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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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어서 옵셔!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게…”
엘리시온에서 벌어진 사태는 그것을 만드는데 직접 관여한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뒤였기에, 그야말로 두 눈 멀쩡히 뜬 채 자신들의 앞마당에서 엘리시온이 통째로 털리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그걸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거기에 들어간 힘의 대부분은 내 것이란 말이야.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당신에게 투자한 건 줄 알아?”
“미안…”
“됐고. 누구 짓인지는 확인했어?”
“그게… 아직…”
“그럼 어떻게 된 건지는?”
“그건…”
“빨랑 대답 못해?”
“그게 말이지…”
여자의 앙칼진 외침에 남자는 더듬더듬 자신이 확인한 바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나 몰래 타나토스에 뒷구멍을 만들어 놨는데, 누군가가 그걸 이용해서 다 털어먹었다?”
“…”
“당신… 제 정신이야? 응? 미친 거 아니야?”
“미안…”
“아하… 이제 보니 나중에 내 뒤통수를 치려고 준비해 놨던 거로군. 어쩐지 신앙 쪽은 건드리지도 않고 공헌도만 잔뜩 벌어들이더니, 그것도 내가 바로 쓸 수 없게 하려고 한 짓 아니야?”
“그건 네가 그렇게 하자고…”
“닥쳐!”
남자는 억울했다. 애초에 신앙은 건드리지 않고 공헌도만 벌어들인 건 여자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애초에 남자는 신앙이고 공헌도고 바닥인 상태. 신앙이 넘치고 공헌도가 부족한 건 여자쪽 아닌가. 이런 식으로 신앙과 공헌도를 불균형하게 수급하면, 균등하게 그것을 분배하더라도 남자는 힘의 불균형으로 인해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수조차 없게 되어 버린다.
그건 남자에게 터무니없이 불합리한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 능력이 있어도 그것을 구현할 힘이 없으면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니까. 그런 와중에 힘이 넘쳐 나는 여자를 만났고, 그녀의 투자를 이끌어내 지금의 엘리시온을 만들었다.
타나토스에 마련해 둔 뒷구멍은 나중을 위한 포석이었다. 그에게는 언제 여자에게 뒤통수를 맞아 기껏 만들어 놓은 것들을 모조리 털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기에 그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만들어 둔 것이 바로 지금 이들이 일컫는 뒷구멍, 다시 말해 대미궁의 코어였던 것이다.
“어쨌든, 저쪽의 누군가가 저지른 일이라 이거지?”
“아, 아마도?”
남자가 그렇게 대답하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내가 잠시 가서 누구 짓인지 확인해 보도록 하지. 그때까지, 다시 되찾을 방법을 알아보도록 해.”
“응.”
그 말을 남기고 여자는 눈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자 남자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이 남자의 정체는 바로 허세와 망상. 본래 다른 세계에서 최강의 신으로 군림하다가 토너먼트에서의 부정이 발각되어 망신을 당하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 나와 지구로 흘러든 신이다.
허세와 망상이 건실한 신이었다면, 지구에서 벽돌을 하나 하나 쌓아 성을 만드는 느낌으로 하나 하나 기초부터 다져서 새로운 교단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허세와 망상은 그런 답답하고 귀찮은 일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건실한 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이미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에게서 그것을 빌리는 방법이었다. 그 대상으로 선택된 것이 좀 전에 그가 쩔쩔맸던 여신, 희망과 생명이다.
희망과 생명은 자신이 저질러 놓은 병크 때문에 사실상 교단을 방치중인 상태였지만, 그 와중에도 신앙의 힘은 착실하게 쌓여가고 있었다. 허세와 망상에게는 자신만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그 힘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희망과 생명은 자신이 저질러 놓은 일을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세계에서의 기반을 원했다. 그렇게 두 신의 이해타산이 일치한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엘리시온이라는 게임이었다.
“후… 도대체 어떤 놈이…”
허세와 망상은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도저히 엘리시온을 되찾아 올 방법이 보이질 않는다. 아무리 자신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뒷구멍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철저하게 강탈해 버리다니.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역시 그 녀석 뿐인가.”
