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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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유랑극단
숯을 싣고 마을로 돌아와서 헛간에 적당히 깔판을 댄 다음 그것을 쌓아두었다. 대충 일을 마치고 보니 달리 뭔가 새로운 임무를 받기에도, 그냥 숲에 들어가 채집 스킬을 올리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라 잠시 멀뚱한 표정으로 앉아 넋을 놓고 있자니 문득 건장한 남자 몇이 문가에서 기웃거린다.
“무슨 일이십니까.”
콧수염을 그럴 듯 하게 기른, 하지만 생김새에 비해 옷차림은 어쩐지 후줄근한 느낌의 중년 남자가 반색하며 묻는다.
“아, 자네가 저 손수레를 만든 사람인가?”
“그렇습니다만.”
형진이 긍정하자, 남자는 잠시 손수레를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대단해. 얼핏 보면 그냥 대충 만든 것처럼 보여도, 수레로서 갖춰야 할 것은 다 갖춰져 있어. 사람이 끌기에 적합하도록 무게 중심도 맞춰놨고. 훌륭해. 자네 손재주가 대단하군!”
손수레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감탄하는 사람은 있어도 이렇게 세심하게 뜯어보는 사람은 아직 없었던 관계로 조금 호기심이 일었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용건이?”
“아, 내 정신 좀 보게. 이봐. 그것들 좀 가져와봐.”
“네.”
중년 남자를 따라온 다른 남자들이 마당 한쪽에 무언가를 내려놓는다. 살펴보니 살이나 테가 부서진 마차 바퀴와 부러진 축이다.
“소개부터 하지. 나는 유랑극단 마이너스에서 총무 역할을 맡고 있는 제서라고 하네.”
마이너스… 뭔가 미묘한 느낌이다.
“반갑습니다.”
“봐서 알겠지만, 이것들은 우리 극단의 마차에서 쓰던 바퀴와 축일세.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신세다보니 제때 수리를 못해서 이런 식으로 쌓아만 두고 있었거든. 그렇지 않아도 때를 봐서 좀 더 큰 마을에 가지고 가서 한꺼번에 수리를 맡길까 하던 참인데, 혹시 자네가 이것들을 봐줄 수는 없겠나? 그렇게 해준다면 수리비는 다른 마을에 맡기는 거랑 동등하게 챙겨주도록 하겠네.”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이다. 하지만 마차 장인이 있는 다른 마을까지 이동하는 시간이라든가, 거기에 소요될 인력이나 물자를 생각하면 같은 값을 치르더라도 이들에게 이득인 건 분명한 사실.
그렇지 않아도 손수레도 다 만들고 숯가마의 일도 끝난 터라 다음 임무를 알아보려던 참이니, 이것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제안이다.
“잠시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서로 다른 마차의 것인지 규격이 제각각이었지만, 단순히 나무만을 끼워 맞춘 손수레의 바퀴와는 달리 쇠나 구리로 된 테를 두르고 축과의 연결 부위도 튼튼하게 보강된 좋은 바퀴 들이다.
형진이 만든 손수레의 바퀴보다 한 단계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물건들이지만, 이번에 가공 기술의 등급이 숙련 단계로 올랐으니 한 번 해 볼만 한 일인 듯 싶다.
“좋습니다. 한 번 해보지요. 기일은 언제까지면 되겠습니까?”
“그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너무 늦어져도 곤란하거든. 얼마나 걸릴 듯 싶나.”
“흠… 늦어도 이번 달 안에는 충분히 끝날 것 같네요.”
“이번 달 안에?”
“안 되나요? 그 이상 빠르게는 제 실력으로는 힘든데.”
“아니, 아닐세. 충분해. 충분하고말고. 그 정도면 더 바랄 게 없지.”
총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남자는 싱글벙글 웃음까지 지어가며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실력이야 직접 만들었다는 손수레를 보고 이미 만족한 상태. 너무 늦어져도 곤란하다고 말한 건 자칫 겨울을 넘겨 다시 마을을 떠나야 할 때까지도 수리가 안 되면 곤란하다는 뜻이었을 뿐이다. 하물며 이 달 안에 전부 수리를 마칠 수 있다면 그들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일이다.
맡아줘서 고맙다며 손을 맞잡고 몇 번이나 흔들어대는 남자를 억지로 돌려보낸 형진은 마차 바퀴를 만들기 위해 만들었던 틀에 부서진 마차 바퀴를 끼어 넣고는 곧바로 수리에 들어갔다.
역시 무언가에 집중하게 되면 잡념이 들지 않아서 좋다. 마차 바퀴 하나를 분해해서 치수를 재는 작업을 마칠 즈음이 되자, 날이 어둑해지면서 저녁 시간이 되었다.
