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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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충돌
참가자는 모두 여섯 명. 진, 미엘, 제랄딘, 크루그, 오귀스트, 그리고 할이다.
“일단 거스트란 백작가로 이동하겠습니다. 부탁해.”
“네. 후아아아암.”
미엘은 졸린지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는 거대 흑요호로 모습을 바꾼다. 저 모습을 보니 며칠째 그대로 꿀꺽 당할 뻔 했던 일이 다시 떠올라서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이 떨린다. 여러모로 참신한 경험이었지.
할은 다시 한 번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그렇다 해도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흑요호가 미엘의 본신이라고는 차마 생각지 못하고 일종의 소환수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미엘이 최상위 3등급 안에 속하는 종결자 급의 집행자라고는 해도 그 실체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푹신한 털 위로 훌쩍 뛰어 올라 자리를 잡자, 미엘은 곧바로 방향을 정해 천천히 비행을 시작했다.
출발하기가 무섭게 오랜만에 의뢰에 참가하는 크루그가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요새 의뢰는 통 신경을 안 쓰더니. 게다가 웬 거스트란 백작가?”
“그게 말이지. 실은…”
형진은 간단하게 이번 사냥의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미궁에서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서, 그 배경에 거스트란 백작가가 있다는 사실까지.
“그 가문이라면 그럴 이유가 충분히 있어요.”
그러자 가만히 설명을 듣고 있던 제랄딘이 그렇게 말을 꺼냈다.
“그래? 어떤 이유?”
“원래 거스트란 백작가는 그리칸 인근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대귀족이에요.”
“대귀족?”
“그것부터 설명해야 하는 거에요?”
“크흠… 가급적이면.”
제랄딘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귀족이 아니면 모를 수도 있다 싶었던지 간단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보통 백작이라고 하면 오등작에 기반해서 공작보다 한참 아래의 귀족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세계에서 공후백의 세 계층은 그 출신 성분으로부터 분화된 개념이지, 가문의 위세를 통해 작위가 구분지어진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백작가문이 아무리 융성하더라도 출신 성분을 세탁하지 않는 이상 공작이나 후작으로 이른바 승작이라는 형태의 작위 상승이 이어지는 경우는 없다는 뜻이다.
백작이라는 작위의 기원은 지방의 군권과 사법권을 가진 실력자로부터 시작된다. 또한 같은 백작이라도 국경의 수비를 담당하는 부중백과, 한국으로 치면 광역시 같은 요충지를 지배하는 소임을 맡은 궁중백으로 구분된다. 또한 부중백이나 궁중백처럼 자치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독립 영주로서의 백작이 있는가 하면, 브라드로슈 가문의 기사단장인 유슬라 백작이 지닌 작위처럼 영지가 없이 군권과 사법권을 행사하는 관직의 성격만이 남겨진 경우도 존재한다.
뭔가 얘기가 복잡하긴 하지만, 같은 백작이라고 불린다고 해서 브라드로슈 가문의 유슬라 백작과 한 지역의 패자인 거스트란 백작이 동급으로 놓일 수는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거스트란 백작의 가문이 격이 높은 곳이라 해도 브라드로슈 공작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브라드로슈 공작가는 사실상 나라 안의 나라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지위를 가진 가문이고, 실질적으로도 내부적으로는 타국의 왕에 준하는 대우를 할 정도의 가문이다. 따지고 보면 현재의 라야바르트 황실이 외왕내제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도, 왕실에 준하는 브라드로슈를 그 국가 체계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공작이라는 작위 자체가 준왕족을 뜻한다. 후작은 그러한 준왕족 중에서도 방계에 속하는 자들을 일컫는다. 때문에 대부분의 후작은 오히려 백작보다 가문의 규모가 작거나, 수도 인근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앙 귀족인 경우가 많다.
“보, 복잡하네.”
“좀 그런 경향이 있죠.”
제랄딘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지만, 형진은 그제서야 왜 왕녀도 아닌 공녀인 그녀가 아무런 위화감도 없이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 왕실과 국혼이 거론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브라드로슈 가문은 단순한 왕국내 최고 가문이 아니라, 사실상 나라 안의 나라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격이 높은 가문이었던 것이다.
