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28
328====================
69. 대격변
방향치 하나가 망망대해에서 헤매고 있는 건 그렇다 치고.
형진은 정오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에 마침내 목표로 하던 희귀 아이템 일만 개를 채울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두 분이 도와주신 덕분에 빨리 끝낼 수 있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수고… 하셨어요.”
같은 말을 동시에 했는데도 느낌이 사뭇 다르다. 형진은 흠뻑 땀에 젖은 여신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얼핏 생각하기엔 하엘의 등에 가만히 타고 있기만 하면 될 것 같으니 별 것 아닐 것 같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미친 듯이 질주해 가며 몹을 잡는 형진의 뒤를 따라 다니며 떨어지는 룻을 빠르게 집어 배낭에 넣어야 한다.
그나마 형진의 사냥 속도에 익숙해지나 싶었는데, 꽃과 바람이 참가하면서 더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하니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흘러내린 땀을 닦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까.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두 분이 아니었다면 훨씬 오래 걸렸을 겁니다.”
“헤헤.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요.”
“저도요.”
어쨌든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는 대미궁으로 돌아가 공포와 죽음이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건지 살펴봐야 한다. 물론 그 전에 구매를 걸어놨던 사념체들을 거래소에서 회수해 와야겠지만.
형진과 두 여신은 인던에서 나와 일단 길드성으로 향했다. 길드성의 시설을 이용해 땀도 씻어 내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도 만날 생각이다.
[지금 돌아가려고 합니다. 어디에 계신지?]형진이 귓말이 보내자 바로 수빈의 답이 돌아온다.
알아서 식순이 역할을 마다하지 않다니. 의외로 눈치가 빠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형진은 여신들과 함께 길드성으로 들어갔다.
“삼층에 객실이 있습니다. 아무데나 원하시는 방을 쓰시면 됩니다. 다 씻으신 다음에는 식당으로 내려오시면 되고요.”
“넵! 금방 끝내고 내려올게요!”
보호와 균형이 꽃과 바람을 데리고 후다닥 위층으로 올라가자, 형진은 조금 느긋한 걸음으로 올라가 빈 객실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내려왔다. 길드 하우스에 이런 시설이 있어도 실제로 사용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지만, 형진에게는 문자 그대로 또 다른 현실이나 다름없으니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물론 운영자들이 훔쳐볼 위험성은 있지만, 그거야 이미 누구 때문에 만성이 되어서 별로 걱정이 되지도 않는다.
[흥.]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욕실에서 나오는데 문득 어딘가에서 또다시 콧방귀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안 본다는 얘기는 없는 건가. 솔직히 말하자면 혹시나 하고 기대했는데.
어쨌거나 그렇게 몸을 씻고 식당으로 내려가자 어느새 몸을 씻고 내려온 두 여신들이 테이블 위에 앉아서 무언가를 맛있게 먹고 있다가 화들짝 놀란다.
“어, 어서 오세요. 아하하… 그냥… 맛을 좀 본다는 게…”
“흠흠…”
보호와 균형이 어설픈 변명을 하는 동안 꽃과 바람은 모른 척 냅킨으로 얼른 입을 닦는다. 뭐랄까. 확실히 저런 걸 보니 친한 사이가 맞긴 한 모양이다. 성격도 모습도 달라서 정말 친하긴 한 걸까 싶었는데.
수빈과 그녀의 친구라는 여성은 어째서인지 긴장한 표정으로 부동자세를 취한 채 여신들의 앞에 서있었다.
형진은 여신들에게 괜찮다는 표정으로 가볍게 웃어 보인다음, 마치 사단장한테 내무사열이라도 받는 신병처럼 잔뜩 굳어있는 수빈과 그녀의 친구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쪽이 수빈님의 친구분이신가요?”
“네. 인사드려. 아까 말한 진님이셔.”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민승희이고, 캐릭명은 ‘새발자전거로D’입니다!”
“…”
뭔가를 패러디한 캐릭명 같기는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반갑습니다. 요리 장인이시라고요?”
