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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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리칸
형진은 일단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다른 얘기를 꺼냈다.
“오면서 좀 살펴 봤습니다만, 참배객들이 참 많더군요.”
고사제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단순히 사례를 원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굳이 그런 얘기를 먼저 꺼내는 저의가 뭔가 하는 기색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런 참배객들보다 아이들의 숫자가 더 많은 듯 보이는 점입니다.”
그렇다. 형진이 꺼내려는 얘기는 바로 이것이었다.
희망과 생명은 호구신으로 이름이 높다. 게다가 생명을 귀히 여기기까지 한다. 상황이 이러니, 온 동네의 고아부터 시작해서 아예 사정이 좋지 않은 집에서는 자기 아이들을 죄다 키워달라고 맡겨 버리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적당히 좀 거절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호구신이라는 이름처럼 모조리 맡아버리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유아가 그렇게 가난이 뼛속 깊이 박힌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고나 할까. 아무리 성능 좋은 포션을 생산할 수 있으면 뭐하나. 먹이고 입혀야 하는 입들이 워낙 많으니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붓기다.
아이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워낙 호구신으로 정평이 높다 보니 뭔 일만 있으면 손을 벌리는 인간들은 또 왜 그리 많은지. 사실 두 사람이 방문하기 전까지 고사제가 인상 쓰며 바라보고 있었던 것도 이번 달에 나갈 돈을 정리해 둔 서류였다.
고사제는 말없이 자신의 눈앞에서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매님은 안 됩니다.”
아직 본론도 얘기하지 않았는데 대번에 거절 의사가 나왔다. 하지만 이것도 형진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포션 때문이죠?”
“…”
그렇다. 고사제가 바로 안 된다고 거절 의사를 보인 이유는 바로 이 신전의 주 수입원인 포션 생산과 관련이 있었다.
형진은 어째서 유아가 그렇게 굶어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빈털터리에 가까운 상태로 호위 하나 없이 급하게 이 곳을 찾아야만 했을까 하는 점에 의문을 품었다. 해답은 간단했다. 형진이 처음부터 눈독을 들였던 포션. 바로 그것이 처음부터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였던 것이다.
유아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급하게 지방의 신전에서 이런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를 불러올려야 할 정도라면 신전의 사정이 매우 급하다는 것 정도는 바로 추측할 수 있다.
“알고 계시다면 얘기가 빠르겠군요. 그렇습니다. 지금 저희들의 사정이 여의치 못한 관계로…”
고사제는 그렇게 길게 말을 시작했지만, 형진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중단시키고는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아까 분명히 말씀드렸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무슨…”
“제가 바로 여신님의 은총이라고 말이죠.”
“…”
고사제의 눈이 살짝 찌푸려진다. 아무리 그래도 고귀한 여신의 은총에 빗대 자신을 표현하다니, 처음 한 번은 그냥 농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지만 두 번이나 반복되자 어지간한 일에는 쉽게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녀로서도 언짢은 기색을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형진은 상대가 그러거나 말거나 웃는 얼굴로 다시 말했다.
“유아씨가 이곳에서 일하면 한 달에 얼마나 되는 수입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까?”
이건 의외로 민감한 문제인지라 고사제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미 알아볼 만큼 다 알아봤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형진의 모습에 마지못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에데루스 은화로 열 닢 정도는 무난하게 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세!
형진은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역시나 유아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맞았다. 한 달에 은화 열 닢이라니. 게다가 희망과 생명이 얼마나 호구스러운 집단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한 달에 열 닢의 은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인재를 그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움직이게 하다니, 제정신이란 말인가!
물론 이 은화 열 닢이라는 말은 상당히 과장된 측면이 있었다. 그야말로 잠도 재우지 않고 하루 종일 풀로 포션만 만들게 해도 벌 수 있을까 말까 한 금액이었고, 고사제도 상대의 의도를 눈치 채고 좀 부풀린 감이 있었다.
하지만 설령 그러하다 해도, 형진에겐 큰 문제가 아니다. 이미 그에게는 열 배 스무 배로 벌어들일 수 있는 복안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스무 닢. 어떻습니까.”