그냥 공작이라길래 왕국 최고 가문이라고 그래도 그런가보다 했었는데. 따지고 보면 브라드로슈 공작 그 양반도 참 대단한 사람이다. 아무리 형진이 신의 대리자라고는 해도 대뜸 그런 식으로 딸을 내놓다니. 하기야 바꿔 생각해 보면 신의 대리자 쪽의 위상이 그만큼 높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형진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부분과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어서 더 헷갈리는 느낌이다.
“너… 대단한 아가씨였구나.”
“뭐에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절 메이드 취급했던 거에요?”
“응.”
“못 말려.”
얘기가 좀 옆으로 새긴 했지만, 제랄딘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거스트란 백작가와 브라드로슈 가문의 악연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본래 그리칸 인근에서 거스트란 백작가가 가지고 있던 영향력의 상당부분을 브라드로슈 가문이 대부분 흡수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번에 브라드로슈 공작이 직접 그리칸에 내려와 대미궁 인근을 완전히 장악해 버린 것은 거스트란 백작가로서는 눈뜨고 영지 일부를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는 일로 생각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결국 제랄딘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거스트란 백작가는 이번 일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거나 도움을 줄만한 충분한 능력과 개연성을 갖춘 곳이었던 셈이다.
하긴 상관없나.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공포와 죽음을 섬기는 집행자들에게는 그저 한줌 티끌과도 같은 하찮은 일들일 뿐이니.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 동안 미엘은 마침내 거스트란 백작가의 본성이 존재하는 커다란 도시에 도착했다. 얼핏 대미궁으로부터 말을 달려도 일주일은 걸리는 곳에 위치해 있다고 이전에 들은 기억이 있어서 좀 더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직접적인 거리보다는 중간에 펼쳐진 지형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가문의 역사와 성세를 확인해 주듯, 거스트란 백작가의 본성이 위치한 도시인 스트란드는 그리칸의 몇 배나 되는 수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전부 몰려다니는 건 비효율적인 일일 테니, 반으로 나눠서 움직이는 편이 좋겠어.”
“어떻게요?”
“우리 예쁜이들은 나랑 같이. 시커먼 남자들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킥.”
사심 가득한 편 가르기에 제랄딘은 물론이고, 시커먼 남자들 역시 피식 웃어 버린다. 특히나 크루그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큰일이네요.”
“뭐가.”
“누군가가 왕으로 올라선다 생각하니까, 갑자기 그 나라 여자들이 막 불쌍해지기 시작했거든요.”
“풉! 큽! 콜록! 콜록!”
거대 흑요호를 다시 꼬리로 되돌리고 다시 하품을 하고 있던 미엘이 크루그의 말에 사래가 들렸는지 기침을 하기 시작한다. 얼마 전에 나라 안의 모든 여자에게 바니걸 복장을 입히겠다고 형진이 당당하게 선언하던 일이 떠오른 탓이다.
어쨌든 그렇게 세 명씩 나뉜 집행자들은 거스트란 백작가의 거성이며 중심 도시인 스트란드 안에 머물고 있는 수배자들을 색출해 제거하는 일을 시작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모두 모여 있는 상태에서 스트란드 인근에 존재하는 수배자 처형 의뢰를 동시에 받는다. 그리고 각기 남과 북으로부터 도시 중심을 향해 움직이며 하늘에 떠 있는 화살표에 의해 지목된 수배자들을 처형하면 끝.
어떻게 보면 공포와 죽음이 정말로 무서운 것은 바로 저 화살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린다. 아무리 날고기는 수배자라도 일단 집행자의 목표로 지정되는 순간 저 화살표 때문에 어떤 식의 변장이나 은신처도 소용없는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과연 공포와 죽음. 그 관음증 취향에는 수배자도 도망칠 방법이 없는 건가. 나무공죽타불 관음보살.
“진.”
“응?”
“수배자만 색출하고 끝낼 거에요?”
“글쎄.”
형진은 모처럼 메이드복을 벗고 몸매가 드러나는 날렵한 옷차림에 두건을 쓴 채로 지붕 위를 날듯이 움직이는 제랄딘의 뒤태를 즐겁게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앞서서 움직이다가 그제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제랄딘은 얼른 손으로 엉덩이를 가리며 눈을 흘겼다.
