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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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진실
직접 아바타를 조종해 보면서 느낀 것이라면, 이것은 여건이 된다 해도 무한한 숫자를 운용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신은 인간보다 초월적인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다 쳐도 신도 모두를 언제나 항상 지켜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즉, 이것은 다시 말해 형진을 계속해서 지켜보는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형진이 중요한 인물이라서? 글쎄. 물론 그런 이유도 가능하긴 하겠지만, 단순히 중요한 인물이라서 항상 시야 안에 두고 애지중지한다는 건 솔직히 말해 그리 효율적이지 못한 일이다. 게다가 그런 이유라고 보기에는 형진의 안위에 대한 조치가 아무래도 미흡하다.
물론 공포와 죽음은 지금까지 형진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다. 단순히 물질적인 것을 넘어, 집행자라는 이름의 존재가 되고 난 뒤 형진은 많은 인연들을 만났으며, 그 인연이 결실을 맺어 지금은 왕성 라이언하트에서 식구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그 식구들 중에는 마눌들은 물론이고 일곱의 아이와 조만간 태어날 한 명의 아이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정말 만약의 만약에 해당되는 얘기긴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의 위험성을 사전에 인지한 공포와 죽음의 안배였다면 어떨까.
처음 형진이 타나토스에 발을 들였을 때,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부도 명예도 능력도 무엇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그래서 어딘가에서 죽어 넘어져도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그런 존재에 불과했다. 암담한 얘기긴 하지만, 그가 지구상에서 모습을 감추었음에도 세상은 그를 인지하지 못했으며 가족 또한 굳이 그를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가 지니고 있던 인스턴트 킬은 분명 대단한 능력이었지만, 그것이 발현되는 것은 오직 게임이라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한정된 공간에 국한 되었으며, 당사자인 형진 스스로도 현실에서 그것을 발현시킬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했다.
그런 형진이라는 인물을 타나토스에 데려다 놓고 지금과 같이 두 세계를 아우르는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만들어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공포와 죽음이다. 물론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에는 형진 스스로의 노력 덕분이긴 하지만, 공포와 죽음이 길을 열어주며 항상 보살폈다는 것에는 누구도 이견을 표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본 적조차 없는 형진이 공포와 죽음이라는 신에 대해서만큼은 약간의 의심도 품지 않을 정도로 큰 신뢰를 보냈던 것 역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완전하고 한점 티끌조차 섞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신뢰에 최근 작은 금이 가는 일이 생겨났다. 그것은 바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신이 감추어지고 이제껏 아바타로 생활해왔던 사실이 밝혀지면서였다.
그리고 그 작은 의심은 마침내 지금까지 아무런 의심조차 품지 않았던 사실에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어째서 공포와 죽음은 자신을 이렇게 세심하게 보살피는 것일까 라고.
그러다가 형진은 자신이 하엘과 같은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너무나 위험한 존재이기에 항상 시야가 닿는 곳에 놓아두고 있었던, 파괴와 재생의 구현자이며 흑요호라는 강대한 힘을 지닌 환수인 하엘처럼, 자신 또한 공포와 죽음에게 있어 반드시 시야에 넣어두어야만 할 필요가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일단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이제껏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누려왔던 모든 것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말로 이 모든 것이 오직 나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누군가의 치밀한 안배에 의해 그것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 일을 꾸민 자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그 자는 과연 어떤 이유에서 이런 것을 자신에게 베풀었던 것일까.
세상의 모든 진리가 그러하듯, 어찌 보면 가장 어려운 것은 처음 의문을 품는 것일지도 몰랐다. 형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일단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자, 예쁘게 정돈 되어 방안 서랍장에 고이 모셔 두었다고 생각했던 실타래가 하나씩 풀려 나가며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는 행동과 판단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가진 것이 없기에 지켜야 할 것도 없고, 버려야 할 것이 없기에 서슴없이 모험이나 도박을 할 수 있다. 흔히 진보라고 일컬어지는 사상을 가진 자들이 그렇게 앞장서서 개혁을 주장하고 기존의 것을 뒤엎으려는 것은 그렇게 해도 잃을 것이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풍족하게 지닌 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무언가 하나를 바꾸려면 그것은 이미 지니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하나를 버려서 하나를 얻는다면, 굳이 바꿀 필요 없이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이득이다. 하나를 버려서 둘을 얻는다 해도 마찬가지. 굳이 모험을 해서 지니고 있던 하나마저 잃는 것보다는 그냥 가만히 하나를 움켜쥐고 있는 편이 그들로서는 이득이기 때문이다. 젊어서 진보라 불리던 사람이, 늙어서 보수로 바뀌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너무나 위험해서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죽여 없애더라도 다시 인지할 수 없는 어딘가에서 인지하지 못하는 시간대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는 자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죽여 없애는 것이 가장 간단한 해결 방법이지만, 차마 그것을 실행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자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간단하다. 그 존재에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부와 명예와 행복을 안겨준 상태로 자신의 곁에 두면 된다. 너무나 행복해서 다른 쓸데없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로 자신의 곁에 박아 두면 된다. 물론 인간이라면 이런 식의 대응은 오히려 상대로 하여금 더 큰 욕심을 일깨우도록 만들어 화근을 자초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신과 인간이라는 뛰어넘기 어려운 격차가 중간에 존재한다면 어떨까. 적어도 그 인간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는 닥쳐올지도 모르는 커다란 위험을 관리하는 가장 효율적이고도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그렇다. 지금의 형진은 너무나 많은 것을 가졌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권력을 가졌으며, 하룻밤만에 거대한 왕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재력을 가졌으며, 장인으로서의 명예를 가졌으며, 집행자 중에서도 선택받은 조정자로서의 힘을 가졌으며, 자신만을 사랑해 주는 아리따운 마눌들을 가졌으며, 또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해맑게 웃는 귀여운 아이들을 가졌다.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 형진이 어떤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무엇보다도 강력한 족쇄로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너무나도 달콤하며, 너무나도 아름답고, 너무나도 향기로운… 그래서 도저히 빠져나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그런 족쇄가.
