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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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역마차
사제를 노예처럼 부려먹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 역시 포션 만들기다. 물론 연금술로 약초 같은 것을 사용해 회복제를 만들 수는 있지만, 회복제와 포션은 그야말로 빨간약과 마데카솔 정도의 차이가 있다. 게다가 이 여자는 무려 희망과 생명의 사제. 다른 어떤 신의 수족들보다도 생명력 분야에는 획기적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터.
“어허, 느긋하죠? 아주 살판났죠? 빨랑 못 합니까? 늑장 부리다가 마차 놓치면 그 값 낼 수는 있습니까? 뭐 상관없습니다. 여기 희망과 생명의 아리따운 여사제가 있다고 광고하면 죄다 몰려와서 헉헉 거릴 텐데 그 남자들 저언부 손님으로 받으면 까짓 거 언젠가 마차 삯 정도는 받을 수 있겠죠. 저야 그런 식으로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다, 다 입었어요.”
막 전입 온 이등병이 원래 어리버리하고 싶어서 어리버리한 게 아니다.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일을 마구 시키니 평소엔 잘 하던 것도 손발이 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여자도 마찬가지다. 당장 생명의 빚을 지게 된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판에, 이리저리 마구 다그치니 처음 봤을 때의 그 빠릿한 모습은 어디 갔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는 모양새다.
“이마.”
“네?”
“이마 좀 대보라고요.”
“여, 여기요.”
형진은 그녀가 얼떨떨한 모습으로 이마를 들이밀자 가볍게 손바닥으로 열을 재보았다. 아직 열이 좀 남아 있기는 해도 이 정도면 관리를 잘 할 경우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오늘은 안쪽에 앉아요. 내가 바깥에 앉을 테니.”
“괘, 괜찮은데…”
“바깥자리에 앉았다가 또 퍼질려고요? 또 퍼져서 홀딱 벗고 나랑 같은 침대 쓰고 싶으면 그러던지. 어제는 내가 좀 피곤해서 그냥 자버렸지만, 과연 오늘도 그럴라나…”
“헉! 아, 아니에요. 당연히 제가 안쪽에 앉아야죠. 그럼요. 물론이고 말고요.”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치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형진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손사래를 치든 고개를 끄덕이든 하나만 하든지. 하긴 그 정도로 정신이 없다는 소리겠지만.
“그나저나, 이름이 뭡니까?”
“이름… 이요?”
“어차피 우리들 꽤나 오래 볼 사이인 것 같은데, 언제까지 이쪽 저쪽 나 너 여보 당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뭐 여보 당신이라는 호칭이 마음에 든다면야 상관 없지만.”
“유아입니다.”
“유아…”
왜? 차라리 미아라고 그러지. 하기야 이곳에서야 그냥 예쁜 여자 이름이구나 하고 말겠지만. 역시 이름은 중요하다. 자칫 그 인물의 일생이 바뀌기도 하니까.
“내 이름은 진. 어떤 식으로 부르든 그건 마음대로 하고 그만 나가죠.”
“네.”
유아를 데리고 나가자 곧바로 사람들의 시선이 확 모인다. 그런데 역시 유아 유아 하니까 어쩐지 아이를 유괴해서 데리고 다니는 몹쓸 사람이 된 것 같다. 이거 어째 처음부터 노린 건 아닐까.
“휘유. 좋았수? 나도 한 입만 끼워달라니까. 컥!”
“하하, 신경 쓰지 마십시오.”
병사가 이죽거리는 죄수의 머리를 냅다 후려치고는 형진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하기야 다 큰 남녀가 아침에 한 방에서 나오면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겠지.
유아는 사람들의 그런 시선이 못내 부담스러운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형진의 상의 끄트머리만 살짝 잡고 뒤따라 걷고 있었다. 바보다.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면 더욱더 확정적인 사실이 되어버린다는 걸 모르는 걸까.
어쨌거나 마차는 다시 사람들을 태우고 출발했다. 예정대로 별 문제만 없다면 오늘 저녁 식사는 그리칸이라는 곳에서 하게 될 것이다.
간단하게 점심도 들고 말들도 쉴 겸 점심이 되자 마차가 멈추어 섰다. 여느 때처럼 샌드위치에 채소절임을 곁들여서 먹으려는데, 유아가 옆에서 물끄러미 쳐다본다. 차마 달라고는 못하고, 그렇다고 다른 데 가있자니 어제의 일을 기회로 본격적인 영업이라도 시작한 건줄 안 남자들이 집적대는 것이 두렵고. 참 여러모로 복잡한 여자다.
