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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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탄생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 섬으로 돌아오자,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리고 있던 보호와 균형이 그들을 맞이한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됐어요?”
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곧바로 자신을 대신해서 점원들에게 홍보를 하러 갔던 카트린에게 향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신상을 통해 신도들을 모으고 있긴 해도, 지금 형진이 모은 점원들은 잘 하면 단순한 신도가 아니라 추종자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잘 얘기했는지는 모르지만 모두 기뻐해 주셨어요.”
“정말요? 와! 다행이다! 카트린, 고마워요.”
얼싸 안고 방방 뛰며 기뻐하는 카트린과 여신의 모습에 사람들은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하마란은 이런 작은 꼬마 숙녀에게조차 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쓴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귀스트가 그런 하마란을 토닥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크루그는 형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괜찮을까요?”
“뭐가?”
“이런 식으로 카트린을 노출해도 좋은 건가 싶어서.”
이러니 저러니 해도 동생의 안위를 가장 걱정하는 크루그. 어떤 식이 되었든 엘 파르드의 국민에게 카트린의 존재가 노출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괜찮아. 괜찮아. 설마 걔들이 카트린을 공주로 생각이나 하겠어?”
“그야… 그렇지만.”
어차피 오늘 모였던 사람 중에 카트린의 신분을 알아챌 만한 인물은 단 하나도 없다. 고작해야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고는 전직 시녀들 정도. 하지만 그런 지명조차 기억나지 않는 작은 시골 영지의 시녀 출신이 어린 시절 엘 파르드에서 도망쳤던 공주의 신분을 알아챌 가능성은 문자 그대로 0에 수렴한다.
그러나 크루그는 여전히 뭔가 석연치 않은 기색이다. 형진은 그런 녀석의 모습을 보고는 다시 이렇게 덧붙였다.
“게다가 나중을 위해서도 카트린의 지위는 미리 확립해 두어야만 해.”
“네? 그게 무슨…”
“네 녀석이 나에게 왕자 자리를 떠넘겼지. 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올라서면 주위의 놈들이 카트린을 가만히 놔둘 것 같아?”
“…”
순간 크루그의 눈에서 불똥이 튄다.
“만약 카트린을 집적거리는 놈이 있다면 제가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정말 그런 놈이 눈앞에 있다면 단숨에 포를 떠버릴 듯한 기세다. 나중에 카트린이 누구에게 시집갈지 몰라도, 크루그의 벽을 넘으려면 고생 좀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가급적이면 그럴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의 위치를 미리 확보해 두어야만 한다는 뜻이야.”
“하긴.”
제랄딘처럼 가문 빵빵하고 능력 좋은 레이디도 나이가 되자 여기저기서 집적거리는 통에 성격을 다 버릴 뻔했다. 물론 카트린에게는 아직 먼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지금부터라도 미리 준비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골치 아파질 수도 있는 일이다. 어지간히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여신과 허물없이 친구처럼 대할 수 있는 인물에게 집적대긴 어려울 테니까.
물론 크루그의 말처럼 그런 놈이 생기더라도 처리해 버리면 그 뿐일 수도 있지만, 사적인 이유로 무분별하게 살인을 일삼다가 괜히 공포와 죽음께 노여움을 사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크루그도 꽤 영리한 녀석이긴 하지만 카트린의 일이 되어 버리면 외골수로 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서 좀 걱정이다.
“저놈 저래 가지고 어디 여자 친구라도 사귈 수 있을라나 모르겠네.”
형진이 카트린의 뒤를 따라 멀어져 가는 크루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유아가 피식 웃었다.
“능력 좋은 형이 참한 아가씨 하나 소개해 주시지 그러세요?”
“그게 말이 쉽나. 원래 중매는 잘못하면 뺨이 석 대라고 그랬어. 하지만 저 녀석이 과연 뺨 세 대만 때리고 말 것 같아.”
만약 미엘이 깨어 있었다면 그런 사람이 하마란의 아버지인 아디슈에게 남의 나라 귀비를 납치해서 붙여 놨냐고 그랬겠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여전히 쿨쿨 잠이 들어 있는 상태였다.
저녁 식사 시간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있어서 휴식을 갖기 위해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그런 이들 중에는 형진을 따라 갔던 림도 포함되어 있었다.
-림.
-응?
-너도 이리와.
-무슨 일인데?
