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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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 각오해요.
“수고하셨습니다.”
아디슈가 수호자들을 이끌고 딱 신이 원하는 만큼만 파스파 왕국에 징벌을 내리고 돌아왔을 때, 형진은 정신을 잃은 귀비를 양지바른 언덕에 눕혀 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여자는?”
자신이 안 보는 사이에 또 무슨 짓을 저지르고 돌아다닌 걸까 싶은 생각에 아디슈가 얼굴을 찌푸리며 묻자, 형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나 때문에 억울하게 죽을지도 모르는 여자라서, 측은한 마음에 이렇게 데리고 나와 버렸어.”
“…”
아디슈는 이게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집행자가 억울한 죽음 운운이라니. 수호자 입장에서 보기에는 개도 안 웃을 얘기다. 게다가 죽은 듯이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여자는 딱 보기에도 상당히 곱게 자란 기색이 역력하다. 좀 낯선 느낌이긴 해도 입고 있는 옷차림이라든가, 지니고 있는 장신구 같은 것은 이런 것에 일절 관심이 없는 수호자들이 보기에도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실은… 내가 중간에 길을 못 찾아서 도움을 좀 받았거든.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여인의 남편이 되기로 정해져 있는 자가 심각한 의처증이라지 뭐야. 이 여자 이전에 그러한 이유로 죽어나간 여자가 벌써 몇인지 셀 수도 없다는군.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데 얼마나 애처롭던지, 나도 모르게 이렇게 귀찮은 일에 손을 대고 말았어.”
“흠.”
거짓말은 아니다. 다만 일의 선후 관계가 교묘하게 꼬여 있을 뿐. 굳이 따지자면 살려달라고 애원한 것이 가장 처음의 일이고, 길 찾는데 도움을 받은 것이 그 다음이며, 의처증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마지막. 하지만 이런 사실 관계의 순서를 살짝 뒤섞자 제법 그럴 듯한 얘기가 만들어 진다.
사실 이런 내용은 여자가 정신을 차리면 대번에 밝혀질 이야기라 괜히 거짓말을 끼워 넣기도 애매하다. 그래서 형진은 한 가지 더 양념을 치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데리고 나와 보니, 알다시피 내가 집행자잖아. 요즘 이런 저런 일에 손을 대고 있기는 해도, 사람 죽이러 다니는 일에 이런 여자를 데리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라서 말이지. 그러니 사람 하나 구하는 셈치고 그쪽에서 맡아주면 어떨까.”
“우리가?”
“본래 지키는 건 그쪽 역할이잖아. 나는 누군가를 죽이는 건 자신 있어도 지키는 건 영 자신이 없어서 말이야. 아, 물론 공짜로 맡기겠다는 얘기는 아니야. 이 여자를 지키는데 드는 비용은 지불을 할 용의가 있어. 일단 선불은 이 정도로 하지.”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인벤토리 안에 담겨져 있던 상자 하나를 꺼냈다. 특별한 표식이 새겨져 있지 않은 상자였지만, 뚜껑을 열자 하나 가득 담겨져 있는 은화가 눈에 들어온다.
“어때. 이 정도면.”
“…”
대놓고 중매를 서네 여자를 소개시켜 주네 하면 당연히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다른 이들까지 뻔히 보는 마당에 그런 식으로 일을 벌이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다.
아디슈는 딱히 여자나 은화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집행자가 이렇게까지 나서서 구해주려는 여자이니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어쩌면 실체를 알 수 없는 이 남자의 중요한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일. 비록 협력 관계이긴 하지만 국가간의 외교이든 개인의 거래이든 간에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된다거나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는 일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그런 거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겠군.”
아디슈에게서 반승낙의 말이 흘러나오자, 형진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손바닥을 비비며 다시 말했다.
“역시 당신은 얘기가 잘 통해서 좋아. 아,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
아디슈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형진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내가 잘 아는 수호자는 당신뿐이야. 당신은 하마란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눠보기도 해서 사람됨을 아주 잘 알지. 하지만 다른 수호자들은 그렇지 못하잖아. 그렇지?”
“그거야… 그렇지.”