“변태. 이럴 때는 좀 진지하게 있으면 안 되나요?”
“난 진지해. 진지하게 제랄딘의 엉덩이를 관람하면 안 되는 건가?”
“…”
순간 제랄딘의 뒤쪽으로부터 검은 꼬리들이 공작의 꼬리깃처럼 확 하고 퍼져 나오자, 형진은 그제서야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물론 수배자 색출만 하고 끝낼 건 아니지. 그럴 거면 전부 다 불러올 리가 없는 일 아니겠어?”
“그럼요?”
“혼자서 움직이는 놈들도 있겠지만, 이놈들은 조직을 갖춘 놈들이잖아. 그런 놈들이 뻔히 눈앞에서 동료가 죽어 가는데 가만히 보고 있을까.”
그제서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이 제랄딘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암살이 아니라 사냥이라고 그런 거군요. 그것도 몰이사냥.”
“그런 셈이지.”
“그런 거라면 저쪽 남자들에게도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저쪽엔 오귀스트님이 있으니까.”
“아하.”
형진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서넛 정도의 수배자들이 모여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저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군. 앞장 서.”
“뒤에서 뭘 하려고요?”
“뭘 하긴, 우리 아가씨의 예쁜 뒷모습을 감상해야지.”
“못 살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랄딘은 훌쩍 몸을 날려 형진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형진은 그녀의 뒤를 느긋하게 따르며 문득 메신저를 통해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말야. 갑자기 궁금한게 생겼는데.] [뭔데요?]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려고 메신저까지 쓰나 싶다. 아니나 다를까. 형진은 엄청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제랄딘의 꼬리도 미엘처럼 막 분신을 만들고 그런 거 가능해?] [그, 글쎄요?]갑작스럽다고 해야 하나. 생각도 못한 질문이라 제랄딘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왜 진작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나 싶은 생각도 든다. 미엘은 그 자체로도 강력한 환수지만, 각각의 꼬리가 저마다 독립된 개체로서 활동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그 강력함이 몇 배로 증폭되는 측면이 있었다.
제랄딘은 그런 미엘과 계약하여 그녀의 힘을 빌려 쓰고 있다. 다시 말해, 그럴 생각이 있다면 단순히 꼬리를 채찍처럼 사용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엘이 지닌 다른 능력들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런 식으로 계약을 통해 힘을 빌리는 것은 계약 당사자 간의 교감이라든가 사용자가 지닌 그릇의 크기에 따라 그 활용 범위가 정해지게 마련이지만, 그릇의 크기라면 몰라도 교감에 있어서는 제랄딘이 어릴 때부터 미엘을 자매나 부모처럼 여기며 자라왔음을 생각해 보면 부족할 이유가 없다.
[지금은 좀 그렇고, 나중에 시험해 봐야겠네요.] [그렇게 해.]그렇지 않아도 요즘은 집안에 틀어 박혀서 일만 하느라 정작 집행자로서의 능력은 답보 상태에 있는 것이 신경 쓰였던 제랄딘이라 깊게 생각하지 않고 나중에 시험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그들 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형진의 목에 몸을 감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미엘은 메신저를 통해 전해지는 둘의 대화를 보고는 잠시 한숨을 포옥 내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변태.] [내가 뭘?] [그럼 아니에요? 제랄딘에게 분신이 가능하냐고 물어본 이유가 뭔지, 제가 따로 설명을 해야하는 건가요?] [크흠.]정곡을 찔린 형진이나, 그제서야 여럼풋이 질문의 의도를 깨달은 제랄딘 모두 입을 다물었다. 특히나 제랄딘은 열 명으로 늘어난 자신이 형진을 덮치는 모습을 상상하고는 얼굴이 금새 새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마, 망측해라.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 방향으로만 이렇게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거람. 아후, 왜 이렇게 갑자기 더워지는 거지.
[진입합니다.]그래서 얘기를 다른 곳으로 돌릴 겸, 얼른 수배자들이 모여있는 작은 집으로 진입하려던 제랄딘은 뒤이어 나타난 형진의 메시지를 보고는 그만 발을 헛디디며 지면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치를 챘군. 좋아.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 혹시 나도 미엘이랑 계약 가능할까.]처음부터 형진이 제랄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건 열 명의 제랄딘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