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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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현신
“가요. 지금 시간이면 딱 드라이브하기에 아주 좋으니까.”
“드라이브라…”
한국 같으면 차를 타고 어딘가를 달린다는 것 자체를 고문으로 느끼기에 딱 좋다. 아주 이른 새벽 시간 같은 때가 아니면 도시 인근은 거대한 주차장이라는 말을 방불케 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땅이 넓은 나라라면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바바라라는 여자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온 그들은 주차장 관리인의 깍듯한 인사와 함께 다시 길로 들어섰다. 어느새 햇살도 많이 누그러져서 꽤 화창한 느낌이다.
내리막길을 타고 몇 번 좌우로 방향을 틀자 유명한 붉은 빛 다리, 금문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에서 산지 오래 되었나?”
차창 밖의 경치를 바라보며 묻자, 요안나는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는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네? 아… 맞아요. 벌써 한 십년은 됐나. 꽤 오래 살았죠.”
“따로 여길 고른 이유가 있어?”
“음… 아까도 말했지만 처음엔 기후가 좋아서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거에요. 거기다 이 근처에 투자하는 기업들이 많아서라는 점도 한 가지 이유였구요.”
“투자? 어디에?”
“실리콘밸리요. 정확히는 샌프란시스코 남쪽의 산호세 근처긴 하지만, 여기선 대충 근처로 쳐요.”
“…”
솔직히 말해서 형진으로서는 그런가보다 할 뿐이다. 실리콘밸리라는 말은 들어봤다. 하지만 그게 고작이다. 미국의 첨단산업이 몰려있는 곳이니 아무리 흙수저 출신이라도 상식선에서 이름 정도는 들어봤지만 그게 고작이다.
다리를 중간쯤 건너자 자욱한 안개가 밀려들기 시작한다. 위험하지 않나 싶은 생각을 떠올렸지만 요안나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차를 몰아 101번 프리웨이라는 곳으로 들어섰다. 그 상태로 다시 몇 번 이리저리 좌우로 길을 꺾고 나자 사람들이 모여서 사진을 찍고 있는 장소가 나타난다.
그곳을 지나자 고급 주택들이 밀집된 바닷가 마을과 요트들이 즐비하게 정박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소살리토에요. 예술가 마을이나 선상 가옥 같은 걸로 유명한 곳이죠. 원래는 여기서 살아볼까 했는데, 관광객들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게 거슬려서 지금 있는 곳으로 정했어요.”
“그렇군.”
역시나 이번에도 그런가보다 할 뿐이다. 그렇게 바닷길을 조금 달리다가 이번에는 산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샌프란시스코의 복잡한 길과 비교하면 완만한 목장 길을 달리는 듯한 호젓함이 조금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다.
조금은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침엽수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자 다시 작은 도시가 모습을 드러낸다.
“페탈루마에서 근처에 별장이 있으니까 거기서 쉬었다 가요.”
“그래.”
쉬었다 가자고 말하는 투가 어쩐지 문자 그대로 쉰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지만, 꽤 오래 운전을 했고 어느새 슬슬 점심 때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자고 순순히 허락했다.
차를 타고 호변을 따라 조금 들어가자 깔끔한 느낌의 이층집이 모습을 드러낸다. 차고에 주차를 시키고 나서 안으로 들어가자 널찍한 마당과 잘 관리된 풀장이 나타난다. 하지만 어쩐지 좀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별장 치고는 너무 깔끔하다고 해야 하나.
“따로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 거야?”
“네. 실은 출발하기 전에 미리 연락을 해서 준비를 시켰어요. 꽤 괜찮죠?”
“응.”
살짝 윙크를 해 보이는 요안나의 모습에 형진은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러고 보면 머리를 하러 나가자고 할 때부터 이미 드라이빙 코스까지 다 계획해 두고 있었나보다. 평소엔 살짝 맹해 보이는 모습인데도 사실은 꽤 용의주도하다고 해야 하나.
우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걸치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 소파에 걸어 놓은 요안나가 형진의 품에 와락 안긴다.
“난… 준비 됐어요.”
“무슨 준비?”