확실히 이 남자와 직접적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눈 것은 자신이 유일하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물론 수호자를 믿지 못한다는 얘기는 아니야. 신뢰와 헌신을 보필하는 수호자들을 믿지 못한다면 얘기가 안 되지. 다만 나는 여기에 더해 일개인으로서의 당신을 믿고 이 가련한 여인을 맡기는 거야. 단순히 수호자라서가 아니라, 아디슈 악타르라는 한 남자를 믿고 맡기는 거란 얘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대충은.”
결국 수호자 중에서도 특히 더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얘기이니 기분 나쁠 이유가 없다. 수호자를 못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수호자 중에서도 특히 더 신뢰가 간다는 얘기니까.
“좋아. 그럼 얘기는 여기서 끝. 그럼 슬슬 돌아가 볼까. 뭐해? 아가씨 챙겨.”
“…”
형진이 한 걸음 물러나자 아디슈는 다른 수호자에게 은화가 담긴 상자를 챙기게 하고는 스스로 나서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여인을 안아 올렸다.
“으음…”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 것을 느꼈는지, 여인은 작은 신음 소리를 내더니 부르르 떨며 아디슈의 단단한 가슴팍에 매달리듯 몸을 기댔다.
순간 아디슈는 여인에게서 전해지는 부드러운 감촉과 은은한 향기에 움찔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는다.
씨익.
하지만 요정의 문을 여느라 안 보는 척 하면서도 형진은 그 모든 것을 확실하게 눈에 담아두고 있었다. 눈가리개 덕분에 눈동자의 움직임을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니 가능한 일이다.
하마란을 낳아 키웠으니 여자 자체를 모르지는 않을 터. 의지할 곳 없는 여인과 임자 없는 듬직한 홀아비가 만나 서로 부대끼다 보면 어떤 화학반응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은연중에 다른 누구도 아닌 아디슈 자신이 직접 신경 써서 돌보라는 식의 언질까지 해뒀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다른 엉뚱한 놈과 눈이 맞아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아디슈의 책임.
어느 쪽이 되든 아디슈로서는 빠져 나갈 수 없는 함정에 떨어진 셈이다.
“아, 그리고. 혹시라도 파스파 왕국에서 알게 되면 골치 아파질지도 모르니 가급적 그 여자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편이 좋아. 무슨 말인지 알지?”
“당연히.”
물론 이런 것은 여자 쪽에서 자기 신분을 까발리고 다니거나 하면 다 소용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로서도 신분이 밝혀져서 파스파 왕국으로 돌아오게 되면 기다리는 것은 결국 죽음뿐이란 것을 모르지 않을 터. 결국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단검을 목에 가져다 댈 때의, 절개를 위해서는 죽음조차 불사할 때의 그녀라면 몰라도, 죽음이라는 것의 공포를 제대로 깨달아 버린 그녀로서는 이것 역시 피할 수 없는 함정이나 다름없다.
누군가를 빠져 나올 수 없는 함정에 빠뜨리는 건 너무나 즐거운 얘기다. 특히 이 경우엔 거미줄에 얽힌 두 마리 나방이 몸부림치다가 결국 서로 몸이 얽혀서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하나.
어쨌든 그렇게 수호자들을 라야바르트의 수도 라야까지 배웅하는 일을 마치자, 형진은 미궁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오귀스트와 하마란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둘이 열심히 일해준 덕분에 대미궁에 밀려들었던 파스파 왕국의 공략대들은 다시 원래대로 쫓겨나 버리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던전 안에 투입된 공략대의 사분의 일 정도가 사망했지만, 그나마도 적절한 시점에 퇴각을 시작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확인해 보니 희망과 생명의 신전을 통해 수도에서의 사태가 이번 작전을 지휘하던 자에게 급보로 전해졌던 모양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아주 일이 수월하게 끝났습니다.”
“별 말씀을.”
간단한 치하가 끝나자 형진은 던전의 상황을 파악하고는 다시 말했다.
“일단… 이쪽 방면에 코어를 좀 더 심어 둬야겠습니다. 탈취 당한 코어가 두 개나 되니 보강도 할 겸.”
“면목 없습니다. 그리고 탈취 당한 코어는 일단 회수해 두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쉽지 않았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코어는 장악되는 순간 사념체가 날아가 버린다. 때문에 탈취 당한 걸 되찾아 봐야 이미 늦은 일. 그러나 동일한 형태의 머리핀이 코어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누군가 임의로 던전을 확장하고 있다는 의혹이 생길 수 있다. 오귀스트 역시 그런 점을 간파하고 코어를 회수한 것이리라.