허세와 망상은 곧바로 가능성이 높은 신을 떠올렸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를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갖추고 있으면서, 또한 자신이 만들어 둔 시스템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신이라면 역시 단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공포와 죽음… 젠장.”
본래 토너먼트 같은 시스템은 허세와 망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가 손을 뗀 상태에서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야 정상이다. 아무리 부정을 저질러 축출되었더라도, 그것의 관리를 위해서라면 허세와 망상에게도 어느 정도의 활동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마음 놓고 부정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도, 네깟 놈들이 날 어쩔 수 있겠느냐는 식의 오만이 작용한 결과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런 허세와 망상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갈긴 것이 바로 공포와 죽음이다. 그 망할 것이 기껏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시스템들을 해석하고 이해해서 허세와 망상 없이도 굴러가도록 만들어 놓는 바람에 모든 것이 틀어져 버렸다.
“후…”
멍청했다. 이쪽 세계의 일에 몰두하느라 녀석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니. 이건 정말 희망과 생명에게 욕을 바가지로 퍼 먹어도 할 말이 없는 게 당연하다.
허나, 그렇다고 이렇게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게 어떻게 만들어 놓은 것인데 그렇게 간단하게 포기해 버린단 말인가.
“역시… 방법은 토너먼트 뿐인가.”
뒤통수를 때릴 방법이 없는 이상, 남은 건 정공법 뿐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비라면, 이 세계에 온 시점에서 이미 차근차근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아니, 이 세계로 온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바로 그것 때문이다.
허세와 망상은 목록을 하나 꺼내어 살폈다. 그곳에는 여러 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이런 경우를 대비해 그가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의 이름과 상세 정보를 적어 놓은 명부였다.
“마침 호구년이 자리를 비웠으니 지금이 기회다.”
평소라면 희망과 생명의 이목을 끌 수 있으니 함부로 포섭할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마침 희망과 생명이 저쪽으로 건너가 있는 지금이 바로 이들을 포섭해 추종자로 만들 절호의 기회였다.
허세와 망상은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 명단에 있는 이름들을 컴퓨터에 옮긴 다음 각 지사에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달된 명단 중에는 한국에 사는 한 남자의 이름이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유형진.
한국 지사에 하달된 단 하나의 이름이다.
“응?”
“왜요?”
“아니… 갑자기 귀가 간지러워서.”
침대에 앉은 유아에게 정성껏 준비한 요리를 먹여주는 일을 마치고 식기를 치우던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파려고 했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봐요. 귀청소 해줄게요.”
“그럴까.”
형진은 얼씨구나 하고 유아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그런 그의 모습에 유아와 제랄딘은 빙긋 웃어 버리고 만다.
유아가 조심스럽게 귀청소를 해주는 것을 즐기고 있는데, 문득 제랄딘이 허공을 바라보며 한 손을 귀에 가져가더니 소식 하나를 전해 주었다.
“최고 사제님들이 인선을 끝냈다는데요.”
“그래? 그럼 가봐야겠네.”
“지금요?”
“응. 나머지는 있다가 돌아와서 부탁해.”
“그래요. 그럼.”
형진은 일단 회합장에 접속해서 최고 사제들이 뽑은 사제들이 어느 신전 소속인지 확인한 다음, 곧바로 요정의 문을 통해 각 신전에 들러 그들을 섬으로 데리고 왔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 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대리자님.”
최고 사제들이 선발한 인원들은 모두 나이 지긋한 여성 사제들이었는데, 오랜 세월 동안 산파 역할을 도맡아 해온 베테랑들이었다.
사제들은 섬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일단 유아를 방문해 그녀의 상태부터 살폈다.
“신녀님도 아기님도 모두 건강하십니다.”
“역시 여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으신 분이라 건강 상태가 남다르시네요.”
“이 상태라면 너무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지만 않으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격렬한 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유아는 얼굴이 빨갛게 익어 버렸다. 물론 사제들이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그저께 밤의 일이 떠올라 버린 탓이다.