“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론 숙식도 제공하고, 업무상 필요한 의복은 물론, 기타 필수품 역시 무상으로 제공하겠습니다. 그런 자질구레한 부분을 제하고, 오로지 신전에 납입할 금액으로 한 달에 스무 닢. 어떻습니까.”
고사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리다가, 날카로운 눈빛을 형진에게 던지며 말했다.
“여신의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계약서를 씁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유아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이것도 희망과 생명의 뜻 아니겠는가. 실로 여신의 은총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고작 은화 열닢의 차액에 너무 쉽게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겨율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 그 정도의 금액이면 얼마나 많은 생명을 보살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좀 더 팅겨 볼까도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괜히 팅겼다가 그냥 가버리기라도 하면 큰 일이라는 생각에 고사제는 눈앞에 드리워진 먹음직한 미끼를 덜컥 물어버렸다. 역시 호구신의 고사제 답다.
물론 형진은 그와 같은 고사제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그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이로써 본인을 쏙 빼놓은 채, 유아의 노동력 갈취를 위한 계약이 성사되었다.
“좋은 계약, 감사합니다.”
“저야 말로, 이와 같은 은혜로운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어차피 그런 식으로 밤을 보냈다면 이미 남이 아니다. 희망과 생명은 딱히 결혼을 반대하는 입장도 아니고, 자기 할 일만 제대로 한다면 사제가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는 일을 오히려 장려하고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유아가 이 능력 있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청년을 콱 물어서 신의 의지를 설파할 훌륭한 신도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면, 그건 실로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사제는 미처 몰랐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청년이라고 생각한 이 사람이 설마 공포와 죽음의 성도일 줄이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어, 어떻게 됐어요?”
고사제의 사무실을 나오자 유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다.
“잘 처리됐습니다.”
“그럼…”
“당신은 이제 내겁니다. 고사제도 명확하게 인정하신 일이니, 이제부터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
적나라한 형진의 말에 유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뭔가 엄청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제대로 머리에 입력이 안 된다.
“그게… 무슨…”
그런 유아에게 형진은 그녀가 처한 현실을 명확하게 간결하게 설명했다.
“당신을 샀다는 뜻입니다. 이 신전으로부터. 이것은 바로 그 내용이 적힌 계약서이지요.”
“네?”
물론 그건 어찌 보면 상당히 과장된 말이다. 정확히 그 계약서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유아의 근로 계약에 관한 것일 뿐, 노예 계약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용이야 어찌 되었든 신전이 사실상 한 달에 은화 스무 닢의 댓가를 받고 그녀를 팔아 넘겼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뭔가 심각한 얘기가 오갈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것이 금전과 관련된 것이라는 것도 나름 추측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얘기일 줄이야!
“그, 그럴 수가.”
머리를 커다란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에 잠시 생각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형진은 유아가 혼란과 충격에서 스스로 빠져 나올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그럴 수가고 저럴 수가고 간에, 이제 다음 장소로 갑시다.”
“다음 장소… 라뇨?”
“제대로 일을 하려면 그에 걸맞은 옷차림을 할 필요가 있겠지요. 마침 좋은 옷가게를 알고 있으니 그곳에 가서 메이드복부터 맞춥시다. 뭐합니까? 안 따라오고.”
“아니, 그게, 그러니까…”
본능적으로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에 유아는 다른 사제들을 보고 도움을 원하는 눈길을 보냈으나, 이미 한창 나이 때를 벗어난 사제들은 그렇게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유아를 향해 손을 흔들며 축복을 보냈다.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세요.”
“제때 좋은 남자를 잡는 것도 여신의 축복입니다.”
“어서 아이부터 낳으세요. 생활력 좋은 남자는 먼저 잡는 게 장땡입니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힘내세요.”
그리고 사무실에 있던 고사제가 나타나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이 아름다운 한 쌍에게 여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컥!”