오랜 만에 맞이한 손님 때문에 조금 시끌벅적한 마을 분위기를 바라보며 형진은 오랜 만에 동네 음식점을 찾았다. 보통 아란이 끼니를 챙겨 주는 경우가 많지만, 오늘은 옛 친구도 만나고 했으니 알아서 자리를 비워준 것이다.
“어서 오세요. 먼저 한 잔 하시겠어요? 아니면 식사부터?”
“식사로.”
“오늘은 돼지고기 스튜가 맛있어요. 빵이랑 가져다 드리면 될까요?”
“응.”
주근깨가 살짝 콧잔등에 내려앉은 여급은 살짝 눈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주방으로 가서 주문을 전달했다. 요즘 이래저래 마을 안에서 주가를 높이고 있는 형진을 알아보고 나름 유혹의 몸짓을 보이는 것 같다. 물론 그래봐야 눈웃음도 몸매도 별로 눈에 안 들어온다. 바로 옆집에 아란이라는 비교 불가의 존재가 있다 보니 생긴 후유증이다.
“식사 나왔습니다.”
빵을 집어 스튜와 함께 입에 넣었다. 역시나 버프는 생기지 않는다. 음식점을 할 정도니 맛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역시 전문가의 손길과는 비교가 된다고 해야 하나.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누군가의 손맛에 길들여진 건가 싶어 조금 씁쓸한 기분마저 느껴진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식사를 마친 뒤 계산을 치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인벤토리에 쟁여둔 음식으로 간단하게 입가심 겸 버프를 건 뒤 매크로 수련을 시작한다. 이제는 아침 저녁으로 이런 식으로 체조 비스무리한 운동을 하는 것이 일상이나 다름없게 된 터라 근처를 걷는 사람들도 그런가보다 하고 슬쩍 바라보고 지나칠 뿐이다.
그렇게 매크로 수련을 하고 있는데 문득 옆집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아란이 울타리 근처로 나왔다.
“어디 갔었어요? 같이 식사라도 하자고 초대할까 했더니.”
그것 참 아까운 일이다. 뭐라 해도 아직 아란의 집에는 초대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나라는 여자와 같은 식탁에 앉으면 그건 그것대로 소화가 제대로 안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디서 어떤 돌발적인 언사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뭔가 아직은 여러모로 불편하다고 해야 하나.
“친구 분이 오셨으니 바쁘실 것 같아서 밖에서 간단하게 먹고 왔습니다.”
“그랬어요? 그럼 좀 더 빨리 말을 할 걸 그랬네요. 오늘은 모처럼 솜씨를 잔뜩 부려봤었는데.”
“…”
젠장.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돈다. 도대체 무슨 음식을 만들었길래.
“아무튼 끼니를 거르지는 않았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있다가 봐요.”
“네, 들어가세요.”
아란은 일단 다시 그렇게 안으로 들어갔고, 형진은 매크로 수련을 좀 더 하다가 땀으로 몸이 흥건하게 젖을 정도가 되어서야 비로소 수련을 마쳤다.
뒤뜰의 물통에 받아놓은 물로 간단히 몸을 씻는다. 날이 서늘해져서 그런지 찬물로 몸을 씻는 것도 슬슬 부담스러워지는 느낌이다. 생각난 김에 간단하게 사우나라도 만들어볼까. 모처럼 좋은 숯도 많이 구워두었으니.
마차 바퀴 수리하는 일을 받아두긴 했지만, 그건 선선히 해도 기일을 맞추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애초에 한 달 기한을 잡아둔 것도 너무 실력이 있다고 소문나면 목수 일이 여기저기서 밀려들 수도 있기 때문에 적당히 여유를 둔 것이다.
“내일부터 오전 일과는 그걸로 해야겠군.”
다행히 주정뱅이가 남겨준 집터는 상당히 넓은 편이다. 사우나라고 해봐야 어차피 거창하게 만들 것도 아니고 한두 사람 정도 들어가면 될 정도 규모로 만들 셈이니 큰 공간을 차지할 일도 없고.
마을에 밝혀진 불이 하나 둘씩 꺼질 때가 되자 아이들을 재운 아란이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형진의 수련을 돕기 위해 방문했다.
“오늘은 실습을 해볼까 해요.”
“실습이라면?”
“간단하게 은신과 잠행을 펼쳐서 동네 한 바퀴 돌기 정도?”
“…”
그게 과연 간단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긴 하지만, 숙련된 교관의 지시를 거부할 권한 같은 건 형진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곧바로 은신을 펼쳐 몸을 숨긴 후, 잠행으로 조용히 집을 빠져 나간다. 물론 이런 식으로 몸을 숨긴다 한들 아란의 눈에는 훤히 위치가 드러나겠지만.