이것을 깨닫는 순간 형진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신이라는 존재의 시야와 사고가 이렇게도 크고 넓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다른 신들 또한 이런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인간과 신에게는 그 정도로 커다란 격차가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품는 것 자체가 형진에게는 스스로를 해칠 수 있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이중 삼중의 족쇄에 묶여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는 공포와 죽음에게 있어, 자신이 이런 식의 생각을 품었다는 것을 인지시키는 행위 자체가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형진 스스로가 공포와 죽음이 안배해 놓은 그 모든 족쇄들을 벗어날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노예근성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왜 지금껏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로 벗어 던져야 하는가. 내가 왜 사랑하는 여인들을 멀리하고 아이들을 외면해야 하는가. 누군가의 안배든 뭐든 간에, 그 모든 것을 선택하고 받아들인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녀들을 받아들이고 아이를 태어나게 한 장본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그녀들을 안았을 때 느꼈던, 아이들의 종알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느꼈던 그 모든 기쁨은 조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느꼈던 행복 또한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 모든 것을 왜 버려야 하는가.
형진은 단지 알고 싶을 뿐이다.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이기에 다른 누구보다도 강력하고 엄정하며 치밀한 공포와 죽음이라는 신이 이처럼 신경을 쓰는 것인지.
혹시라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그 위험한 무언가가 깨어나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부수는 것을 막으려면, 최소한 그 위험이 무엇인지는 인지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공포와 죽음이 아무리 치밀한 대비를 해두었더라도, 그리고 항상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상태이더라도 순간의 아주 작은 실수로 모든 것이 헝클어지는 그런 사태는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형진은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묻고 있는 것이다.
자칫 공포와 죽음의 선택 하나에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 남편이며 또한 아버지다. 그는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자이기에, 이제는 알아야만 한다.
자신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하여.
[후…]공포와 죽음은 나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형진에게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걱정과 우려와 두려움과 의지를 읽는 순간 공포와 죽음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아주 작은 균열이었다.
본신을 숨겨 두고 있었다는, 어떻게 보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에서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발단을 따지고 넘어간다면, 아바타를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빠르게 성장하는 형진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을 확인한 순간 만약을 위해 희망과 생명을 유아라는 신녀의 몸속에 가둬둔 것이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진으로 하여금 대미궁에 손을 대도록 한 것부터가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처음부터 자신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요안나를 통해, 형진이라는 존재를 처음 인지한 바로 그 날부터 이미 지금의 상황은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공포와 죽음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는 진실을 밝힐 때가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 빠르다. 과연 지금 이 상황에서 형진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이 옳은 일일까. 혹시 지금의 이 사태가 또다른 파국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되는 것은 아닐까.
신이라 해도 전지전능한 것은 아니다. 신은 분명 위대한 존재지만, 이러한 선택의 순간에는 또한 무력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공포와 죽음은 지금 이순간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반드시… 지금 알아야만 하겠나.]공포와 죽음이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건 어찌 보면 질문이 아닌 항복 선언인지도 몰랐다. 그저 자신의 결정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스스로에게 인지시키고자 하는 그런 아주 단순한 확인인지도 모른다.
형진은 대답했다.
“네.”
사실 이 모든 의문을 품기 시작한 시점에서, 스스로도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다.
단서랄 것도 없다.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인 인스턴트 킬이라는 능력 자체가 이미 본질을 다 알려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단숨에 죽일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순간 아이템이라고 불리는 무언가를 얻도록 해주는 힘.
신들의 이름은 두 가지 단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지고, 그것은 그 신의 존재 의의와 지닌 바 권능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미 답은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형진이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다는 사실까지 확인하자, 공포와 죽음은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형진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너의 진실한 정체는, 나의 오라비이며 또한 미친 신이라 일컬어지던 파괴와 재생, 그의 파편이다.]