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29
329====================
69. 대격변
마치 모심기를 하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실제로 모를 심어봤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느낌상으로는 그렇다.
어떻게 된 것이 희귀급 아이템 일만 개를 모으는 것보다 코어로 만들어 설치하는 작업이 더 어려운 것 같다. 단조롭고 지루한 작업이라서 그런지도.
“끄응차! 어으으으으으…”
몸을 굽히고 계속해서 코어를 심는 작업을 계속하다가 허리를 펴는 순간 뻐근한 통증이 전해진다. 이러다가 허리 작살 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가뜩이나 책임질 마눌도 많은 판에.
[시끄러.]그렇게 속으로 꿍얼거리며 모심기, 아니 코어심기를 계속하자 참다못한 공포와 죽음께서 드디어 한 마디를 건넨다. 이렇게 대답을 듣기가 어려워서야. 어떤 신은 하루종일 신도들의 말 한 마디에도 열심히 대답을 해주던데. 추종자도 아니고 신도들 말이다.
[흥.]오오. 다시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봐야 콧방귀 한 번이지만.
어쨌든 누군가 대답해 주는 사람이라도 있으니 지루함이 조금은 줄어드는 것 같다. 미엘이라도 답을 해주면 모르겠으나, 요새는 정말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잠에서 깰 생각조차 않는다. 슬슬 아이가 태어날 시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예전에 들은 바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아이가 태어나는 데는 한 사람의 일생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었으니 괜한 기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멍청한 놈.]에? 어째서? 왜 갑자기 제가 멍청한 놈이라는 얘기를 들어야 하는 겁니까? 이렇게 일 잘하고 똑똑한 집행자가 또 어디 있다고?
[아직 눈치 못 챈 거냐?] “네?”그렇게 꿍얼대도 콧방귀만 뀌던 양반이 갑자기 또박또박 대꾸를 해준다.
[알려줄까. 말까.]심지어 이렇게 놀려대기까지.
“자, 잠깐만요. 제가 뭘 눈치 못 챘다는 거죠?”
[어허, 손이 쉬는구나.]
“으으으…”
된장. 이런 악덕 사업주 같으니. 뭔가를 알고 있으면 제때 제때 말을 해줘야지. 이렇게 사람 애간장을 녹이면 재미있습니까?
[응.] “…”궁금하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다. 분명히 아기에 대한 일인 것 같은데, 혹시 미엘이 어디 잘못 되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만약 그런 거라면 이렇게 놀려대거나 할 분은 아니니까. 그럼 얼마 안 있어서 아기가 태어난다는 얘긴가. 으아아아아! 궁금해 미치겠다.
“저기… 그냥 알려주시면 안 되나요?”
[코어 다 설치하면.]
“아니, 그러니까… 자비로우신 신이시니까 살짝 언질이라도.”
[안 돼.]
“어째서요?”
[악덕 사업주니까.]
“컥.”
아니 거기서 그 말이 또 왜.
적어도 그리칸에서 자리를 잡은 이후로 누구한테 말발이 딸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아주 된통 걸리고 말았다. 큭. 역시 하늘 위의 하늘이란 말인가.
하지만 일단 언질은 떨어졌다. 적어도 다 설치하면 알려주겠다고. 그렇다면 이까짓 코어 설치 후딱 끝내버리면 될 일이다.
“우오오오오!”
아이템 장착! 도핑용 요리 섭취! 그리고 라이언하트 발동!
그 세 가지가 모두 갖추어지자 형진은 불타는 듯한 모습으로 최적화된 경로와 움직임에 따라 코어의 설치를 시작했다. 아까까지의 모습이 허리 구부정한 70대 노인이 어기여차 하는 노래에 맞춰 모내기 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터보차져와 인터쿨러를 장착한 16기통 1001마력, 최대토크 127.6의 슈퍼 이앙기급이다.
척! 콱! 척! 콱! 척! 콱! 척! 콱! 척! 콱! 척! 콱!
눈부신 속도로 코어를 조합하고 그것을 설치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세상에 코어 심는 일 따위를 이렇게 열정적으로 하게 될 줄이야. 직접 그 일을 실현하고 있는 형진조차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
“끄으으으읏!”