요정들에게 주어진 집은 좀 특이하다. 다른 지역에서 크고 우람한 나무를 한 그루 가져다가 언덕 아래 심은 뒤 그곳에 아기자기한 모양을 가진 작은 집들이 마치 새집처럼 다닥다닥 붙여 놓았다. 그렇게 들어찬 집들 중에서도 림의 집은 특별히 크고 아름다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요정왕을 사부로 모시는 제자이며 최측근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요정들은 나무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서 전대 요정 여왕이었던 람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또 무슨 엉뚱한 짓을 저지르려고 그러는 거야? 괜히 그러다가 사부께서 화라도 내면 어쩌려고.
돌아가는 꼴을 보고 또 뭔가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한 림이 그렇게 심드렁하게 말하자, 람이 발끈하며 외쳤다.
-너! 요정왕이 좀 귀여워해 주신다고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뭐… 그거야 사실이지만, 어쨌든 무슨 얘기 중인 건데?
괜히 말싸움 해봐야 귀찮다는 생각에 림이 그렇게 묻자, 람은 허리에 손을 척 얹고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신입들에게 교육이 있었다고 들었어.
-그랬지.
-그 녀석들은 엄연히 우리들의 후배라고. 그런데 그 교육 현장에 우리가 빠지는 게 말이 돼?“
-그거야…
이거였나 하고 림은 피식 웃어버렸지만, 다른 요정들은 이 사태를 의외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옳소! 우리들도 신입들의 교육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맞아! 맞아!
-글쎄… 딱히 교육을 시키라고 해도 귀찮지 않을까.
-난 누구 가르치는 게 정말 싫어!
-나도 싫어! 특히 너!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어쩐지 반응이 영 신통치 않다. 람의 말에 제대로 동의하는 것은 고작해야 몇몇. 하기야 요정들의 산만함을 생각해 보면 이것도 대단한 것이리라.
-게다가! 내가 전해들은 첩보로는 오늘 교육 시간 중에 각 교단의 홍보 시간이 있었다고 해!
-홍보? 그게 뭔데?
-먹는 건가?
-홍시는 아는데. 아, 홍시 먹고 싶다.
요정들의 집중력이라는 것이 참 뻔한 것이라 얘기는 금방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결국 람이 소리를 몇 번 빽빽 지르고 나서야 다시 요정들은 그녀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아우, 목 아파. 어쨌든! 우리들의 군주인 요정왕이라면 당연히 위대하고 거룩하시며 그 이름도 찬란하신 허세와 망상의 교세를 펴는데 앞장서야만 하지 않겠어?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요정왕은 그런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세와 망상의 교세를 펴는데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고! 요정들아! 이게 과연 옳은 일인가!
-옳소! 아니, 옳지 않소!
-옳지 않소… 이거 맞지?
-맞아! 이건 직무유기야!
-근데 직무유기가 뭐야?
-몰라.
-나도 몰라.
가만히 놔뒀다가는 또 엉뚱한 얘기로 흘러갈지도 모르는 일이라, 람은 앞으로 나서며 크게 외쳤다.
-그러니 우리들은 요구해야 한다! 요정왕이 스스로의 막중한 책임을 깨달아, 허세와 망상의 이름을 널리 떨치는 것에 최선을 다하도록! 그것이 지금까지 허세와 망상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도록 지켜온 우리들의 귀중한 책임이다!
-오오, 어쩐지 람이 훌륭해 보여.
-역시 뒷담화의 달인.
-그런데 오늘 저녁 메뉴는 뭐지?
-몰라. 가서 물어보고 올까.
림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정신 없는 요정들을 붙들어 놓고 이렇게나마 얘기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람의 능력이 대단해 보일 정도다. 솔직히 말해서 자기보고 하라고 하면 흉내도 내기 어려울 것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피곤해서 이만. 후아아암.
-어딜가! 얘기는 끝까지 듣고 가야지!
람이 쏘아 붙이자, 림은 다시 한 번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이렇게 물었다.
-무슨 얘긴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어쩔 건데?
-뭐가?
-여기서 아무리 떠들어 봐야 소용없잖아. 결국 누군가는 가서 사부한테 그 얘길 해야 하는데, 네가 할 거야?
