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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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리칸
도적들이 길을 열어주자 마부들은 정신없이 마차를 몰아 그날 저녁이 되기 전에 그리칸에 도착했다. 형진의 기지로 위기를 돌파하기는 했어도, 언제 뒤쫓아 올지 몰라 겁이 난 것이다.
마부들은 그리칸의 성문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자신들이 겪었던 일들을 병사들에게 신고했고, 병사와 죄수 또한 그들의 신고를 뒷받침했다. 그 과정에서 몇몇 병사들이 다시 형진을 찾아와 대략의 자초지종을 듣고 갔는데, 아무래도 자신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유명인사가 아닌가 싶어 확인하는 느낌이 강했다. 물론 여기서 유명인사라는 건 좋은 쪽과 나쁜 쪽 모두에 해당하는 용어다.
“여러모로 고생하셨습니다. 덕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말씀드렸던 사례입니다.”
그렇게 좀 소란스러운 도착 과정을 거치고 나니, 역마차를 운행하는 업체의 점장이 아닐까 싶은 사람이 다가와 형진에게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슬쩍 무게를 가늠해 보자 꽤 묵직한 느낌이 전해진다. 예상보다 훨씬 더.
“뭐…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하.”
드러난 건 없지만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하기야 이런 거대한 도시를 맡고 있는 점장이라면 그 정도 사람 보는 눈은 있어야겠지. 큭큭큭.
이런 식이면 마차만 타고 다녀도 부자가 될 것 같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그런 식으로 여가를 보내는 것도 좋을 듯 싶고. 당장은 아직 먼 얘기겠지만 그런 기대를 가져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여하간 그렇게 수속을 마치고 나자 모처럼 일찍 도착했던 것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어차피 원래 도착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시간이 이쯤이니 크게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어디 보자…”
이래저래 시달려서 피곤하니 그냥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여 볼까. 아니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격언에 따라 후딱 할 일 마치고 편하게 쉬어 볼까.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유아가 자신을 봐달라는 듯이 형진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긴다.
“왜요?”
“저… 이만 신전에 가 봐도 될까요?”
“누구 맘대로?”
“네?”
어허, 이 처자 보소. 물에 빠진 걸 건져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는 못할망정 그대로 내빼려 하면 쓰나. 우리네 인심이 그렇게 따뜻한 게 아니라고.
땡전 한 푼 없이 일단 마차부터 타고보자 했을 때는 도착만 하면 비빌 언덕이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그런 단순한 사고조차 하지 않은 채 무작정 상경이라는 패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 여자는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잔말 말고 따라와요.”
“하지만…”
“아니면 그냥 몸으로 갚던가. 어디보자. 여관비에 식대에 수고비에, 이것만 봐도 알겠지만 내가 몸값이 좀 셉니다. 감당할 수 있겠어요?”
“…”
점장이 준 돈 주머니를 흔들어 보이며 말하자, 유아는 울상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지는 말고. 그렇지 않아도 내일쯤 신전에 한 번 들러볼 생각이니.”
“정말요?”
“물론.”
“…”
그제서야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다. 쯧쯧. 뭘 보고 사람 말을 그렇게 덜커덕 믿는 건지. 하룻밤이면 사람 인생 정도는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거늘.
어쨌거나 일단 가장 중요한 일부터 해결을 보기로 결정했다. 바로 이곳의 지부장을 만나 편지를 전하는 일이 그것이다.
봉투에 적힌 주소를 물어물어 가다보니 어느새 해가 완전히 꼴딱 져버린 뒤다. 넓기는 또 왜 그리 넓은지. 아란은 이곳을 작은 도시라고 했는데, 이 정도가 작은 거면 큰 도시는 도대체 얼마나 클까 싶기도 하다.
차이는 도시의 크기에만 머물지 않았다. 해가 지고 나면 조용해지던 마을들과는 달리, 이 도시는 가로등을 밝히고 일을 마친 사람들이 하루 일과를 마친 뒤의 여흥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하며 밤거리를 돌아다닌다. 여러모로 지금까지 거쳐 왔던 마을들과는 다른 모습이고, 어찌 보면 지구에서의 일들을 떠올리게도 만든다.
“여긴가.”
암살자 집단의 지부장이라면 보통 어둑한 골목 안에 위치한 허름한 술집 같은 곳에 숨겨진 비밀 장소에서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겠지만, 눈웃음 헤프고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것을 제외하고는 여느 이웃집 아줌마와 다를 바 없었던 아란처럼 이곳의 지점장 역시 겉으로 봐서는 암살자라는 느낌이 전혀 없는 그런 업종에 종사하고 있었다.
“옷가게에는… 왜요?”
의아함 반 기대 반. 혹시 자기 옷이라도 사주려고 그러는 건가 싶은 생각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이 여자, 도대체 언제 철들려고 이러나.
“글쎄요.”
건성으로 대답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촛불 아래서 신문 같은 것을 점잖게 읽고 있던 건장한 중년 남성 하나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물건이 있습니까?”
외알 안경을 걸치고, 카이저수염이라고 해야 할 듯한 콧수염을 그럴 듯 하게 기른 채 수트 같은 옷을 걸치고 있는 모습은, 옷가게 사장이라기보다는 부인의 옷을 살펴보기 위해 잠시 들른 귀족 같은 느낌에 가깝다.
“혹시 기젤 선트라는 분 계십니까.”
“제가 기젤 선트입니다만.”
“아, 본인이시군요. 이걸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
기젤은 형진이 건넨 봉투를 건네받고는 품위 있게 종이칼로 봉투를 열더니 그 안에 담겨 있는 편지를 읽었다.
“진님이시군요. 그리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런데 그쪽 분은?”
“오던 중에 알게 된 사이입니다. 앞으로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예정이죠.”