유아의 그런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바로 눈치 챈 한 사제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신녀님의 상태가 워낙 좋으셔서 이미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다만 밤에 부부관계를 맺을 때는 가급적 배가 눌리지 않도록 주의해 주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아… 그럼 사랑을 나눠도 된다는 얘긴가요?”
기다렸다는 듯이 형진이 그렇게 묻자, 유아는 물론이고 제랄딘마저도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한 달 정도는 주의를 해주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고 앞서 다른 분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배가 눌리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러자면 체위를 조절하시는 편이 좋겠지요. 제 생각으로는 대리자님께서 주도하시기 보다는 신녀님께서 상위에 위치한 채로 주도하시는 편이 좋다고 보여집니다.”
“와…”
숙련된 사제들을 인선해서 보내달라고는 했지만 설마 이런 식의 충고까지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터라 형진은 절로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제가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누가 보면 벌써 출산 예정일이 잡힌 건줄 알겠다. 형진의 그런 성급한 모습에 사제들은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직은 그렇게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필요한 것은 차차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아무튼 잘 좀 부탁드립니다.”
“네. 건강한 아기님이 태어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왕 이렇게 산파 경험이 풍부한 사제들을 초빙한 김에 제랄딘은 물론이고 하마란까지 불려와서 검사를 받도록 했다. 오귀스트와 단둘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별로 감정을 드러내 보이지 않던 하마란도 이 때만큼은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새 신부인 건 틀림이 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부산을 떨고 있는데, 문득 보호와 균형이 와서 형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저기… 진님.”
“네?”
“혹시… 앞으로 유아님은 거짓된 천국에 가지 못하는 건가요?”
“그건…”
이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솔직히 유아를 밖으로 나다니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더구나 지금은 완전하게 안정기에 접어든 상태도 아니지 않은가.
“네. 아무래도 당분간은.”
“그렇군요. 어쩌지…”
“무슨 일이라도?”
“그게… 승희님이 사실은 몸이 좀 아프대요. 그래서 유아님에게 회복을 부탁하려고 했는데.”
“아…”
그제서야 저쪽 세계에서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승희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 문제라면, 마침 사제분들을 초빙해 왔으니 그분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분들도 병을 낫게 할 수 있나요?”
“물론이죠. 유아처럼 기적에 가까운 수준은 아니더라도, 경험이라면 오히려 그분들이 더 풍부할 겁니다.”
“아… 그렇군요.”
“기왕 말이 나왔으니 제가 말을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형진은 여신을 데리고 사제들이 머무는 집으로 향했다.
“어서오세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짐 정리하시느라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실은…”
형진은 간단하게 여신의 부탁을 전했다.
“아… 보호와 균형님. 미처 알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 사과를 받아주십시오.”
“사과라뇨. 괜찮아요. 그러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사제는 자그마한 여신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또한 그 귀여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제가 잠시 함께 가보도록 하지요. 환자가 있는 곳은 어디인지요.”
“잠시만요.”
형진은 가만히 사제의 손을 잡은 뒤 엘리시온 입장 허가를 전해 주고는 다시 말했다.
“사실 이건 비밀입니다만…”
그렇게 거짓된 천국에 대한 내용을 전하자 사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곳이 있었다니… 놀랍군요.”
“어떻게 보면 회합장을 조금 더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아… 그런 건가요.”
그렇게 얘기를 나누며 준비를 마친 여신과 사제는 곧바로 엘리시온에 접속했다. 그들의 모습이 한 줄기 빛과 함께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 형진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식곤증 때문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유아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먹고 바로 자면 살찐다.”
“우웅… 왔어요?”
“잘거면 편하게 자.”
“네…”
형진은 유아를 편하게 눕힌 다음 그녀의 옆에 누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유아는 그런 형진을 향해 배시시 웃어 보이다가 이내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가만히 시트를 덮어 주며 그녀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환하고 은은한, 하지만 성스러움이 가득한 그런 빛.
“응?”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유아의 눈이 떠지더니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오랜 만이야.]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형진은 지금 자신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말았다.
희망과 생명.
그동안 기별조차 없었던 호구신이 느닷없이 유아의 몸을 빌어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