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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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리칸
대충 집안을 둘러본 형진은 여전히 벙찐 표정을 지은 채 감히 안으로 들어올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홀만 기웃거리고 있는 유아를 불러 말했다.
“2층 방 중에서 대충 골라 봐요.”
“네?”
대화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아직 자신의 운명을 잘 이해하지 못한 모양. 물론 그런 순박하고 어린 양이 거친 현실을 자각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올바른 악당의 의무다.
“말 했잖아요. 오래 볼 사이가 될 거라고. 이곳에서 지내야 할 테니까 방 정도는 원하는 걸로 쓰게 해주겠습니다. 뭐해요? 어서 가서 고르지 않고.”
“어, 그게… 고맙습…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신전에 가야 하는…”
발은 형진의 말에 반응해서 이층으로 올라가려 하고, 머리는 그나마 뭔가 얘기가 이상하다는 걸 인지하고 되묻다보니 팔다리가 따로 노는 형국이다.
이 아가씨, 이거 컨셉인가.
“알았으니까. 신전 내일 간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우선 방부터 고르라고.”
“아, 알겠습니다.”
형진이 살짝 성질을 내려는 기색을 보이자 유아는 움찔하며 그제야 머리가 아닌 발의 판단을 따른다. 문어처럼 다리에도 사고 기능이 장착된 건가. 만약 그렇다면 형진은 지금 금세기 최고의 생물학적 발견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가장 좋은 방은 당연히 형진의 몫이다. 저녁 때까지 은은한 햇빛이 비쳐 들어오는 남서쪽 방향 모서리 전체를 스위트룸처럼 만들어 놓은 곳인데, 아마도 저택의 주인이 쓰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닐까 싶다. 서재와 응접실을 겸하는 공간 옆에 제법 널따란 침실과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실내 욕실마저 마련되어 있어서 형진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든다.
일단 자신이 쓸 방의 가구와 책장 등에 덮여져 있는 천을 벗겨내고, 조명을 밝히니 제법 분위기가 산다. 이런 집 한 채 사려면 돈은 얼마나 드는 걸까. 은화 몇 개로는 무리일 듯 하고, 최소 금화 단위로 계산되지 않을까. 그동안 임무를 열심히 해서 돈을 제법 많이 벌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집을 보니 역시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충 청소를 하고 나오는데, 복도 저편에서 꺄꺄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슬그머니 잠행을 써서 다가가자 침대를 마치 트램펄린 쓰듯이 방방 뛰며 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물론 제대로 된 매트리스도 아니고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냥 짚을 깐 침대와는 차원이 다른 푹신함에 감탄하는 정도가 아닐까.
“어떡해! 어떡해! 진짜 침대야! 진짜 침대라구!”
진짜 침대라는 용어도 아마 그런 것을 의미하는 모양이다. 아까 형진도 확인해 보니, 이곳의 침대는 푹신한 솜을 꽉꽉 채워 넣어 만든 두툼한 쿠션이 깔려 있다. 지푸라기를 채워 넣은 침대보다 훨씬 고급이지만, 그만큼 손이 많이 가는 물건이기도 하다.
층간 소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집이란 건 참 좋은 것 같다. 지구에서 저 난리를 쳤으면 바로 아랫집에서 쌍욕 하는 아저씨가 쳐들어 왔을 테니까.
“어흠.”
잠행을 풀고 문가에서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그 순간까지도 꺄꺄 거리며 침대 위에서 어린 아이처럼 놀고 있던 유아는 그제서야 형진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것을 마음 속 깊이 음미하며 즐기던 형진은 가벼운 코웃음과 함께 말을 건넸다.
“훗. 방 고르는 거 끝났으면 가서 밥이나 먹읍시다.”
“네…”
그제서야 이것이 현실임을 인식한 유아의 얼굴이 물감을 떨군 것처럼 확 붉어지는 모습에 다시 피식 웃으며 형진은 천천히 홀로 내려왔다. 모르긴 해도 저 여자, 오늘 자면서 이불을 좀 많이 걷어찰 것 같다.
잠시 홀에서 기다리자 나름 얼굴 표정을 수습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으로 유아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웃는 것도 아니고, 어쩐지 피카소의 우는 여자가 생각나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렇게 엉망이었던 표정도 거리로 나오자 다시 확 바뀐다. 여기저기 노점에서 파는 군것질거리부터 시작해서, 포장마차를 연상시키는 목로주점들도 가로등 아래에서 성업 중이다. 여기저기서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오니 먹방 꿈나무인 유아는 앞서의 일도 잊고 여기저기 힐끔 거리느라 정신 없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골라 봐요.”