“넵!”
“장인 찍는 게 만만치 않으셨을 텐데 대단하군요.”
“벼, 별 말씀을요.”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수빈님의 친구라면 저에게도 친구니까.”
어떻게 보면 의례적인 말. 하지만 승희는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눈빛을 빛내더니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여신님의 추종자가 되고 싶어요! 제발 받아주세요!”
“풉!”
“쿨럭! 쿨럭!”
그새를 못 참고 요리를 맛보고 있던 두 여신이 동시에 사래가 들려 쿨럭거리기 시작한다. 솔직히 말해서 형진도 놀랐다. 수빈이 적당히 바람을 잡았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게 다짜고짜 직구를 던질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탓이다.
형진이 말없이 수빈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얘가 워낙 성격이 급해서…”
“그건 딱히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두 분 여신님들께서는 그렇지 않아도 추종자를 찾는 중이셨으니까요. 다만… 두 분 가운데 어떤 분의 추종자가 되는 것이 좋을까 하는 점인데.”
“아…”
그러자 콜록거리고 있던 두 여신의 눈동자에서 빛이 확 하고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형진이 있어서 차마 앞으로 나서지는 못하면서도, 새로운 추종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두 여신의 모습에 형진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아야만 했다.
“일단… 간단하게 소개를 드리자면, 이쪽에 계신 분이 보호와 균형이십니다.”
“반갑습니다!”
“보시다시피 상당히 활기차고 귀여우신 분이십니다. 지니고 계신 권능은 이름대로 보호와 균형. 보호는 다치지 않도록 막아주는 힘이고, 균형은 항상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도움을 주는 힘입니다.”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번에는 옆에서 조금 초조한 기색을 보이는 꽃과 바람을 소개했다.
“이쪽에 계신 분은 꽃과 바람이십니다.”
“안녕… 하세요…”
“보시다시피 조금 말수가 적으시지만 누구보다 아름다우신 분이기도 합니다. 지니고 계신 힘은 역시 이름대로 꽃의 권능과 바람의 권능입니다. 꽃의 권능은 만물에 내재된 향기를 일깨워 그 아름다움을 드러나게 만드는 힘이고, 바람의 권능은 그렇게 일깨운 향기를 세상에 퍼뜨리는 힘입니다. 만약 승희님께서 추종자가 되고자 하신다면…”
아무래도 너무 성격이 급한 것 같아서 집행자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그렇다고 수호자나 호구 사제에 어울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간략하게나마 두 여신에 대한 소개를 한 다음, 얘기를 나눠보도록 해놓고 잠시 거래소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승희는 손을 번쩍 들고는 이렇게 외쳤다.
“결정했어요!”
“벌써요?”
“네! 소개를 듣는 순간 딱 감이 왔어요.”
“그래요? 승희님께서는 그럼 어떤 분의 추중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순간 두 여신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대로라면 추종자란 신이 선택하는 법이지만, 불행히도 이 두 여신은 그렇게 배부른 짓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그러니 이렇게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눈앞의 단발머리 소녀의 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승희는 그런 두 여신을 바라보며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저는 보호와 균형님의 추종자가 되겠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네! 저는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아요. 그게 이유입니다!”
참으로 단순 명쾌한 이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쉽게 납득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고.
꽃과 바람은 살짝 실망하는 기색이었지만, 이내 보호와 균형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해.”
“미안.”
“얘는. 그런 말 하지마.”
“그래도.”
보호와 균형은 새로운 추종자에게 선택 받았다는 것에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차마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다가, 형진의 눈짓을 보고서야 뽀르르 허공을 날아와 승희에게 다가섰다.
“저를 선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손을 내주시겠어요.”
“여기요.”
보호와 균형은 승희가 내민 손으로 다가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곳에 낙인이 새겨지면서 민승희는 보호와 균형의 새로운 추종자로 인정 받게 되었다.
“팬클럽?”
