태에 빠집니다!]버프 지속 시간이 다 되어서 풀린 것인지, 아니면 너무 강력한 충격을 연이어 받다 보니 버프를 지속할 여력이 되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은 반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괴물 같은 멧돼지를 눈웃음 헤픈 옆집 아줌마가 단 두 번의 공격으로 침묵시켜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저 덩치 큰 멧돼지를 롤링 소배트로 날려버리려면 각력이 얼마나 강하다는 얘길까.
물론 아줌마들의 전투력이 강력하다는 것쯤은 이미 형진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건 너무 엄청나잖아!
“…”
벙찐 표정으로 멍하니 보고 있자니, 아줌마는 후 하고 가볍게 숨을 토하고는 형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지막 일격은 진씨에게 맡길게요.”
“…”
“뭐하세요? 어서요.”
형진은 토끼 머리띠를 한 채 여전히 자신에게 눈웃음을 흘리고 있는 옆집 아줌마를 향해 얼떨떨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형진의 질문에 옆집 아줌마는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다시 소개해야겠네요. 저는 각인의 집행자 그란웰 지부장 겸 스킬 마스터 아란이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신입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