얼른 말해 주십시오! 코어 일만 개 설치! 지금 막 완료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형진의 다급한 마음 속 외침에도 공포와 죽음은 느긋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시끄럽고. 중심 코어에 가서 낙인을 가져다 대.] “끙…”땀을 뻘뻘 흘리며 언제 말해 주려나 하고 기대하던 형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크흑. 역시 악덕 사업주다. 사람의 약점을 이렇게 파고들어 노동을 착취하다니.
[코어의 기능을 업그레이드 합니다. 이 작업은 다소의 시간이 소요됩니다.]곧바로 하나의 메시지가 나온다. 이전에도 한 번 봤던 메시지 같지만, 그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점이 있다. 업데이트가 아닌 업그레이드라는 것이 그 첫 번째이고, 계속해서 이 자세를 유지하고 있으라는 말도 없다.
[됐다. 이건 시간이 좀 걸리니 계속 붙어 있을 필요 없다.] “그럼…”형진은 문득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입만 드러낸 채로 씨익 웃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식의 웃음 지어 보인 적은 많지만 이렇게 느끼는 입장이 되어 보는 건 또 처음인 것 같다.
공포와 죽음은 잠시 형진의 애간장을 녹이며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이내 본격적인 업그레이드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리는 것처럼 중심 코어의 빛이 한층 더 강렬하게 쏟아져 나오기 시작할 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런 말을 건넨다.
[유아를 데리고 호구신의 신전을 찾아가 보도록.] “네?”이건 또 무슨. 미엘이 아니라 유아?
구구구구궁!
중심 코어가 크게 흔들리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형진의 머리 속에서는 이미 코어에 대한 일은 사라져 버렸다.
급히 요정의 문을 열고 아래쪽에 위치한 접속 대기실로 내려갔다. 급한 표정으로 형진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렇지 않아도 갑작스럽게 지진 같은 진동이 전해져서 무슨 일인가 하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린다.
“무슨 일이죠?”
크루그가 먼저 그렇게 물었지만, 싹 무시한 채 형진은 곧바로 유아에게 다가갔다. 이 와중에도 볼이 볼록해지도록 무언가를 열심히 먹고 있던 유아는 형진이 굳은 표정으로 다가와 손목을 콱 움켜쥐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
“잠깐 나랑 어디 좀 가자. 그러니까… 그리칸 신전으로.”
“네?”
이게 뭔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식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아는 형진이 말하는 대로 그리칸의 신전으로 통하는 타운 포탈을 열었다.
“자세한 건 돌아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방금 전의 진동은 코어를 업그레이드 하느라 그런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이만.”
“에? 에엣?”
식구들이 다시 뭔가 묻기도 전에 형진은 유아를 데리고 곧바로 그리칸의 신전으로 넘어갔다.
“대리자님? 그리고 신녀님까지? 갑자기 무슨…”
자신의 집무실에서 따뜻한 봄의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던 최고 사제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입가의 침을 닦아내고는 그렇게 물어왔다.
형진은 얼른 유아의 손목을 잡아끌어 최고 사제 앞에 세워 놓은 다음 이렇게 말했다.
“최고 사제님. 얘 좀 봐주십시오.”
“신녀님을요?”
“네. 급합니다.”
“…”
최고 사제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초에 유아는 신녀다. 그건 다시 말해 어지간한 병 같은 건 걸릴 이유도 없고, 걸려봐야 스스로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유아를 데려와서 자신에게 보인다는 건…
“아…”
그제서야 최고 사제는 무언가를 깨닫고는 얼른 유아의 손과 가슴, 그리고 배에 가만히 손을 대보더니 이내 밝은 표정으로 이렇게 선언했다.
“축하합니다. 신녀님. 그리고 대리자님. 임신하셨네요.”
“에?”
유아는 갑작스런 통보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에게 최고 사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달거리 없으셨죠?”
“네. 뭐… 그거야. 하지만 불규칙한 때도 있고 해서…”
“체온이 계속 높은 상태셨고요?”
“아마도…”
“음식은 어떠셨습니까.”
“딱히… 별 문제는… 평소에도 가끔 많이 먹는 경우가 있어서.”
