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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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그리칸에 부는 바람
보호와 균형의 힘이 그리 강하지 않은 탓에, 성역의 범위 자체는 그리 넓지 않았다. 다 해봐야 성소 인근의 얼마 정도에 불과한, 신전 내부조차 전부 채우지 못할 정도의 좁은 구역. 그러나 그것이 발동된 순간 그리칸이라는 도시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희망과 생명의 신전에 보호와 균형이라는 이름의 신이 성역을 만들어냈음을 확실하게 인지했다.
“성소를 하나 더 만들 수 있게 된 거에요?”
유아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아니. 온천에 있는 성소를 그냥 취소하고 여기에 새로 만들었어. 어차피 그쪽은 이제 요정의 문으로 얼마든지 출입할 수 있으니까.”
“아하.”
성소에는 타운 포탈을 통해 이동 가능한 거점의 역할 외에 결계를 통해 허락받지 않은 사람이 출입할 수 없도록 결계를 활성화 하는 기능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결계는 미엘의 마법으로도 대신할 수 있는 부분. 게다가 덜렁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 성물을 안치하는 것보다는 이런 번듯한 성소라도 갖추어 놓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저기…”
“네, 말씀하십시오. 보호와 균형이시여.”
“미리 양해를 구하기는 했어도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건가요. 게다가 이 성소는 희망과 생명의 것인데.”
형진은 씩 웃으며 답했다.
“희망과 생명의 신전 안에 희망과 생명의 성소가 있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게다가 신전 안에 신상을 들여놓기로 했던 건 말씀하신대로 미리 양해를 구한 사안이기도 하니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희망과 생명이 공포와 죽음처럼 신도들에게 관심이 지극한 신이라면 몰라도, 실제로는 관리하기 귀찮아서 형진에게 전부 떠맡기고 나 몰라라 하는 상황. 따라서 신전 안에서 형진의 뜻은 곧 법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막무가내로 사제들의 뜻도 묻지 않고 신상을 들여놓은 것도 아닌 이상, 절차상으로도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그것이 눈 가리고 아웅에 가까운 일이라고는 해도. 권력이란 이래서 좋은 것이다.
형진은 다시 최고 사제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저희는 이만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좀 더 계시지 않고요.”
“그러고 싶습니다만, 아직은 사람들에게 여신님의 모습을 직접 뵙게 할 때가 아닌 듯 싶어서 말이죠.”
“아…”
호구신의 사제들이야 작고 귀여운 여신의 모습을 보고도 비웃거나 하지 않을 정도로 수양이 된 사람들이지만, 보통 사람들이야 어디 그런가. 괜히 선입관이라도 생기거나 하면 신앙이 형성되는 것에 방해만 될 뿐이니 지금은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것이 옳다.
“며칠 동안은 사제 여러분이나 신전의 식구들이 조금 귀찮고 피곤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나름대로 보상을 드릴 것입니다.”
그 말에 최고 사제는 물론이고 다른 사제들까지 일제히 손사래를 친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신전을 돌보며 신도들을 맞이하는 일은 저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인데 보상이라뇨. 그런 말씀은 제발 거두어 주십시오.”
이런 훌륭한 호구스러움이라니. 하지만 여기서 더 말싸움할 시간이 없는 관계로 일단 형진은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혹시라도 뭔가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으니 몇 사람을 남겨 두고 가겠습니다. 오귀스트님, 할과 하마란을 데리고 며칠 정도 신전 안팎을 살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어려울 것도 없지요.”
어차피 요즘 그리칸 시내를 살피며 날파리들을 처리하는 것은 거의 일과나 다름없는 일이다. 겸해서 신전 안팎을 살피는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문제가 될 만한 일이 생기더라도 하마란이 두건을 뒤집어쓰고 나타나서 헌신의 일격을 드러내 보이기만 해도 대부분 꽁지를 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당부의 말을 하다 보니 신전 입구 쪽에서 소란스러운 느낌이 전해져 온다. 성역 선포를 확인한 사람들이 벌써부터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수고해 주십시오. 저희는 이만.”
“살펴 가십시오.”
사제들의 환송을 받으며 식구들은 모두 요정의 문을 넘어 다시 섬으로 돌아왔다. 도착하자 제랄딘이 잠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형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일정을 조금 앞당겨야 할 것 같아요.”
“뭘?”
“음식점이요. 김밥천국이라고 하셨던.”