“자요.”
“감사… 합니다.”
햄 샌드위치를 하나 꺼내 주자 싫다 소리도 없이 넙죽 받아먹더니 문득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부르르 떤다.
“이, 이건…”
거참 반응 한 번 요란하다. 황홀해 하는 모습이 얼마나 선명한지 형진의 눈에도 흡사 그녀의 주위에 반짝이는 별 같은 것이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쉽다. 지구에서였으면 대번에 먹방 스타로 발돋움했을 꿈나무인데.
“맛있죠? 귀한 거니까 흘리지 말고 잘 먹어요.”
“네! 네! 감사합니다!”
그 스티로폼 씹는 느낌의 빵 같은 것도 맛있게 먹던 여자다. 이런 천상의 음식을 또 언제 먹어봤겠는가. 정말 이러다가 공포와 죽음께서 실망하시면 어쩌나 몰라. 형제도 아닌 딴 식구한테 너무 막 베풀어 준다고. 아니지. 아예 포션 약빨이 다 떨어지면 타락시켜서 공포와 죽음의 사제로 만드는 방법도 있다. 큭큭.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공포와 죽음께서 기뻐하시겠군.
아, 정말 너무 열성적인 성도가 아닌가 몰라.
역시 그리칸에 가면 다른 건 다 집어치우고 요리부터 올려야겠다. 다 필요 없고 딱 장인까지만 올려도 아주 돈을 갈퀴로 긁어모을 수 있을 것 같다.
대충 휴식을 마치고 다시 마차에 올랐다. 그런데 이 여자, 배부르고 등 따시니까 졸음이 솔솔 오는지 꾸벅꾸벅 졸더니 아예 나중엔 형진의 가슴에 폭 안겨서 잠이 들어 버린다. 아무래도 버릇 되어 버린 모양이다.
“휘유. 형씨 안 그렇게 봤는데 기술이 대단한가봐? 저 지랄 같은 년이 하룻밤 사이에 아주 요조숙녀가 다 됐네. 나도 좀 알려… 켁!”
“좀 자라. 넌 잠도 없냐?”
형진은 피식 웃어 버렸다. 저 병사와 죄수의 만담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싶은 느낌에.
그렇게 좋게 좋게 마차 여행이 마무리 되는가 싶었는데, 잘 달리던 마차가 어느 순간 다시 우뚝 멈추어 선다. 마차 자체는 형진이 잘 살펴봤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것이고, 딱히 악천후로 인해 노면의 사정이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닐 터. 그렇다면 역시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뭔가 싶어서 차창으로 고개를 슬쩍 내밀어 앞쪽을 바라보려는데 뭔가 휙 날아들어 형진의 뺨을 스치며 지나간다.
“…”
화살. 화살이다. 망할. 다 도착할 즈음이 돼서야 마침내 메인 이벤트 발동이냐.
“하핫!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좋은 말 할 때 우리 형님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여러모로 좋지 않을테니까.”
앞쪽에서 그런 외침이 들려오는 순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죄수 놈이 갑자기 화들짝 깨더니 냅다 웃음을 터뜨린다.
“으하하하하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내 동생들이 날 버릴 리가 없지! 암! 누구 동생들인데!”
“이런 젠장.”
죄수는 기뻐서 미쳐 날뛰고 병사는 완전히 똥 씹은 얼굴이 되어 버렸다. 가는 중간도 아니고 하필 거의 다 도착해서 이런 사단이 날 줄이야!
“흐음…”
“괜찮으세요? 보여주세요. 꺅!”
유아는 습관적으로 형진의 뺨에 난 상처를 살피려고 손을 뻗다가 갑자기 귀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형진은 당황한 유아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아예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지. 희망과 생명의 사제라고.”
“…”
유아는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후,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이긴 한데, 얘 데리고 다니려면 골치 깨나 썩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씨발! 다 죽었어! 너 병사 새끼! 이거 풀고 보자. 심심하면 내 뒤통수 때리던 거 배로 갚아 줄테니까. 그리고 너 씨발 미친년 너도 죽을 줄 알아. 동생들까지 싹 다 데리고 와서… 컥!”
죄수는 신이 나서 그렇게 떠들다가 내뻗은 형진의 발에 어떻게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는 중요한 부위를 채이고는 거품을 물고 쓰러져 버렸다.