그렇게 문답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형진은 허탈한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명색이 신녀라는 녀석이 자기가 임신한 것도 모르고 있었냐! 미련 곰탱이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하지만 형진도 남 말할 일은 아니다. 임신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이라도 있었으면, 침대에서 서로 부둥켜안은 채 잠이 들었을 때, 이상할 정도로 따뜻한 그녀의 체온이 뭔가 이상하다는 정도는 깨달았을 테니까.
어쨌든 그렇게 잠시 문답을 나누고 다시 유아의 배를 만져보던 최고 사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제가 보기엔 대략 석 달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안정기로 봐도 무방하긴 하지만, 그래도 한 달 정도는 더 지켜보시는 것이 좋겠죠. 무거운 걸 든다거나, 정신적으로 피로한 일을 한다거나 늦게 주무시는 일은 피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어… 그게…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두 분께 축하드립니다.”
형진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가만히 안아 주며 말했다.
“후… 이 미련퉁아. 하기야 나도 남 말할 일은 아니지만.”
자칫하면 임신한 것도 모르고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고 나서야 알아차릴 뻔 했다. 안정기니 뭐니 하는 것도 씹어 먹을 만큼 유아가 건강하다는 얘기겠지만, 어쨌든 자칫하면 모르고 큰 실수를 할 뻔했다.
쳇. 이미 알고 있으면 바로바로 좀 알려 주실 것이지. 사람 간 떨어지게스리.
“이거… 꿈 아니죠?”
“응.”
“정말이죠?”
“맞아.”
“…”
유아는 그제서야 잔뜩 풀어진 표정으로 형진의 품에 안겨 들었다. 잠시 그렇게 서로를 안은 채 기쁨을 나누던 두 사람은, 자신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최고 사제의 모습을 뒤늦게 눈치 채고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이번에는 조금 천천히 접속 대기실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었어요?”
돌아가기가 무섭게 식구들이 잔뜩 궁금한 표정을 지은 채 그들에게 몰려든다. 형진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유아는 쑥스러움 가득한 표정으로 그들의 시선을 마주했다.
“임신이래. 석달 되었고.”
형진의 보고에 식구들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누군가는 안도하고 누군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헛! 정말요? 유아 언니 아기 가진 거에요?”
“응.”
“와아! 정말 축하해요!”
카트린의 축하를 시작으로 다른 식구들과 여신들 역시 다가와 그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넨다.
솔직히 말해 형진은 자신에게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줄 알았다. 유아와 제랄딘을 아내로 맞은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기별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부관계라도 소원하면 모르겠는데, 거의 매일 불타는 밤을 보내고 있음에도 소식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렇게 형진과 유아가 모두의 축하를 받고 있는 동안에도, 대미궁의 코어는 빠르고 신속하게 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기존의 코어도 형진이 분석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의 복잡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무려 일만 개의 코어가 추가되자 그것은 더 이상 단순히 미궁이라고 부르기도 난감한 무언가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구조의 복잡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던전이나 엘리시온으로 통하는 단순한 접속 기능을 제공하는 그런 무언가가 아니라,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로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흠…”
그렇게 격렬한 변화를 이어가는 중심 코어의 앞에 문득 하얀 빛무리 같은 것이 나타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성스럽고, 한편으로는 두려우며, 또 한편으로는 깊게 가라앉은 무언가였다.
그것은 바로 공포와 죽음이었다.
지금 형진의 주위에 머물고 있는 여신들과는 달리 아바타의 형태를 갖추지 않은, 뿌연 안개와도 같은 형상. 그러나 지금 이순간 공포와 죽음은 분명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엇다.
굳이 형진에게 유아의 임신 사실을 알린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대미궁의 코어를 온전히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이런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현세에 모습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건 그만큼 복잡하고 또한 어려운 일이다.
코어는 그렇게 공포와 죽음이 직접 살펴보는 가운데, 계속해서 변화를 이어갔고 마침내 어느 시점이 되자 하나의 거대한 성전과도 같은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기존에는 중앙의 한 지점에서만 집중적으로 쏟아지던 빛의 폭포가 이제는 하늘로 통하는 거대한 회랑이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입체적인 형상을 띄며 곳곳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빛으로 형상화된 거대한 정보의 폭포.
그것은 이미 그렇게 불리기에 충분한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