“아하.”
조만간 요리가 숙련 단계에 접어든 사제들이 있는 신전들에 우선적으로 김밥천국을 개업하려던 계획을 잡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연말에 아이들에게 선물을 돌렸던 것과 같은 프로모션을 기획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신전이 그리칸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으니 기회를 살려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자고로 노는 물들어 올 때 저어야 훨씬 수월한 법이다.
“얼마나 걸릴까.”
“못해도 사흘은 걸리지 않을까요. 노점부터 시작 한다 쳐도 집기 같은 것도 장만을 해야 하고, 식재료의 납품 계약을 하려면 수호자도… 아, 진이나 하마란님이 도와주면 이틀 안에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제랄딘의 말에 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로 줄이자. 까짓 밤 좀 새면 그 정도쯤이야.”
“네? 괜찮겠어요?”
“물론. 그 정도야 어려울 것도 없지.”
형진은 이미 혼자서 마을 하나를 만들어낸 바 있다. 섬 안의 건물들 같은 형태로 간단하게 집을 지은 뒤 가져다 놓고 집기류는 물자 조달로 충당해도 된다. 대규모 연회장을 겸하는 식당도 아니고 서민을 위한 작은 식당 하나 정도 만들어 내는 데는 하루면 충분한 일이다.
“제랄딘은 필요한 집기의 구입을 바로 시작해 줘. 유아는 제랄딘이 사들인 집기류를 정리해서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고.”
“오빠! 저도 도울 게요.”
“카트린도? 그래 주면 물론 고맙지.”
“헤헤.”
지금껏 다른 이들의 일을 돕고 싶었어도 두 다리가 불편해서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던 카트린도 이번 기회만큼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켠에 물러서서 그런 모두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보호와 균형은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벅차오르는 듯한 느낌에 깜짝 놀랐다.
“아… 이건!”
성물을 만드느라 대부분의 힘을 소모해 후광조차 사라졌던 보호와 균형의 모습이 다시 환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성물의 영험함을 목격한 사람들의 가슴 속에 보호와 균형이라는 새로운 신의 이름이 각인되면서 소모되었던 힘이 다시 빠른 속도로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여신은 수많은 기원의 목소리들이 자신에게로 전해지는 것을 또한 깨달았다.
-남친이랑 오래 가게 해주시고 살 빠지게 해주시고 그냥 모든 문제 다 깔끔하게 해결되게 해주세요.
-우리 가족 건강, 행복, 화목, 꿈 모두 다 지켜 주시고 이루게 해주세요! 그리고 올해 최선을 다해서 검술 실력도 올리고 경비대 면접도 잘 보게 해주시고 남은 일 년간 잘 마감해서 경비대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해서 내년엔 장가갈 수 있게 해주세요!
-이번 상행이 대박 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여신 만세!
-여자가 자꾸 따라 다녀요.
-남친 생기게 해주세요.
-멋진 모험가가 되고 싶습니다. 대박 나게 해주세요.
-상단 면접에 합격하게 해주세요. 당나귀 녀석이 제 말 좀 잘 듣게 해주세요.
-이번에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갈 거 같습니다. 그곳에서도 별 탈 없이 일 잘 되게 해주세요.
“어, 어어?”
갑자기 밀려드는 수많은 기원에 여신은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이런 경험 자체가 없었던 그녀인지라 갑자기 수많은 인간들의 목소리가 전해져 오자 당황하고 만 것이다. 성물 근처에서 기원을 드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전해지는 것 뿐인데도 이 정도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그게… 사람들의 기원이 갑자기 막 들려와서.”
“아하. 혹시 저에게도 잠시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잠시만요.”
자꾸만 쌓여가는 기원에 당황해서 머리도 손도 마구 엉켜서 허우적거리던 여신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형진에게 그 내용을 공유해줄 수 있었다.
“끙. 아주 신났군. 아예 신이 되게 해달라고 그러지. 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게다가 신이라고 해도 전부 다 이루어줄 수도 없는 걸요. 전 별로 힘 있는 신도 아니고.”
“…”
어째 힘이 있었으면 죄다 들어줬을 것 같은 분위기다. 어째 희망과 생명을 호구신이라고 부르는 건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다. 그쪽은 가출 중이니 천방지축 가출신이라고 부를까. 아무리 봐도 호구신의 타이틀은 보호와 균형에게 더 어울리는 느낌이다.