“저, 정말요?”
“정말.”
“그, 그럼… 저거요.”
유아가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바로 양꼬치. 두 말 없이 가서 하나씩 집어 들었다.
끼니를 때울 음식 정도는 이미 인벤토리에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렇게 유아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 것은 나름 시장 조사를 위해서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음식이라든가, 흔히 쓰이는 향신료와 재료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취향 외에도 유아를 통해 이곳 사람들이 맛있다고 느끼는 부분을 캐치하기 위한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요리란 것도 어떻게 보면 문화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캐비어나 송로버섯 같은 식재료의 경우부터 시작해서 하다못해 지금 둘이 먹고 있는 양꼬치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다르면 저마다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곳의 양꼬치는 나름 정석대로 잘 굽긴 했는데 좀 퍽퍽한 느낌이다. 너무 살코기만 들어간 느낌. 삼겹살에 비계는 없고 살코기만 채워져 있는 느낌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유아는 그야말로 게눈 감추듯이 순식간에 꼬치 하나를 뚝딱 먹어치운 뒤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기는 한데, 햄 샌드위치를 먹었을 때처럼 사방에 별사탕이 반짝이는 것이 착시로 보일 정도로 감동하는 기색은 아니다.
“맛있어요?”
“네!”
마치 눈동자에서 ‘하나 더!’ 라는 글자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형진은 그런 유아를 향해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다른 데로 가봅시다.”
“네? 어? 어? 아니, 그게…”
당황한 유아는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어차피 이 거리 유람에 있어 전권을 쥐고 있는 것은 형진이다. 그녀는 그저 사주면 먹고 그 맛을 표정으로 표현하면 그뿐.
어쨌든 그런 식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이것 저것 주워 먹고 보니, 제 아무리 먹방 꿈나무인 유아도 어느 순간부터는 힘겨워 하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었던 건 뭐죠?”
“어… 음… 그러니까… 참새구이요.”
“…”
의외다. 참새는 워낙 먹을 것이 적어서 머리까지 함께 구워져 나오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은 질색을 하는 경우도 태반인데, 이 여자에겐 그런 식의 혐오감 같은 건 아예 사전에도 없는 모양이다.
“징그럽지 않았어요?”
“아뇨? 먹는 거 가지고 투정하면 안 돼요. 다 소중한 생명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
그렇군. 종교적인 문제를 미처 생각 못했다. 그녀의 경우엔 단지 가난이 몸에 배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희망과 생명 신도들이 음식 재료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건 중요한 정보인 듯 싶다.
집으로 돌아온 형진은 지하의 연무장에서 간단하게 매크로 수련을 해봤다. 소감은 그리 나쁘지 않은 느낌. 적어도 외부의 시선을 염려할 필요 없이 자기가 원하는 수련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장점이지만, 반대로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바깥의 사정을 알 방법이 없다는 점은 단점이라 할 수 있다.
수련을 마치고 나왔을 때, 유아는 이미 자기 방에서 무방비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어제처럼 강제로 홀딱 벗겨진 상태는 아니지만, 누가 언제 덮쳐올지도 모르는 상황임에도 속옷만 입고 푹신한 쿠션을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자니 참 앞날이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기야 형진이 같은 마차에 타고 있지 않았다면 제대로 살아서 도착이나 했을지 의심스러운 판국이니, 그렇게 보면 확실히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간단하게 아침 수련을 끝내고 개인 욕실에 물을 가져다 기분 좋게 샤워까지 마치고 나자, 그제서야 잠에서 깼는지 유아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후아암… 안녕하세요.”
그래도 인사를 할 정신은 있는 모양이다.
“얼른 씻어요. 아침 먹고 바로 신전에 갈 테니.”
“시, 신전이요?”
어제는 어서 신전에 가야 한다면서 그렇게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이제는 또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역시 사람 생각 바뀌는 건 순식간이다. 물론 그것은 처음부터 형진의 계획대로이기도 했다. 푹신한 침대, 안락하고 멋들어진 저택, 그리고 맛있는 식사. 딱 봐도 가난에 찌들어 있던 신전 생활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윤택한 상류층 생활의 맛을 봤으니, 신전에 돌아가자는 얘기에 망설이는 기색이 엿보이는 건 차라리 당연한 일이다.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는 식의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기업들이 미쳤다고 행사로 반값 세일 하면서 신제품 홍보를 하겠는가.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왜요? 가기 싫어요?”