“너… 하필 또 거길…”
일격에 죄수를 침묵시킨 형진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병사에게 말했다.
“정신 좀 차리죠?”
“네? 하지만…”
“에휴. 이렇게 답답해서야. 잠깐 있어 봐요.”
형진은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바라보니 한 무리의 도적들이 마차 앞을 가로막은 채 버티고 서 있다. 멍청한 놈들, 하다 못 해 통나무라도 잘라서 바리케이드 비슷한 거라도 만들었어야지. 하기야 저 죄수 놈의 동생들인데 오죽할까 싶지만.
그래도 일단 말은 한 번 들어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요구 조건이 뭐라고?”
그러자 작달막한 놈이 단검으로 손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대답했다.
“우리 형님을 순순히 내놔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마.”
“목숨만?”
형진이 되묻자 놈은 잠시 당황하더니 얼른 조건을 덧붙인다.
“음… 여기서 며칠이나 지키고 있었으니 수고비 정도는 받아야겠지.”
“그거면 돼?”
대수롭지 않은 듯한 형진의 대답에 놈은 잠시 옆에 선 놈들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다시 말했다.
“커흠. 여자도 있으면 한두 명 정도.”
“오호. 그리고?”
“에또… 그리고…”
아무래도 상상력의 한계였는지 더 이상은 우물쭈물거리며 답을 못한다.
아, 실망이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산적들이 이런 여물지도 못한 쭉정이라니.
“대충 무슨 얘긴지 알았다. 그럼 이번엔 이쪽의 요구 조건을 말해 주지.”
형진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꺼져라. 아그들아. 네 형님이란 놈의 눈코입팔다리를 하나씩 부위별로 선물 받고 싶지 않으면.”
순간 마차 안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형진과 얘기를 나누던 작달막한 놈과 그 동료들 역시 침묵에 잠겼다.
“지금… 뭐라고?”
아무래도 자기가 뭔가 잘못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작달막한 놈이 그렇게 되묻자 형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마차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병사를 향해 말했다.
“노역하는데 지장만 없으면 된다 그랬죠?”
“네, 뭐…”
“그럼 잠시 실례.”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는 죄수 놈의 머리채를 잡아 당겨 머리를 마차문 밖으로 내밀도록 만들고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그제서야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은 작달막한 놈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자, 잠깐! 무슨 짓을…”
“무슨 짓이긴, 말했잖아.”
형진은 단검으로 정신을 잃은 죄수 놈의 귀를 잘라낸 뒤, 그것을 작달막한 놈에게 던졌다. 역시 공포와 죽음. 이런 짓을 해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멋지지 않은가. 하기야 암살자가 이런 정도에 식겁하면 그것도 문제겠지만.
애초에 이건 갑과 을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얘기다. 놈들은 반드시 그들이 형이라고 부르는 이 죄수놈을 구해야 하지만, 문제의 죄수는 엄연히 우리들의 수중에 있다. 딱히 저쪽에 인질을 잡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포위가 되서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도 아니다. 도적들이 길을 막았다고는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즉, 주도권은 처음부터 우리쪽에서 잡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굳이 도적이라고 쫄 필요가 있을까? 인질까지 딱 잡고 있는 마당에.
도적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너무 상황을 상투적으로만 생각해서 유불리를 따지지 못하니 이런 상황에도 당황해 버리는 것이다. 낙인의 효과로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하고 침착한 사고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따지고 보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포와 죽음께 경의를.
“히익!”
갑자기 살아있는 사람의 귀가 날아들자, 작달막한 놈은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정신을 잃고 있다가 갑자기 귀가 잘린 죄수놈은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대다가 형진이 피 묻은 단검을 코앞에 내밀고 조용히 하라는 말 한 마디를 건네자 스스로 입을 막았다. 방금 전까지 좋다고 뻗대던 기세는 어디갔는지 이제는 눈물까지 그렁그렁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 이놈 이거 은근히 귀엽네.
“이제는 아까 내가 했던 얘기를 이해하겠지? 자, 그럼 길을 열어 주실까?”
“…”
도적들은 질린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더니 슬금슬금 물러나 길을 열었다.
형진은 말 잘 듣는 착한 산적 꿈나무들을 향해 씩 웃어 주고는 마차에 올라타며 마부에게 말했다.
“뭐해요? 안 가고.”
“아,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