“벌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그렇게 대답하는 요안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나름 유혹을 해볼 생각인가보다.
“그전에 가볼 곳이 있어.”
“네? 어딜…”
“내가 사는 곳.”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황혼과 망각의 힘을 발현했다.
“어?”
요안나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집 안의 모습이 흐트러지는 듯 하더니, 처음 보는 정원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자 높게 솟아오른 고풍스런 왕궁이 보이고, 다시 반대로 시선을 돌리자 산호초섬을 길게 두른 성벽과 호수처럼 자리 잡은 바다 위에 솟아오른 별궁들의 야경이 보인다.
“여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지구에 존재하는 곳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들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요안나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형진이 작게 속삭였다.
“엘 파르드 왕국의 왕성 라이언하트. 내 집이야.”
“…”
이번에는 요안나가 놀랄 차례다.
“왕성이 집이면… 진… 왕이었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자, 갈까.”
“…”
형진은 요안나의 손을 잡고는 왕궁 안으로 들어섰다. 웅장한 현관을 들어서서 길게 놓인 알현실을 따라 들어가자, 어떻게 알았는지 아기들이 그의 몸에 일제히 달려든다.
“빠아?”
“어이쿠. 아빠 기다렸어요?”
“빠앗!”
“그래. 잠깐 일이 있어서 멀리 좀 다녀오느라 늦었어.”
자기들 놔두고 어디서 뭐했냐는 듯이 빠아 거리는 아기들을 그렇게 다독인 형진은 이게 뭔 일인가 하는 식으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요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아이들이야.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상황이라 이름도 아직 못 지었지만.”
“아…”
그제서야 요안나는 앞서 아이가 일곱이나 있다고 말했던 사실을 되새겼고, 뒤이어 아기들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고는 당황해서 얼른 옷매무새를 고치기 시작한다.
“진?”
아기들을 따라 나왔던 미엘이 형진과 요안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온다.
“이쪽은 미엘. 내 아내야. 이쪽은 요안나.”
“미엘이에요.”
“요안나입니다. 반갑습니다.”
요안나로서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물론 아내가 셋이나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어도 이렇게 갑자기 소개를 시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해서 더 그렇다.
“유아와 제랄딘은?”
“둘 다 아직 안 자요. 당신 기다리느라.”
미엘의 눈에 조금 비난의 기색이 담겨있다. 마눌들이 잠도 안 자고 기다리는데 어디서 뭐하고 있었냐는 듯한 표정이랄까. 냄새 같은 것에 민감한 터라 이미 형진에게서 은은히 풍겨 나오고 있는 요안나의 체취를 눈치 챈 모양이다.
형진은 미안함을 담아 살짝 웃어 보이고는 미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다행이군. 그렇지 않아도 오늘이 가기 전에 설명을 하고 싶었는데.”
“유아님이 임신 중인 걸 잊은 건 아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말을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야. 괜히 말 안하고 있다가 나중에 알게 되는 게 더 충격일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이건 불가항력에 가까운 일이기도 하고.”
불가항력이라는 말에 미엘은 뭔가 사정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흠… 알았어요. 그래도 조심해야 하니 사제님들을 대기시켜 둘게요.”
“미안해.”
“괜찮아요.”
미엘은 그렇게 말하고는 분신을 만들어서 사제들에게 보냈다. 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꼬리 하나가 분신으로 변해 어딘가로 가는 모습에 요안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포와 죽음의 신녀이긴 해도, 그녀 역시 일단은 지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아기들을 덕지덕지 붙인 채, 형진은 미엘과 요안나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섰다. 침대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유아와, 그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제랄딘이 그런 형진의 기척을 눈치채고는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난다.
“진. 늦었잖아요… 어라?”
아무리 맹한 유아라도 전에 본적이 없는 형진의 옷차림과 뒤따라서 머뭇거리며 들어오는 요안나의 모습에서 뭔가를 눈치 챈 모양이다.
“뜬금없긴 하지만, 보고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가족회의를 열었으면 하는데.”
“알았어요.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죄송… 합니다.”
유아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지만 의외로 담담하게 요안나에게 의자를 권했다.