이미 속을 다 들여다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능청스럽게 그렇게 한 마디 건네자, 유아는 화들짝 놀래며 손사래를 친다.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바로 준비할게요.”
후다닥 움직이며 씻는다 뭐한다 부산을 떠는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아가씨, 걱정할 필요 없다오. 어차피 당신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으니까.
어제 저녁에 따로 챙겨둔 음식으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두 사람은 곧바로 그리칸 외곽에 위치한 희망과 생명 신전으로 향했다.
호구신으로 이름이 높긴 하지만, 이름처럼 출산이나 기타 여러 가지 실생활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신전이다 보니 생각보다 아침부터 참배객들이 꽤 많다.
“뭐해요? 앞장 서지 않고.”
“네…”
어쩐지 조금 풀이 죽기도 하고 서운한 기색도 보이면서 유아는 터덜터덜 형진을 데리고 신전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 안델에서 온 유아라고 합니다. 고사제님을 뵐 수 있을까요.”
“아, 자매님. 그렇지 않아도 오실 때가 되었다 싶어서 기다리고 있던 참입니다.”
참배객들을 안내하고 있던 나이 지긋한 여성 사제가 유아의 인사에 반색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유아의 뒤에 버티고 선 형진의 존재를 깨닫고는 얼른 분위기를 살핀다.
“저… 그런데 이 분은?”
“이번 여정 중에 제게 큰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자매님께 도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그저 인간으로서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태연하게 그렇게 말을 받은 형진은 유아를 따라서 고사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고사제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무언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류를 뒤적이고 있다가 둘을 맞이했다.
후덕한 인상의 인심 좋은 할머니를 연상시키는 모습의 고사제는 두 사람을 자리에 앉히고는 먼저 유아에게 물었다.
“어서 오세요. 안델에서 오셨다고요?”
“네. 고사제님.”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늦어지는 듯 해서 걱정하던 참입니다. 이렇게 무사히 도착하셨으니 모두 여신님의 은총 덕분인 듯 합니다.”
“저 역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유아와 그렇게 인사를 나눈 고사제는 이번에는 형진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이쪽은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군요.”
“이 분은 이번 여정 중에…”
유아는 앞서 다른 사제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녹음기처럼 읊어 대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형진이 끼어들었다.
“제가 바로 그 여신님의 은총입니다.”
“…”
유아는 잠시 말문이 막힌 채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그래도 나름 이런 저런 경험이 많은 고사제는 말없이 형진의 눈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신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형진은 어려울 것 없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유아라는 이름의 이 견습 사제분이 이곳에 무사히 도착하게 된 것은 오로지 제 덕분이라는 얘깁니다.”
“…”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신다면 그리할 용의도 있습니다.”
형진의 말에 고사제는 패닉에 빠지기 시작한 유아를 흘깃 보고는 짧게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그럼 설명 드리겠습니다.”
형진은 자신이 어떻게 유아를 만나게 되었는지, 또한 어떻게 그녀의 생명을 구해 이곳까지 함께 하게 되었는지 매우 객관적인 시각으로 작은 사건 하나 빠짐없이 전부 설명했다. 이를테면, 홀딱 벗은 채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던 유아가 아침에 일어나고 보니 자신의 가슴팍에 기대 흘린 침으로 가슴팍이 흠뻑 젖었다는 식의 얘기까지 전부.
“치, 침 아니거든요? 그냥 눈물이 좀 났던 것 뿐이거든요?”
“유아씨 눈물은 끈적거리나 보군요. 심각한 병일지도 모르니 연구 좀 해봐도 되겠습니까?”
“…”
다른 것에 대해서는 부정할 엄두도 못 내면서 그건 억울했던 모양이다. 그나마도 형진의 반론에 금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지만.
“후…”
고사제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쓴웃음을 지은 채 유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분과 긴히 얘기를 나눠야 할 것 같으니, 자매님께서는 잠시 나가계시겠습니까?”
“네? 하지만…”
“어서요.”
“…”
단호한 말에 반론을 꺼낼 엄두도 못 내고 깨갱하며 유아가 밖으로 나가자, 고사제는 지그시 형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이제야 제대로 협상의 장이 열렸다는 생각에, 형진은 자신을 심유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고사제를 향해 씩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