-그, 그건…
방금 전까지 강경한 태세로 얘기를 주도하던 람은 림의 지적에 꼬리를 말았다. 예전에도 진은 강했지만 요즘은 더욱더 강해진 것을 요정들도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하물며 불만 사항을 말하다니, 그러나 화라도 내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람이 이런 식으로 얘기를 늘어놓은 것은 결국 최측근이며 제자인 림에게 가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를 전하라는 뜻인 셈이고, 림은 일찌감치 그런 람의 속셈을 알아차리고는 이렇게 퉁명스럽게 대하고 있는 것이다.
-림! 그러고도 네가 허세와 망상의 거룩한 신도라고 할 수 있냐!
-시끄러. 자꾸 그렇게 따지고 들면 있다가 사부한테 말 안한다.
-그, 그건…
림의 대꾸에 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켜보던 요정들은 어느 틈엔가 흥미를 잃고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풍경인 셈이다. 맙소사.
어쨌든 람의 그러한 불만사항을 접수한 림은 식사가 끝나고 나서 형진에게 그 얘기를 전했다.
“허세와 망상이라. 너희들이 그러고 싶다면 상관은 없다만, 문제는 신도들에게 뭘 해줄 수 있느냐 하는 점 아닐까.”
-아무래도… 그렇겠죠.
형진의 말에 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세와 망상의 신도가 된다고 해서 딱히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믿고 따라야할 신 자체가 어디로 갔는지 행방불명이 된 상황이니 형진이 요정왕이라고 불리고는 있어도 딱히 뭔가를 해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망상 필드를 펼쳐서 요정들처럼 싸우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호와 균형께서 토끼들을 분양해 주려고 하는 것처럼 요정들을 분양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하하하하…
림은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을 주륵 흘리고 말았다. 아닌게 아니라 형진이 정말 그러고자 마음 먹는다면 그러고도 남는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농담으로 들리질 않는 것이다.
“아무튼 알았다. 그 부분은 생각해 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럼 쉬세요.
림이 얼른 도망치듯 물러가자 침구를 정리하던 제랄딘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허세와 망상에 대한 것을 잊고 있었네요.”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지금으로선 뭘 해주기도 애매해서. 진짜로 요정이나 분양해 줄까. 그러면 확실히 신도들은 많이 모일 거 같은데.”
“쿡. 하긴 그렇긴 하겠네요. 요정들은 기겁을 하겠지만.”
형진은 제랄딘과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책상에 다시 사념체와 아이템을 늘어놓았다.
“코어를 만드시려고요?”
“응. 슬슬 이제 대미궁에 대한 일도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아서.”
이번에 정신 나간 자작의 일 때문에 미궁 쪽에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방금 전의 말대로 이제는 슬슬 대미궁의 중심 코어를 장악하는 일을 마무리 지을 때가 되었다. 아직 시작단계이긴 하지만, 가스트샵의 운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처리해야할 물류의 양도 압도적으로 많아질 것이다. 그때 가서 부랴부랴 일을 처리하느니,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미리미리 처리해 두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도 편하다.
제랄딘은 형진이 사념체와 아이템으로 코어를 만드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전에 인형술이라는 스킬 만들지 않았어요?”
“그랬지.”
“그거 요새는 익히지 않는 것 같던데, 어떻게 된 거에요?”
“글쎄. 생각보다 여러모로 애매해서 말이야.”
동작이라든가 반응 같은 것이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많고, 인형 자체에도 문제가 있어서 인형술은 현재 답보 상태다. 보다 완벽한 기술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뭔가가 필요한데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다.
“사실 대미궁을 장악하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야.”
“무슨 뜻이에요?”
“대미궁 정도 되는 거대한 구조물을 지탱할 정도의 코어라면 뭔가 대단하지 않겠어? 계산을 돕는다든가 하는 식의 활용 방법 외에도, 뭔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아하.”
엘 파르드의 일은 수호자들의 채권 추심 과정을 지켜보며 추이에 맞추어 대응해도 되지만, 대미궁의 일은 형진이 직접 나서야만 하는 일이다.
다음 날.
형진은 오귀스트와 하마란에게 점원들의 교육을 맡기고 여신과 함께 대미궁으로 향했다.
“오늘도 열심히 할게요! 지켜봐 주세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가볼까요.”
여우로 변한 하엘의 등에 올라탄 채 당연하다는 듯이 커다란 배낭을 메고 기세 좋게 외치는 여신의 모습에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형진은, 곧바로 장비를 갖추고는 아직까지 정복하지 못한 대미궁의 심장을 향해 탐색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