형진은 이번에는 서로 다른 몇 가지 희귀급 아이템으로 코어를 만들어 파손된 던전을 보강한 뒤, 그들과 함께 다시 집으로 향했다.
“후우…”
갑작스럽게 불려나가서 한바탕 커다란 싸움을 치르고 온 오귀스트는 간단하게 몸을 씻고는 조금 지친 표정으로 침대 위에 누웠다. 하지만 곧바로 피로가 몰려와 잠이 들려던 찰나, 그제서야 오후에 하마란과 했던 약속을 떠올리고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크흠. 큰 실수를 할 뻔 했군.”
오귀스트는 급히 다시 한 번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일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둘만의 첫날밤인데 피냄새나 땀냄새 같은 걸 풍기며 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래도 혹시 몰라 향수 같은 거라고 뿌려야 하나 싶은 생각마저 떠올렸지만, 그건 너무 지나치다 싶었기에 얼른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흠흠.”
그 다음은 옷. 정장을 입고 가야 하나 싶었지만, 역시 그것도 너무 지나친 것 같아서 결국 그만두었다. 무엇보다도 괜히 그런 거 입고 다녔다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정말 대책 없는 일이다. 자칫 하마란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런 모습이 들키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대참사 아닌가.
결국 잠시 고민하던 오귀스트는 간편하고 깨끗한 옷차림으로 갈아 입었다.
그렇게 옷을 챙겨 입고 나가려다가 문득 뭔가 빼먹은 것 같아서 거울을 바라보니, 어느새 거뭇하게 솟아난 시커먼 수염이 눈에 들어온다.
또 한 번 고민을 거듭하던 오귀스트는 결국 수염을 말끔하게 깎고 난 뒤에야 비로소 집을 나섰다. 그것도 괜히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봐 은신에 잠행까지 펼쳐가며 조심스럽게.
그렇게 어둠 속을 조심스럽게 조금 걷자, 마침내 하마란이 머무는 작은 집 앞에 도착했다.
“…”
막상 이렇게 그녀의 집 앞에 서고 보니 뭔가 감회가 새롭다. 솔직히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이런 관계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더욱 그러하다. 나이 차이만 따져도 열 살을 가볍게 넘지 않는가.
잠시 심호흡을 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오귀스트는 문가로 다가가 살짝 문고리를 잡은 뒤 조심스럽게 그것을 두 번 두드렸다.
똑똑.
그러자, 안에서 작은 인기척과 함께 누군가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문이 열린다. 하얀 실내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하마란의 모습이 은은한 달빛에 드러나자 오귀스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하마란은 가만히 그의 손을 잡고는 집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가 온전히 집 안으로 들어서자, 문을 닫고는 곧바로 그의 목을 매달리듯 끌어안고는 열렬한 입맞춤을 시작한다.
마치,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격정적인 그 입맞춤에 오귀스트는 잠시 혼이 달아다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어정쩡하게 멈춰 있던 손이 천천히 움직여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어루만진다. 그런 그의 행동에 하마란은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여전히 그의 입술을 갈구하듯 입맞춤을 이어가며 슬쩍 어깨를 틀었다. 그러자 오귀스트의 손에 어깨끈이 걸린다.
오귀스트의 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깨끈을 천천히 아래로 끌어내렸다.
하마란은 그 움직임에 맞추어 다시금 살짝 몸을 틀었고, 이내 그녀가 입고 있던 원피스 스타일의 실내복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그녀의 다리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옷 아래로 드러난 부드러운 살결이 손끝에 닿는 순간 오귀스트는 마치 정전기가 일어난 것처럼 짜릿한 느낌을 받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의 손은 이내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그 부드러운 감촉을 즐겼다.
그렇게 잠시 서로를 어루만지며 키스를 나누기를 얼마나 했을까. 문득 하마란이 거친 숨을 내쉬며 오귀스트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멱살을 확 움켜잡고는 그대로 침대 위에 그를 내동댕이 치고 말았다.
“헉!”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놀란 오귀스트가 눈을 크게 뜬 순간, 하마란은 마치 마운트 자세를 취하듯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란?”
오귀스트가 그렇게 부르자, 속옷차림의 하마란은 배시시 웃더니 그의 옷을 움켜잡고는 그대로 확 찢어 버리며 말했다.
“날 기다리게 한 벌이에요. 각오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