“후아… 좋다. 얼마 만에 제대로 마셔보는 건지.”
“이런 맛이라도 없으면 이 생활 못하지.”
“하긴 그래.”
극단의 단원인 건지, 아니면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등짐 장수들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무리의 남자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밤길을 걷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형진은 가만히 멈춰 서서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은신이나 잠행 중에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절대 당황하지 않는 평정심이다.
어둠 속에서 가만히 웅크린 채 기다리자, 남자들은 극단에서 누가 제일 예쁜지를 놓고 짐짓 심각한 토론을 펼치며 천막이 쳐진 공터 쪽으로 사라져 갔다. 역시 이번에 온 극단의 남자들이었던 모양이다.
그 외에도 몇 번 사람들과 마주치긴 했지만 다행히 형진은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수고했어요. 처음 치고는 제법 잘 했어요.”
“감사합니다.”
“뭐라해도 결국 은신이나 잠행은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아무리 실력이 좋고 빠르게 이동이 가능하더라도 도중에 누군가에게 들키면 그걸로 끝이니까요. 앞으로도 은신이나 잠행을 쓸 때는 그 점을 명심하도록 하세요.”
“네.”
형진은 대답을 하고는 잠시 아란을 빤히 쳐다보았다. 갑작스러운 그 시선에 아란은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형진에게 물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요?”
“네. 질문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형진은 입술을 깨물고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이런 질문 실례가 될 것은 압니다만, 아무래도 궁금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까도 싶었지만, 자칫 민감한 얘기라면 오히려 더 큰 실례가 아닐까 싶어서…”
“…”
아란은 가만히 형진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괜찮으니 어서 말해보라는 표정으로. 평소와 다름 없어 보이면서도 어쩐지 가라앉은 듯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형진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는 마침내 질문을 던졌다.
“남편분에 대해 궁금합니다.”
아란은 역시나 싶었던지 쓴웃음을 지었고, 이내 짧게 대답했다.
“죽었어요.”
“…”
“아니, 그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겠네요.”
“그럼…”
“죽였어요. 내 손으로.”
“…”
아란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형진의 눈길을 슬쩍 피하듯 시선을 돌리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랑하던 사이도 아니었어요. 그냥… 암살 대상이었죠. 물론 그렇다고 암살 대상이랑 무슨 감정이 피어났다든가 하는 식의 그런 얘기도 아니에요. 당시의 전 지금처럼 숙련된 집행자도 아니었고, 상대도 제법 강해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암살을 시도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죠. 찾는 물건도 눈에 안 띄는 상황인데 목표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자꾸 치근대니 짜증도 났었고. 그래서, 조금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여자 암살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썼어요.”
아란은 전에 여자 암살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몸이라는 식의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게 설마 자기 자신의 얘기였단 말인가.
“다행히 임무는 성공으로 끝났고, 그 일도 그렇게 잊혀지는 건가 싶었어요. 문제는 그 일이 끝난 후 아이가 들어서 버렸다는 점이었죠.”
“…”
“당연한 일이지만, 몸을 무기로 쓸 때는 그에 걸맞은 대비를 하게 되요. 자칫 아이가 생기기라도 하면 그건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 되니까요. 물론 저도 충분한 대비를 했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생겨버린 거죠.”
아란은 씁쓸한 표정으로 창가에 스며들기 시작한 달빛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요. 특별한 감정은커녕 죽여 버린 대상의 아이인데, 어쩐지 이대로 버리기가 싫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모두 반대했죠. 생명의 사제나 할 법한 멍청한 일이라면서. 공포와 죽음의 성도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냐면서. 스스로가 생각해도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내 안에 생명이 잉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포기할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쌍둥이를 낳았고, 이곳에 그대로 눌러앉아 버리게 된 거죠.”
아란은 다시 형진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궁금증은 풀렸나요?”
“…”
형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란은 그런 형진을 향해 쓴웃음을 짓고는 오늘은 너무 늦었다면서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헤에… 직접 물어보다니, 제법인데.”
그리고 아란이 모습을 감추자 곧바로 미나가 스르르 모습을 드러내며 말을 건다.
“그래서 말했잖아. 충격적일 거라고.”
“후…”
“왜? 실망했어?”
형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미나에게 물었다.
“뭘 원하는 겁니까?”
“나? 내가 뭘?”
“뭘 원하기에 이렇게 자꾸 절 흔들려고 하느냔 말입니다.”
“글쎄. 내가 원하는 게 뭘까.”
미나는 싱긋 웃더니, 다시 모습을 감추며 말했다.
“어설픈 각오로 괜히 못 먹을 감 찔러보지는 말라는 얘기일 뿐이야. 신입군. 우리들은 거미, 그것도 맹렬한 독을 지닌 과부거미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