“사실 이 사람들도 전부 다 기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살아가면서 조그마한 희망을 얻고자 하는 것 뿐이죠. 게다가 언젠가도 말씀하셨듯이 기원한다고 다 이루어주는 건 균형의 의미에도 맞지 않습니다.”
“역시… 그렇겠죠?”
“그러니, 정말 간절하고 도움의 손길이 반드시 필요한 기원이 아니라면 그냥 짤막한 응답 정도만 해주셔도 그들은 매우 고마워 할 겁니다. 이러면 되겠네요. ‘그대의 기원이 이루어지도록 나 역시 기도하겠노라.’ 음, 이건 너무 딱딱한가. 아무튼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요? 정말요?”
형진은 여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의 앞에 놓인 문제가 무엇인지 다른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죠. 그들은 여신께서 그것을 이루어주는 것보다도,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정말로 맞는지 확인받고 싶은 것 뿐입니다. 어차피 기적이란 것이 그리 흔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정도는 이미 그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아…”
“물론 개중에는 정말로 기적이 필요한 이들도 있습니다. 힘은 무작정 많이 베푼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꼭 필요한 곳에 꼭 필요한 약간의 기적.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만약 그런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경우에 따라서는 굳이 여신께서 기적의 힘을 발휘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도 있으니까요. 그것이 제가 대리자로서 여신을 도와드릴 수 있는 가장 큰 부분이 될 것입니다.”
형진의 말에 여신은 물론이고 곁에 있던 유아나 제랄딘, 크루그, 그리고 카트린마저 모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순수하게 감탄하는 유아나 카트린과는 달리 크루그나 제랄딘의 경우엔 역시 사기꾼답다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감탄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사실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 전에 일단 형진을 거치게 한 것은 단순히 효율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설마 그런 자가 있을까 싶긴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 착하고 순진한 신을 속여 먹으려 드는 자가 있다면 형진의 선에서 처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진정한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내막 따위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여신은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군요. 정말 진님은 대단하세요. 저 따위보다는 더 신에 어울리는 분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녀로서는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칭찬이었지만, 이것만큼은 형진도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어이쿠. 여신님. 그거 신성 모독 아닌가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제발 거두어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런가요. 아하하하.”
형진의 너스레에 여신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까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곧바로 형진은 식당 건물의 제작에 들어가고 다른 이들 역시 필요한 집기의 구매와 정리 등의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여신은 족욕을 할 수 있도록 그녀 전용으로 만들어진 욕조를 형진이 일하는 모습이 잘 보이는 정원 한 곳에 가져다 놓고는 사람들의 기원에 응답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대의 기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저 역시 기도할게요. 당신의 앞길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에? 에엣? 에에엣! 자, 잠깐! 지금 설마… 여신님?“
-맞아요.
-에에에에엣!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신님 만세! 만세! 여신님,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 진정하세요.
-아, 예. 진정해야죠. 알겠습니다. 여신님의 명이시니 따르겠습니다. 여신님, 만세!
-…
설마 정말로 신이 응답하리라고는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성역이 선포되고 신전 안에 성물이 들어섰다는 사실에 놀라 구경이나 하러 왔던 차에 그냥 가기 뭐해서 기원을 올렸던 것 뿐인데, 정말로 여신이 응답을 해주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일일이 하나씩 응답하는 건 굉장히 번거로운 일이다. 하지만 허접해도 신은 신. 그녀는 동시에 자신에게 기원을 올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응답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을 무리 없이 해냈다.
구현된 아바타를 통한 육체 노동이나 직접적인 권능을 발휘하는 일은 어렵더라도 이런 식의 일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인간과는 정신의 깊이 자체가 다른 신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니, 신이 아니라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여신은 자신에게 힘이 없어서 그들 모두에게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 여신과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경악할 만한 일이다.
게다가 그녀의 이름이 의미하듯, 그들은 단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보호와 균형의 영향을 받으며 육체와 정신이 보호되고 균형을 찾아가는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카트린의 장애가 한번에 나았던 것과 같은 일을 그들은 아주 느릿하게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으로부터 얻어졌던 스트레스나 불안 같은 것이 여신의 온유하고 상냥한 목소리를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봄눈 녹듯이 사라지는 경험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일. 오직 여신만이 그러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여신과의 대화. 그것은 이미 그 자체 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