느닷없이 신혼부부에게나 던지는 축원을 얻어맞은 유아는 그대로 그로기 상태가 되어 버렸고, 형진의 손에 속절없이 이끌려 신전을 빠져 나와야만 했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아무리 그래도 신전이 날 팔아넘길 리가…”
형진은 이제 현실 부정의 단계로 접어들기 시작한 유아를 데리고 앞서 언급했던 대로 지부장의 옷가게를 찾았다.
“어제는 편히 쉬셨습니까.”
“네. 훌륭한 집을 빌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간단하게 지부장과 인사를 나눈 형진은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메이드복이 필요합니다. 이 여자가 입을 걸로. 예비까지 합쳐서 세 벌.”
“스타일은?”
“눈이 즐거우면 좋겠습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부장은 허공에 대고 가볍게 손뼉을 쳤고, 이내 보조로 보이는 여자 세 명이 나타나서 유아를 끌고 들어간다.
“아, 그런데 주의해야 할 점이.”
“말씀하십시오.”
“저 여자, 희망과 생명의 사제입니다. 손등에 낙인이 있으니 혹시 방금 전 분들 중에 형제가 있다면 발각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지부장의 눈빛이 문득 예리하게 빛난다.
“호구신의 사제라. 재미있는 먹이를 물어 오셨군요.”
“먼저 줍는 것이 임자 아니겠습니까?”
“훌륭합니다.”
형진의 반응에 지부장은 씩 웃고는 다시 말했다.
“낙인의 문제는 괜찮습니다. 방금 전의 여급들 가운데 집행자는 없으니까요.”
“아, 그랬군요. 낙인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드러나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는 경우가 있어서 혹시나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현명하십니다.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문제가 생기거나 하면 그것도 골치 아픈 일이니까요. 혹시나 그녀와 접촉할 가능성이 있는 집행자들에게 이 사실을 확실히 주지시키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렇게 지부장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안쪽에서 비명이 들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넋이 나가 있던 유아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다. 하지만 지부장도 형진도 그러거나 말거나 느긋하게 대화를 이어간다.
“마침 좋은 차가 들어왔습니다. 한 잔 드시겠습니까?”
“그거 잘 됐군요. 마침 저에겐 차에 곁들이기 좋은 쿠키가 있습니다. 그란웰의 지부장님 솜씨인데, 한 번 맛을 보시면 잊지 못하실 겁니다.”
“그란웰 지부장님의 요리 솜씨는 정평이 자자하지요. 그 맛을 경험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니,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그렇게 두 남자가 느긋하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티타임을 즐기고 있자니, 안에서 유아가 여급들에 의해 끌려나왔다.
“…”
생전 처음 입어본 메이드복으로 인해 유아의 얼굴을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마도 미리 준비된 샘플을 입었는지, 여기저기 가봉 핀이 꽂혀 있다.
“역시 가슴이 너무 작군요. 적당히 보정할 수 있는 수단이 없겠습니까?”
몸매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역시 가슴이 문제다.
“어느 정도를 원하십니까.”
“적어도 볼륨감이 느껴질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지부장과 형진의 대화를 들은 여급들은 다시 유아를 안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잠시 후 다시 데리고 나왔다. 어떻게 했는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가슴골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훌륭합니다.”
“만족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이 정도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겠군요. 대단합니다.”
“과찬이십니다.”
형진은 울먹이고 있는 유아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다시 말했다.
“입고 싶은 옷이 있다면 한 벌 정도는 더 주문해도 돼.”
지금까지와는 달리 자신에 대한 말투가 반말로 은근슬쩍 바뀌었지만, 유아는 그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눈이 동그래졌다.
“저, 정말요?”
“물론.”
방금 전까지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절망에 빠져 있던 표정이 순식간에 기쁨으로 바뀐다.
쯧쯧, 그까짓 옷이 뭐라고.
하지만 형진이 자신을 딱한 눈으로 보건 말건, 유아는 어제 왔을 때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던 이브닝 드레스를 골랐다. 그렇게 물욕에 빠지면 빠질수록, 형진이라는 이름의 수렁 속에 더욱더 깊이 빠져든다는 사실을 꿈에도 깨닫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