“실은…”
형진은 아기들을 다독이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지금까지의 자신이 사실은 아바타였다는 것은 물론이고, 그동안 자신의 본신을 요안나가 보살피고 있었다는 내용까지 가감 없이 전부.
의외로 마눌들은 형진이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리 크게 놀라지 않는 기색이었다. 이미 엘리시온등을 접하면서 어쩌면 형진이 신입 길드원 사인방과 같은 곳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형진이 아바타 상태였고, 그의 본신을 요안나가 보살피고 있었다는 대목에선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바타라는 거… 신에게만 허용된 거 아니었어요?”
“딱히 그렇게 단정할 수만도 없어. 수빈이나 그쪽 사람들을 봐서 알겠지만, 필요할 경우엔 인간에게도 허용이 되는 것이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당시로서는 공포와 죽음께서도 불가항력에 가까운 일이었고.”
“그렇군요.”
대략 상황의 설명이 끝나자, 문득 유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요안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요안나님. 고마워요. 진을 보살펴 주어서.”
“아뇨. 저는… 그러니까…”
“저도 감사드려요.”
“저야 말로…”
아무래도 아침 드라마의 막장 전개 같은 걸 떠올리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요안나는 자신을 향해 진심어린 표정으로 고맙다고 말하는 유아나 제랄딘의 모습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채 마주 자리에서 일어나 답례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알겠지만, 이제 나는 저쪽 세계의 일에도 어느 정도 관여를 해야만 해. 당장 공포와 죽음께서 어떤 식으로 일을 맡길지는 알 수 없지만, 허세와 망상이라는 강대한 적이 저쪽에서 세력을 구축한 상태이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몰라. 그런 점에서 보자면 요안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해. 그래서 말인데, 나는 요안나를 우리 가족으로 받아들였으면 해.”
가족이라는 말에 마눌들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여러 번 기회가 있었음에도 자신들 외의 다른 여자들은 건드리지 않았던 형진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하마란이라든가. 하마란이라든가.
미엘은 어렴풋이 이미 둘 사이가 기정사실이 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굳이 그것을 입 열어 말하지는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굳이 그런 걸 말해봐야 분란만 일어날 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곧바로 그녀를 받아들이겠다는 말은 아니야.”
“네? 그게 무슨…”
“우리 집의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하는 일이 있잖아?”
“…”
잠시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던 마눌들은 이내 자신들이 처음 형진의 식구가 되었을 때를 떠올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거… 꼭 해야만 해요?”
“무슨 소리야. 당연히 해야지. 이건 아예 가법으로 정할 생각까지 하고 있는 걸.”
“가법이라니…”
“나중에 아들이 태어나서 며느리를 맞이할 때도 이건 반드시 거쳐 가야만 해. 난 이미 그렇게 정했어.”
“끙…”
요안나는 눈앞에서 나누고 있는 대화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채였지만, 이내 진의 부인들이 자신을 불쌍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는 뭔가 일이 잘못 되어 가고 있음을 알아챘다.
“이게 가법까지 운운할 일인가 싶긴 하지만… 어쨌든 적응기간이 필요한 건 사실이긴 해요.”
“확실히 우리 집은 이래저래 평범하진 않으니까요.”
“다른 식구들이랑 얼굴도 익혀야 하니…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닐지도 모르죠.”
어쩐지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묘하게 요안나에 대한 충고 같은 느낌이다.
“그럼 이의가 없으면 그렇게 결정하는 걸로 하지. 그럼 교육은 제랄딘이… 아니다. 미엘, 부탁해도 될까.”
“제가요?”
“제랄딘은 아무래도 숙련도가 좀…”
“후후. 확실히 아가씨가 좀 그렇긴 하죠.”
제랄딘은 볼을 부풀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부정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녀가 셋 가운데서 그 일에 대한 숙련도가 제일 부족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그렇게 교육 담당까지 전해지자, 형진은 마침내 요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요안나.”
“네?”
“자, 이걸로 갈아 입어.”
“…”
형진이 요안나의 눈앞에 내밀어 보인 것은, 다름아닌 메이드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