기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진님의 얘기를 전해 듣고 기다리던 참입니다.”
“그런가요.”
생각보다 정보가 빠른 모양이다. 물론 마차가 도착한지 제법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수속을 마치고 바로 이곳을 찾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곳 지부의 정보 체계가 보통은 넘어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좀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너무 눈에 띄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런 명예롭지 못한 자들을 가만히 두고 볼 필요는 없는 일이겠지만, 좀 더 조용하고 은밀한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 싶군요.”
아마도 도적들의 일을 말하는 모양이다.
형진은 가게에 걸려있는 옷을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유아를 슬쩍 살피고는 기젤의 말에 답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저희들은 단순한 암살자가 아닙니다. 공포와 죽음이라는 이름에 걸고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는 집행자들이지요. 임무의 성공이나 차후의 임무에 지장을 줄 만한 사안이 아닌 이상, 굳이 조용하고 은밀한 방법만을 우선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포와 죽음의 이름 앞에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야.”
기젤은 그제서야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자신의 일에 대해 명확한 신념을 가진 성도를 만나는 것은 오랜만의 일입니다. 다시 한 번 그리칸 지부에서 함께 하게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일단 면접은 그럭저럭 통과한 모양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
기젤은 정중한 태도로 양해를 구하고는 잠깐 안에 들어가더니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변변치 않은 것이지만, 이곳에 머무시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아니, 뭘 이런 걸 다.”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한 장의 편지와 열쇠, 그리고 주소와 약도로 보이는 쪽지 하나가 담겨 있었다.
“그럼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편히 쉬도록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상자를 인벤토리에 넣은 형진은 기젤과 인사를 나누고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멀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아를 데리고 옷가게를 빠져 나왔다.
돈 굳었다. 하룻밤 묶을 장소 정도는 제공해주지 않을까 하고 찾아간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아예 집 한 채를 통째로 건넬 줄이야. 집행자라는 집단, 알고 보니 꽤 부자였던 모양이다. 하기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고, 엘리시온으로 떠난 자들의 재산이나 임무 중 사망한 자들의 재산도 관리하고 있을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하지만 상황은 형진의 예상보다도 훨씬 대단했다.
“헐?”
그냥 그란웰에서 그랬던 것처럼 혼자 기거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그런 평범한 집인 줄 알았더니, 이게 웬 걸. 쪽지에 적힌 주소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제법 커다란 저택이었다.
형진은 급히 상자 안에 담겨져 있던 편지를 읽어 보았다.
-그란웰 측의 소개를 보니, 넓은 작업장이 필요할 거라 예상했습니다. 이 집은 2층 구조로 되어 있고, 지하에는 제법 커다란 지하실도 갖추고 있습니다. 진님께서 어떤 일에 매진하시든 간에 공간으로 인해 부족함을 느낄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본래는 귀족들의 살롱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나 저희들의 소유가 된 이후로는 딱히 용도를 정하기 힘들어서 관리에 곤란을 겪고 있던 참이니 부담을 가지실 필요도 없습니다. 원하는 대로 개조하여 사용하셔도 좋으나, 그리칸을 떠나실 경우 열쇠를 저에게 반납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분의 이름에 영광 있기를.
“헐!”
대박! 대박이다!
종교 단체들이 부자인 거야 이미 잘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이런 멀쩡한 저택을 이제 막 상경한 초짜 성도에게 내줄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 물론 일반적인 암살자들이라면 이런 거창한 집은 오히려 관리하기만 곤란한 거추장스러운 물건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저것 할 일이 많은 형진으로서는 필요에 따라 따로 작업장을 빌릴 생각까지 하고 있던 참이니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일이다.
면접을 좀 잘 본 느낌이긴 했다만, 그래도 이건 확실히 예상 밖의 일이다. 공포와 죽음 만세!
“여기가… 진님 집이에요?”
“네, 당분간은.”
“와… 우리 신전보다 더 커…”
“…”
앞의 말을 정정해야 할 것 같다. 종교 단체라고 다 부자인 건 아닌 모양이다. 하긴 돈 없어서 쫄쫄 굶을 때부터 알아보긴 했다만.
삐걱거리는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나름 손질을 하려고 하긴 했던 모양이지만, 역시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다보니 다소 황폐한 느낌이 전해진다. 작은 분수대도 있고, 대규모 파티는 무리여도 간단한 가든파티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듯한 규모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널따란 홀이 나타난다. 작은 규모의 댄스파티 정도는 충분히 벌일 수 있을 듯한 크기다. 북쪽 벽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좌우 교차하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고, 벽면에는 액자가 걸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국들이 몇몇 남아 있었다.
“우와아아…”
유아는 전혀 우아하지 못한 모습으로 입을 쩍 벌린 채 생전 처음 보는 저택의 모습에 넋이 나가 있었다.
“어디 보자…”
진은 우선 가구가 어느 정도 남아있는지 살폈다.
일층은 대부분 응접실이나 만찬장 같이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장소로 채워져 있었고, 2층에는 여러 개의 침실과 서재, 사무실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집 뒤에는 사용인들의 숙소나 창고, 마굿간 등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짐작되는 부속 건물들도 지어져 있었다.
지하실은 연무장으로 보이는 설비들이 놓여져 있었다. 체력 단련을 위한 도구들부터 시작해서, 작은 규모의 대련장에 이르기까지 수련을 위한 대부분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
집기나 가구들이 조금 낡은 느낌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비용을 들여서 꾸준하게 관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정도 규모의 저택이라면 관리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테니, 지부 입장에서는 쓸데없이 들어가는 관리비를 줄일 수 있으니 좋고, 형진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걸 마음껏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서 좋다. 누이좋고 매부좋고, 가재잡고 도랑치고, 어쨌거나 공포와 죽음 만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