“제 추종자를 부르는 이름이에요. 그걸 실행하면 언제든 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필요할 때는 언제든 불러주세요.”“네!”
형진은 일사천리로 진행된 의식을 지켜보면서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일이 진행된 것 같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괜히 이것저것 번거롭게 설명하고 그러는 일이 줄어서 편하다는 느낌도 든다.
“일단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누고 계십시오. 저는 잠시 다녀와야 할 곳이 있어서.”
“네. 다녀오세요.”
“감사합니다!”
형진은 그들을 남겨둔 채 급히 거래소에 가서 구매를 걸어둔 사악한 기운을 거둬들였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예상보다 너무 빨리 희귀 아이템 일만 개를 채우는 바람에, 구매된 사악한 기운의 수가 모자라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곤란한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거래소를 살피던 형진은 문득 사악한 기운과 비슷한 종류의 인챈트 아이템을 발견했다.
“아하… 이것만 있었던 것이 아니군.”
엘리시오에는 수많은 인던이 있고, 그 인던에서는 저마다 다른 형태의 아이템을 드랍한다. 이름과 형태는 조금씩 다르더라도 사악한 기운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아이템은 얼마든지 있다고나 할까. 그 중에는 사악한 기운처럼 큰 효과가 없는 것부터 시작해서, 제법 좋은 효과를 가지고 있어서 나름 고가로 거래되는 종류의 것도 있었다.
형진은 그런 인챈트 아이템들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인챈트 아이템을 거덜내 버리자 십만 개의 사념체를 모으는 일은 금새 끝이 나버리고 말았다.
이제 인챈트 아이템까지 전부 사 모았으니, 잠시 엘리시온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형진은 길챗을 통해 그 사실을 모두에게 알렸다.
[잠시 이곳에서 나가야 할 것 같으니, 모두 길드성으로 모이도록. 아, 수빈님은 예외입니다.] [네.] [그렇지 않아도 배고프던 참이었어요.] [금방 갈게요!]형진은 길챗을 날리기가 무섭게 길드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시내 구경을 나갔던 카트린 일행이 길드성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수빈님. 승희님. 일이 생겨서 잠시 나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금방 올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저기, 잠시만요.”
“네, 말씀하십시오. 승희님.”
승희는 잠시 주저하다가 이렇게 물었다.
“저… 이 길드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형진은 그 말에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걸 원하시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째서요?”
“길드를 만든 건, 그저 서로 다른 신을 모시는 이들이 보다 쉽게 소통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취지에서였습니다. 길드챗 같은 것도 있고 이런 길드성도 있고 하니까.”
“아하…”
“그러니 지금의 길드가 더 좋다면 굳이 길드 가입까지 강제할 생각은 없습니다. 승희님께서 편한대로 선택하시면 됩니다.”
승희는 형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이렇게 대답했다.
“결정했어요. 가입할게요.”
뭐랄까. 아까도 그랬지만, 뭔가 시원시원한 느낌이다. 결단이 빠르다고 해야 하나.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나갔다가 돌아온 뒤에 가입시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미리 인사라든가 필요한 일을 마무리 지어 주십시오.”
“네.”
“그럼 이만.”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마침내 로그아웃을 했다. 그러자 곧바로 대미궁 지하의 접속 대기실로 돌아왔다.
“일단 식사들 하고 있어. 나는 가서 공포와 죽음께서 시킨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니까.”
“네!”
형진은 인벤토리에서 도시락을 꺼내준 뒤, 접속 대기실 위에 자리잡은 대미궁의 중심 코어로 향했다.
요정의 문을 통해 중심 코어에 도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 하나가 들려온다.
[지정된 장소에 코어를 배치해라.] “네네. 받들어 모시겠습니다.”[대답은 한번만.] “넵.”
형진은 곧바로 아이템과 사념체를 조합해 코어를 만든 다음, 공포와 죽음이 화살표로 지정한 장소에 그것을 하나씩 설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뭐라해도 일만 개나 되는 코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